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 구출
카지트의 프란시스카가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돌연변이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갰다. 제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돌연변이라 하더라도 머리, 그것도 뇌가 박살난다면 살 수 없었다. 일격에 절명한 돌연변이의 몸이 털썩 바닥에 널부러졌다. 카지트와 프로바움은 죽어버린 시체엔 관심조차 주지않고 다음 차례에게 시선을 돌렸다.
후웁, 짧게 내뿜는 기합과 강철주먹이 촉수달린 개 모양을 하고 있는 돌연변이에게 박혔다. 찰칵, 하는 기계장치 소리와 함께 리볼빙 챔버에 장전되어있던 12게이지 벅샷이 불을 뿜었다. 탄피 안에 잠들어있던 여러 개의 쇠구슬이 튀어나가며, 돌연변이를 걸레조각으로 만들었다.
내뻗은 주먹을 회수하며 프로바움은 전장의 화연을 만끽했다. 또다시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너클더스트에 달린 리볼빙 챔버가 회전했다. 한 발 더. 등 뒤에서 달려드는 뱀과 쥐를 섞어놓은 듯한 돌연변이에게 허리를 튕기며 주먹을 뻗었다. 체중을 회전력에 실어 가하는 타격은 소형 돌연변이 따위가 막을 정도가 아니었다. 거기에 다시 한 번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타앙!
폭음과 함께 이번에도 어김없이 돌연변이는 넝마조각으로 화化했다. 그 뒤에 숨어 달려오는 녀석에겐 다른 주먹에 낀 아파치 너클의 칼날을 펴서 가볍게 눈알을 찔렀다. 깨갱! 울부짖으며 몸을 뒤트는 놈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팼다. 하나 둘 셋. 단 세 방. 녀석을 침묵시키는 덴 세방이면 충분했다.
"끝이 없군."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드는 물량에 기가 질릴 것 같았다. 카지트 또한 동의하며 두 손에 쥔 냉병기들을 열심히 놀렸다. 어쩌다 이렇게 발목을 잡혔을까. 카지트는 혀를 찼다. 분명 좁은 굴을 기어나와 토굴로 다시 돌아온 것까진 좋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입구를 비롯한 상층엔 돌연변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많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한 마리 한 마리는 약해빠졌다. 가죽은 무르고 살은 부드러우며, 움직임이나 공격은 굼뜨다. 문제될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무지막지하게 많은 머릿수가 유일한 걸림돌이었다. 한 자릿수라면 충분히 감당할 만 하지만 두 자리수가 끊임없이 밀려오니, 제 아무리 싸움질엔 이골이 난 둘이라 할 지라도 조금 버거웠다. 그것뿐만 아니다. 카지트는 이 약해빠진 것들 너머, 어딘가에 숨어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진짜' 장애물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소형 중에서도 특히 작은 녀석들이 아닌, 좀 더 크고 강력한 진짜배기들. 그것들은 영악하게도 둘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보인다면 언제든지 달려들어 물어뜯으리라. 그 사실을 알고있기에 둘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진작에 도망쳤어야 했는데. 둘은 후회했다. 카지트의 감은 앞이 아닌 뒤로 가라고 말했지만, 둘은 따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 그러니까 유적의 입구는 그들의 앞 쪽이었기 때문이다. 감은 앞에 경고를 보냈다. 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경고. 경험으로 비춰볼 때 그 정도는 조금 고생하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경고.
완전히 오판이었다.
"이게 무슨 조금이야!"
카지트는 재주좋게 도끼 날과 봉 사이의 움푹 파인 부분을 사람 비스무리하게 생긴 돌연변이의 목에 걸었다. 그대로 당기며 아밍소드의 칼 끝으로 머리를 찌르자, 녀석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꿰뚫렸다. 즉사다. 그는 시체를 방패 삼아 앞으로 내던진 후 발로 밀었다. 그의 앞에서 우글거리여 모였있던 녀석들이 주르륵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탐욕스런 놈들은 시체에 이빨 한 번이라도 박기 위해 아웅다웅 서로 전투를 벌였다.
