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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화 〉4. 구출 (47/100)



〈 47화 〉4. 구출

도로스와 닥터 윌슨과 헤어진지 3일 째. 둘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드디어 메드비크에 도착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천장의 인공조명들은 모두 꺼져있었다. 가로등의 램프만이 드문드문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마을의 전경은 유적으로 출발하기 전과 다를 바 없어, 둘은 곧장 여관으로 향했다. 도로스들과 여관에서 만나기로 합류하기로 했기에, 카지트는 혹여 그들이 먼저 도착했을까 기대했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둘은 일단 쉬기로 했다. 지금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거니와 피로한 심신이 휴식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침대와 옷장 뿐인 텅빈 방. 그러나 그 두 개만 있다면 충분했다. 특히 침대. 인류 문명의 집대성인 침대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값싼 싸구려 침대라 하더라도  푹신함만큼은 냉기가 올라오는 딱딱한 바닥과 비교하면 예술의 경지였다.


"크아..녹아버리겠다.."



배고픔보다 수면욕이 앞섰다. 카지트는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푹 퍼졌다. 그의 집에 있는 최고급 침대보단 별로였지만, 시장이 반찬인지라 피로에 절은 몸은 싸구려침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프로바움 또한 오랜만에 맛보는 침대에 푹 빠져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어이, 영감."



거의 날아가기 일보직전인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카지트는 입을 열었다. 목은 벌써 잠들 준비가 되었는지 잔뜩 잠겨있었다. 어렴풋한 감이 동앗줄처럼 무의식으로 떨어지려는 의식을 잡아챘다. 어쩌면 하는 걱정.




"..왜 부르나."

프로바움 또한 반응이 한 박자 느린 게 어지간히 피곤한 것 같았다. 약간의 짜증마저 섞여있었으나 카지트는 그런 것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문득 그를 잡아챈 걱정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프로바움에게 제안했다.




"내일 녀석들이나 찾으러 가보자."



"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아직 합류하기도  날까진 하루가 더 남았거늘."


프로바움은 단순한 흰소리가 아닌 것을 깨닫고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마 또 감인지 뭔지 겠군. 그렇지않으면  태평한 살쾡이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낼 리 없었다.




"그냥..느낌이 좀 찝찝해서 말야. 그러니까 한  찾으러 가보자고."

"찾으러 간다해도 어디로 갈껀가? 설마 다시 유적에 들어가자는 소린 아니겠지?"

"아냐, 내가 미쳤다고 거길 다시 기어들어가겠어? 그냥 일단 유적 주위 파이프를 살펴 보려고. 혹시 구멍난 곳이나 그런 곳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글쎄. 그런 기적같은 일이 정말로 일어날  모르겠군."



마치 작위적인 소설의 전개같잖은가. 그는 투덜거렸다. 사실  소설의 작위적인 전개 같은 일이 정말로 일어났지만 그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어쨌든, 갈 거야?"

"오랜만의 산책도 나쁘진 않겠지."


프로바움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산책치곤 좀 길이 험하긴 하지만  어떤가. 이렇게 푹 자고 일어나면 뭐든지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바움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내일 일은 내일하자. 내일의 고민을 지금 생각해봤자 당장 할 수 있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둘에게 필요한 건 적절한 휴식이었다. 둘의 정신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깊은 잠 속으로 침전했다.







다음날 새벽, 둘은 여관 안의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새벽 5시. 얼마나 빨리 일어났는지 인공조명조차 아직 어슴푸레한 빛을 뿜고 있었다. 오랜 용병 생활덕분에 그리 오래 자지않아도 괜찮았다. 고작 하룻밤 잔 걸로 그간의 피로가 전부 풀리진 않았지만 움직이긴 충분하다.

둘은 마을을 나와 파이프를 걸었다. 파이프는 메드비크의 밤낮에 상관없이 여전히 검었다. 군데군데 녹이 슨 파이프와 바닥에 가득 쌓인 정체모를 쓰레기들. 어제는 정신을 반쯤 놓은 터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파이프는 여전히 더럽고 메쓰꺼웠다.

"그래서..이제 어떻게  건가?"

프로바움의 말에 카지트는 고민했다. 아직 특별히 이렇다 할 계획은 없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에 수색이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 뿐. 길잡이의 감에 따라 즉흥적으로 정한 것에 가깝다. 그러니 딱히 이렇다 할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일단은..유적 주위로 가봐야겠지. 그 주변을 살펴보자고."


프로바움은  모르겠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하루 정도 남긴 했으니 이번은 자네 의견을 따르겠네. 그런데 탄약보충은 어디서 할 셈인가?"

아쉽게도 메드비크는 작은 마을이라 무기나 탄약등을 판매하는 곳은 없었다. 그나마 구할 수 있다면 마을 자경대 정도일 텐데,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탄약만 해도 빠듯할 것이다. 본디라면 남은 하루동안 이곳저곳 발품을 팔면서 물건들을 구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카지트의 빠른 결정에 그럴 시간이 나지 않았다.