시체를 징검다리 삼아 밟고 앞으로 도약 한 후, 카지트는 떨어지는 그대로 체중을 실어 ㅅ자로 대각선베기를 했다. 숙련된 달인의 검과 도끼는 절묘한 힘과 기교로 전방의 서넛을 한꺼번에 베어냈다. 프로바움 또한 뒤에서 다가오는 몇 마리를 처치하곤 카지트의 뒤를 따랐다. 카지트가 징검다리 삼았던 놈들에게 무게를 싣고 발로 밟자, 녀석들의 뼈와 살이 으깨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살아있다 해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리라. 그는 역겨운 감촉에도 어떠한 감상도 없이 길잡이의 뒤에 붙었다.
길은 카지트가 뚫고 그의 등은 프로바움이 지킨다. 한 두 번 손을 맞춰본 게 아닌 듯, 둘의 연계는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알고있다는 반증이다.
둘은 아주 천천히, 몇 걸음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좁은 길이나 통로였다면 한 층 편했을 것이다. 앞과 뒤에서 오는 적만 막으면 되니까. 그러나 하필이면 그들이 있는 곳은 중형 파이프 정도의 크기인지라 적들은 사방에서 둘을 에워쌓고 있었다. 앞을 처리하면 옆에서 튀어나오고, 옆을 처리하면 다시 앞에서 튀어나온다. 무슨 반 년 동안 밀린 서류처리하는 기분이었다. 서류와 돌연변이의 차이점은 이 녀석들은 문다는 것 정도일까.
옆에서 짓쳐들어오는 공격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흘리고, 카지트는 아밍소드로 상대를 찔렀다. 그동안 텅 비어버린 앞을 프란시스카로 방어하며 그는 재빨리 아밍소드를 회수했다. 전, 좌, 후에서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공격에 정신이 없었다.
카지트의 뒤통수를 노리는 촉수. 카지트는 전방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느라 볼 수 없다. 프로바움은 재빨리 촉수를 잡아채고, 본체에 아파치 너클의 리볼버를 갈겼다. 총신이 없어 명중률이 극악이지만, 고작 수 십 센티미터에서 빚맞힐 정도는 아니다. 거기다 쓰는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총알은 깔끔하게 본체의 눈을 관통해 뇌에 박혔다.
"얼마나 남았나!"
프로바움은 큰 소리로 외쳤다. 카지트의 등에 바짝 붙어 뒤돌아있기 때문에 앞의 상황이 어떤지 볼 수도, 볼 여력도 없었다. 다가오려는 녀석들을 저지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카지트는 찔러들어오는 가시를 아밍소드로 튕겨내고 프란시스카로 돌연변이의 머리를 반으로 쪼갰다.
"몰라! 한 30분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적어도 그가 보기엔 그랬다. 전보다 느껴지는 바람의 세기가 강해졌지만 아직 유적의 입구는 보이지않았다. 거리상으론 그리 먼 거리는 아닐 터이다. 보통이었다면 10분 정도면 도착했겠지. 다만 지금 이 속도라면 30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젠장맞게 길군! 30분? 좀 더 줄일 수 없나?"
"이 빌어쳐먹을 놈들이 딴 데로 가서 탭댄스나 춘다면 말이지!"
으쌰! 외치는 기합과 함께 돌연변이 둘의 목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수 십이 남아 앞을 가로막았다. 카지트의 입에서 온갖 욕설이 난무했다. 이 젠장맞을 돌연변이들은 어디서 분열이라도 하고있는지 원체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않았다.
카지트가 열심히 길을 뚫는 사이, 프로바움 또한 착실히 그의 뒤를 방어했다. 너클더스트를 낀 그의 강철주먹은 일반 잽이라도 스트레이트와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묵직한 한 방 한 방이 확실하게 적들을 침묵 또는 무력화 시켰다. 조그만 녀석들의 공격이야 그의 금속피부를 뚫을 정도는 아니라, 가볍게 팔을 휘두르는 것 만으로 쉽게 떨쳐낼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맵시있던 정장은 전투가 계속 될 수록 헝겊 쪼가리가 되어가고있었다. 아마 정장에 입이 달려있다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죽..여..줘..
"으아! 빛이 보인다구!"
"드디어! 더럽게 오래걸렸군!"
반쯤 정신을 놓고 기계적으로 적들을 요격하던 둘은, 저 멀리 환히 빛나는 빛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나가기만 하면 나머진 발굴단의 호위들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그들의 무장으론 이런 녀석들이 몇 부대가 와도 막을 수 있을 정도니까. 고지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였다.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던 녀석들이 움직였다. 아마 이대로 놔두면 카지트와 프로바움이 그대로 탈출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숫자는 총 여섯. 종류나 생김새, 그리고 크기는 모두 제 각각이었다. 가장 작은 녀석은 카지트의 반만했고 가장 큰 녀석은 카지트보다 머리 둘 정돈 더 컸다.
여섯 마리의 돌연변이들이 추가로 앞을 막아버리자 둘은 완전히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무슨 희망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가면 나갈 수 있는데 그 앞을 막아버린단 말인가! 그나마 녀석들이 앞을 가로막았던 돌연변이들을 밟고 섰기 때문에 공세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화가나는 것이다. 꼭지가 돌아버린 카지트는 기다렸다는 듯 트리플 배럴 소드오프 샷건을 꺼내 전방에 쏴갈겼다.
"이 거지발싸개같은 놈들아!!"
카지트의 원한서린 외침과 함께 세 총구에서 날아간 슬러그탄 세 발이 전방의 방해물들을 두부처럼 관통했다. 그러나 벅샷보다 파괴력을 셀 지라도 그 범위는 협소하기 짝이없어, 그는 나머지 한 손으로 양 옆에서 파고드는 돌연변이들을 처리해야 했다.
덩치 큰 여섯마리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들과의 사이엔 돌연변이 두 라인 정도.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이다. 카지트는 녀석들과 마주하기 전에 어떻게든 샷건을 장전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고작 허리춤에 꽂고 다시 칼을 빼드는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는 빠르게 판단했다. 저 녀석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화력이 절실하다. 그러나 도저히 장전 할 여유가 나지 않거니, 개인화력에선 둘 째가라면 서러울 이가 그의 등 뒤에 있지않은가?
"영감, 교체 가능해?"
"가능하오."
"좋아, 셋 세면 교체하는 거요!"
자동인형의 대답에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페퍼박스라면 잘하면 녀석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프로바움은 신중히 그의 구령을 기다렸다. 교체란, 서로 동시에 무기를 크게 휘두르며 빠르게 위치를 바꾸는 기술을 말한다. 무기를 크게 휘두르는 동안은 잠깐이나마 적들이 다가올 수 없으니 그 사이에 재빨리 서로의 위치를 교체하는 것이다. 교체한 후엔 카지트가 뒤를 맡고 프로바움이 앞을 맡게 될 것이다.
"자 그럼, 셋!"
"이런 미친 놈이!"
하나와 둘은 어디갔는지, 카지트는 다짜고짜 셋을 외치며 자리를 바꾸려고 했다. 당연히 프로바움은 기함했다. 그래도 카지트와 함께했던 그간의 경험이 어디가는 것은 아니라, 둘은 무사히 자리를 바꿀 수 있었다.
"이 정신나간 놈! 하나 둘은 어디에 갖다버리고 셋부터 외치는 건가!"
분노의 주먹질로 길을 개척하고있는 프로바움의 말에 카지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영감이라면 알아먹을 거라고 믿었어. 봐봐, 성공했잖아? 우리 사이가 고작 그 정도일 리 없지."
"성공은 무슨. 내가 알아차리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을 거다."
교체에 실패한다면 재수없다면 손발이 꼬여 돌연변이들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었다. 혹은 멈춰 설 수도. 한 번 멈춰버리면 그 다음부턴 다시 움직이기 힘들다. 돌연변이들 또한 자리를 잡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남은 건 방어전 밖에 없다. 돌연변이들이 모조리 죽던지, 아니면 둘이 죽던지.
그래도 교체 중에 카지트가 꽤 많이 베어놓은 터라 불만은 거기에서 그쳤다. 상황을 보니 돌연변이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기자 순간적인 판단으로 그곳을 공략하며 교체를 외친 것 같았다. 하나 둘을 세고있었다면 그 틈이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프로바움은 슬슬 페퍼박스를 꺼낼 준비를 했다. 여섯 마리와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앞으로 조금. 서로 한 걸음 씩 내딛는다면 서로의 사정권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겐 안되지. 그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페퍼박스를 꺼내 총신을 돌렸다.
차르릉.