프로바움에겐 더 이상 남은 탄환이 없어 원거리 화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카지트는 그나마 나은 나은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잔탄 수가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보급을 하지않는다면 더 이상의 전투는 곤란할 터다. 카지트도 그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해본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음..그게, 그..발굴대 녀석들한테서 좀 얻으면 어떨까?"


말을 끄는 모양새가 자신이 들어도 말이 안되는 것같다. 프로바움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무장을  상대에게 탄약을 사겠다고? 그거야 말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다.



"아예 우린 총알이 하나도 없으니 죽여달라고 하지 그러나."




"아하하, 나도 말이 안된다는 건 알고 있는데..그래도 에메랄드 컴퍼니잖아? 다른 질나쁜 쓰레기들과는 다르겠지. 그리고 어차피 주변에서 총알 얻을 수 있는데는 없고 말야."




자동인형은 탄식했다. 도시나 마을 밖은 치외법권이다. 딱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큰 일이 터졌을 때 가끔 치안대들이 돌아다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누군가 죽거나 살해당해도 아무도 모를 무법지대다. 그렇다보니 마을 안에선 동료라는 녀석들도 파이프에선 도적떼로 돌변하기도 하니 뭘 더 말하겠는가.


그런 곳이기 때문에 탄환과 무기는 강력한 힘이다. 최소한 이 두 가지를 갖고 있다면 상대는 아마 쉽사리 덤빌 생각을 하지 못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돈보다 소중한 법이니까. 그러나 둘  하나라도 없다면..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짝없는 총이나 총알은 화폐로 교환 가능한 물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테니까.



그리고 에메랄드 컴퍼니가 제아무리 신뢰도 높은 거대 회사라고 하더라도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 또한 믿을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제롬은 겉보기엔 친절하며 사교적이지만 정말로 그런건지 누가 아는가? 본색을 드러내고 둘을 잡으려한다면 순식간에 끝이 날 것이다. 숫자나 무장은 저쪽이 압도적인 우위니까.



자동인형은 골치아프다는 듯 황동색 강철코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믿을 수 있다는 근거는 있나? 탄환을 구할 수 있는 곳이 현재로썬 유일하다는 사실은 알고있다네. 그래도 근거나 대책없이 만나러가는 일은 사양하고 싶군 그래. 괜한 개죽음은 사양일세."




"근거라면..감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네. 그리고 우리 둘이라면 제롬이라는 녀석을 인질로 잡을  있을테니까. 그거라면 탈출 할 기회 정돈 벌 수 있겠지."




"그놈의 감은.."

프로바움은 뭐라고 한 바탕 쏘아붙이려다 참았다. 대체 그놈의 '감'이란 녀석이 뭐길래 시도때도 없이 나와서 일을 저질러버린단 말인가. 자신의 감을 믿는 카지트나 도로스는 크게 별다른 걱정 없겠지만, 걱정은 길잡이의 감 따위를 가지고 있지않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확실한가? 그리고 발굴대 대장을 인질로 잡겠다니 좀 무모하군. 구체적인 방안따윈 없는 듯 한데?"



카지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보는 사람 기분나쁘게하는 수상한 미소라 프로바움은 마주 노려봤다.

"이번만큼은 확실해. 내 사람보는 눈을 믿으라고. 그리고 대책이라면..섬광수류탄이 있잖아?"


"그게 무슨 소린가?"




프로바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이다. 카지트의 빙글거리는 웃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그는  알고있다는 어조로 능글거리며 말했다.

"에이, 모르는 척하지 말자고. 조심성많은 영감이 고작 하나만 들고 다닐 리는 없잖아?"


그는 침묵했다. 미소를 거둬들이지않은 채 카지트는 말없이 프로바움을 응시했다. 무언의 격투 끝에 이긴 것은 카지트. 프로바움은 졌다는 듯 양손을 허공에 들어올렸다. 패배의 표시였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쓸 데 없이 눈치만 빨라가지곤. 그래, 아직   남았다."

밑천을 털린 게 분한 듯 그는  글자씩 씹어먹을 듯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카지트에겐 그의 기분을 헤아릴 정도의 섬세함 따윈 없었기에 당당하게 승리의 환호를 울렸다. 자동인형은 애꿏은 돌을 발로  번 차고 경고를 입에 올렸다. 이것만큼은 그도 양보할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쓴다면 목격자를 남겨둬선 안  거다. 괜히 치안대나 군까지 섞이면 손해보는 건 우릴테니까."


군용 물품을 개인이나 단체가 소지하는  불법이라 들키는 날엔 꽤나 귀찮아질 게 자명했다. 애초에 그가 일행에게도 숨긴 이유가 이런저런 귀찮은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였고. 물론 그 건에 대해선 카지트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쯤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고. 이번은 괜찮을 테니까.  사람보는 눈은 꽤 정확하다고."


카지트의 사람보는 눈이야 그간에 경험에 비춰보아  믿을만 했다. 이것저것 재보던 프로바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고양이를 말릴 사람이 한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속으로 한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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