총열이 돌아가는 소리에 녀석들도 뭔가를 느낀 건지 한 껏 거드름 피우는 냥 느릿하던 움직임이 빨라졌다. 녀석들은 앞을 가로막은 돌연변이들은 온갖 손톱과 촉수와 앞발로 헤쳐놓고는 프로바움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달려들려고 했다.
단 한 걸음.
프로바움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녀석들이 한 걸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에겐 그 한 걸음이면 충분했다. 겨눠진 총구에 스스로 머릴 들이민 꼴이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빌어먹을 것들아."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찰나의 침묵. 그것은 곧 세상을 부술 듯한 굉음으로 바뀌어 동굴을 쓸어내렸다. 그에게 마악 입을 가져다대던 저급한 것들은 골을 흔드는 굉음에 놀라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탁월한 선택이다.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흩뿌려지듯 격발된 납덩어리들이 전방으로 산개했다. 굉음 바로 뒤이어 무언가 터지고 부서지는 괴음이 잇따랐다.
앞에서 얼쩡대던 잡것들과 여섯 마리 중 세 마리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조그마한 탄환은 그 큰 덩치로 버틸 수 없는 물리력을 품고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세 마리 또한 성치 않았다. 모두 한 군데씩 잃어버렸거나 덜렁거리는 게 중상을 입은 듯 했다.
이번엔 프로바움이 한 걸음 움직였다. 페퍼박스를 바닥에 버리고,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접근한 그는 남은 세 놈 중 하나의 옆구리에 주먹을 쑤셔박았다. 찰칵, 하는 기계음과 12게이지 벅샷이 옆구리에 박힌 주먹에서 뿜어져나왔다. 그러나 녀석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아직 살아있었다. 오히려 녀석의 악어처럼 생긴 머리는 한껏 입을 벌리고 프로바움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그대로 그의 얼굴을 깨물어 부술 셈이다.
프로바움은 재빨리 아파치 너클의 나이프를 세워, 그대로 녀석의 눈을 찔렀다. 눈을 관통해 뇌를 휘저은 덕분에 녀석은 즉사했다. 그는 그대로 녀석을 다가오는 두 마리에게 밀어버리곤 재빨리 너클더스트를 장전했다. 장전시간은 페퍼박스보다 훨씬 빨랐다.
주위의 돌연변이는 페퍼박스의 굉음에 겁먹는 건지 주춤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걔중에 몇몇은 아예 도망가버렸다. 이제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는 건 눈 앞의 두 마리 뿐. 그는 조심스럽게 녀석들을 경계했다. 둘 다 덩치나 외형을 보아하니 방금 전의 악어머리처럼 터프한 녀석일 것 같았다.
"영감, 스위치 가능해?"
목소리를 낮춘 채 물어보는 카지트의 질문에 프로바움은 작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카지트 쪽의 상황도 거의 끝나있었다. 페퍼박스의 폭음에 돌연변이들이 굳어버리자, 그 잠깐의 순간 대부분을 말 그대로 썰어버린 것이다. 뒤에 남은 돌연변이의 수는 아직 많았지만 전과 비교하면 그 숫자는 훨씬 줄어있었다. 게다가 남은 놈들도 굉음에 접근을 망설이고 있었다.
"셋에 교체하고, 이번엔 내가 세도록 하지."
"알았어."
카지트는 귀를 열어놓은 채 한 껏 온 몸을 긴장시켰다. 한계까지 하체에 힘을 준 덕분에 다리가 살짝 부풀어올라 보였다.
"셋!"
하나 둘을 생략한 프로바움의 외침에도 카지트는 예상했다는 듯 씨익 웃으며 자리를 교체했다. 아니, 그대로 달려나갔다. 목표는 남은 두 마리. 둘 모두 그보다 최소 머리 하나가 컸다. 녀석들 또한 손톱과 이빨을 내밀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집게가 달린 반쯤 썩은 오랑우탄과 손톱대신 벌침이 달린 머리가 두 개인 곰. 어느쪽이나 흉악하다. 집게에 잡히면 그대로 반동강 날 것이고 벌침엔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 스친다고 해도 위험하다.
카지트는 오랑우탄에게 달려들었다. 리치가 긴 팔과 집게는 분명 위험하지만 가까이 붙는다면 그만큼 취약 할 거란 판단이다. 그는 횡으로 휘둘러지는 집게팔을 보고 무릎을 가슴께에 잡아당기 듯 뛰어서 피했다. 그리고 바닥에 착지한 순간, 옆에서 찔러들어오는 곰의 손톱을 몸을 숙이고 물흐르듯 미끄러지며 피해냈다. 어느새 오랑우탄의 품 안. 그는 튕겨서듯 일어나며 그 반동을 이용해 아밍소드로 오랑우탄의 목을 찔렀다.
그르르륵!
숨구멍을 찔린 듯 녀석은 연신 피거품을 내뿜으며 긴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카지트는 이번엔 곰의 곁에 달라붙었다. 싸움을 유도할 작정이다. 그는 재빨리 주저앉아 횡으로 휘둘러지는 손톱을 피했다. 프란시스카로 텅 빈 옆구리를 찍어봤지만 가죽이 단단한지 잘 박히지 않았다.
눈이 시뻘개져 카지트를 노리던 오랑우탄은 같은 편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곰의 옆구리에 집게를 휘둘렀다. 본래는 카지트를 노린 공격이지만, 고양이과 특유의 민첩성과 유연성으로 피해버린 탓에 곰에게 명중했다. 그 파괴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곰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카지트는 아밍소드를 집어넣고 두 손으로 프란시스카를 잡은 후 공중에 뛰어올랐다.
목표는 곰의 두 머리 중 하나. 뛰어올라 모든 힘과 체중을 실은 도끼날엔 설령 곰의 두개골이 얼마나 두껍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카지트는 저 머리가 얼마나 단단하다 해도 깨부술 의지가 있었다. 이윽고 두 개가 충돌했다!
도끼와 머리.
승자는 도끼였다. 젖먹은 힘을 다한 수인의 공격, 거기에 모든 체중을 실었으니 그 파괴력이란 상당한 것이다. 곰에겐 아쉽게도 그 두개골은 카지트의 모든 것을 담은 공격에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진 않았다. 하나만 남은 머리가 울부짖었다.
오랑우탄이 또다시 집게를 휘둘렀다. 이번엔 집게로 잡아 부수겠다는 듯 활짝 벌려진 채 었다. 카지트는 집게를 하나만 남은 머리로 유도했다. 집게에 잡힌 머리. 곰은 방해하는 오랑우탄이 짜증난다는 듯 손톱을 찔러넣었다. 손톱의 예기는 상당한 수준이라서 마치 종이자르듯 오랑우탄의 배에 박혔다. 동시에 집게 사이에 낀 머리가 바이스에 우그러지듯 박살났다. 조금전까진 뜨거웠던 뇌수가 온도를 잃고 사방으로 튀었다.
오랑우탄은 그대로 선 채 부들부들 떨었다. 카지트의 예상대로 곰의 벌침엔 무언가 독이 발라져있었던 듯 하다. 그 기회를 놓칠 카지트가 아니다. 그는 이번엔 프란시스카를 집어넣고 아밍소드를 꺼냈다. 마치 뱀이 벽을 타듯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오랑우탄의 어깨 위에 선 그는 두 손으로 쥔 아밍소드를 역수로 잡고 그대로 오랑우탄의 눈알에 찍어내렸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동굴 안에 맴돌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돌연변이들 또한 그들보다 상위에 있는 돌연변이의 비명에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프로바움은 벽에 기대 카지트가 오랑우탄을 끝장내는 장면을 구경했다. 남은 것들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의 약점 중 하난 눈이라던가.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전투는 막을 내렸다. 카지트와 프로바움은 살아남았다. 비록 남은 탄환 수는 바닥을 기고 온몸엔 피칠갑이었지만 어디 하나 부러진 곳 없이 성했다. 수많은 돌연변이들과 그 상위 돌연변이 사이에서 살아남은 실력. 아마 누군가 봤다면 기겁할 것이다. 그리곤 골똘히 생각하겠지. 어느 쪽이 괴물인가에 대해.
"후우, 드디어 끝났네."
카지트는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폈다.
"이런 난장판도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프로바움 또한 불꺼진 파이프에 다시 불을 붙혔다.
그는 주먹을 내밀었다. 카지트는 잠깐 내밀어진 주먹을 보다가 피식 웃곤, 그의 주먹을 부딪혔다.
이제 진짜 나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