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 구출
어둠으로 가득 찬 통로를 둘은 정신없이 달렸다. 여전히 그들이 왔던 곳에선 쿠르릉, 하는 땅울림과 함께 지옥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그들이 있던 곳으로부터 층층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건물 자체가 붕괴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곳또한 안전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런 징조없었지만, 어느 순간에 휩쓸려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둘은 카지트의 오감과 감에 의지해 앞으로 내달렸다. 다행히도 새까만 통로는 일직선이었고 문이나 방 따위는 보이지않았기에, 둘은 망설임없이 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 시간을 내달렸다. 통로는 가끔씩 위로 올라가거나 옆으로 꺾이기도 했지만 갈림길이나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출구 따윈 보이지않았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내장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구불거리고 어두컴컴한, 강철의 내장.
그렇게 한나절을 달렸다. 체력에 자신있던 카지트는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헉헉대고 있었으며 입에선 단내가 풍겼다. 자동인형인 프로바움은 그나마 나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히 쌓인 상태였다. 둘은 사이 좋게 주저앉았다. 그 어두침침하고 오래된 통로 외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마치 미로에서 뱅뱅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젠장, 진짜 죽겠네."
바닥에 대자로 누운 카지트는 지친 목소리로 불평했다. 통로는 그의 키보다 아주 약간 더 높았으므로 그는 뛰는 내내 고개를 숙여야 했다. 프로바움또한 동의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둘의 감각만은 날카롭게 세워져있었다. 주위엔 딱히 위험한 게 없는 듯 했다. 아니, 그 이전에 살아있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위는 고요했다. 이 유적 돌연변이들의 우두머리 또한 쫓아오는 낌새는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둘은 무기를 점검했다. 이리저리 심하게 구르며 험악하게 굴린 탓에 여기저기 잔 상처가 나 있고 이가 빠진 곳이 있었으나, 못 써먹을 정도로 망가진 곳은 없었다. 다음은 탄약. 카지트의 경우 잔탄수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친 프로바움에겐 남은 탄환 수가 절망적이었다. 아마 앞으로 전투 한 번이면 바닥을 드러내리라.
자동인형은 이것저것 고민을 담아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였다. 오랜시간 수 많은 전장을 함께 헤쳐나온 파이프가 통로의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연기를 수놓았다.
"으으, 여기 진짜 춥네."
빠르게 무기 점검을 마친 카지트는 부르르 떨었다. 흔히 태양이라 부르는 인공조명이 없는 까닭에 통로는 어두컴컴할 뿐만 아니라 이가 떨릴 정도로 추웠다. 그들을 둘러싼 금속에선 한기가 올라오는 듯 했다. 그러나 카지트는 불을 피우지 않았다. 통로가 막혀있을까 염려한 탓이다. 혹시 통로가 막혀있다면 공기 또한 정체되어있을 것이다. 거기서 불을 피운다면 남은 공기마저 빠른 속도로 줄어들 게 뻔하다. 대신, 그는 입고있는 검은 레더아머를 꽉 조였다. 그는 두 무릎을 끌어앉고 프로바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영감. 어째서 유적 안으로 들어오기로 한 거야? 신중한 영감 성격이라면 좀 더 재볼 줄 알았는데."
어둠 속에서 얼굴을 향해 비치는 라이트의 불빛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눈을 찌푸렸다. 카지트가 라이트를 내리자 그제야 살겠다며 한숨을 쉬곤, 대답했다.
"나름대로 재보고 내린 판단이라네. 이 구성원이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 한 명 더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자네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뭐 그렇지. 길잡이, 그것도 선천적인 길잡이가 있으니 한 탕 제대로 해보겠구나 생각했었으니까. 그리고 도로스 같은 얘들은 키워주면 나중에 두고두고 도움이 되거든."
흥, 그러냐. 프로바움은 대충 대답하고선 다시 파이프를 피웠다. 습관을 너머 이미 일과가 되버린 터라 파이프를 피지않으면 뭔가 허전했다.
통로는 마치 방금 전까지의 전투가 꿈이었다는 것처럼 고요했다. 둘은 그들을 추격하던 괴물을 떠올렸다.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제대로 토사에 휘말린 듯 했다. 죽었을까? 그런 괴물이 죽는다는 게 상상이 되지않긴 했지만, 죽었을 확률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그 갑피. 총알조차 튕겨내는 뛰어난 갑피. 그것을 가져간다면 백만장자도 꿈꿔볼만 했다. 그런 갑피로 만든 옷이라면 부르는 게 값일 테니까.
그러나 둘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놈이 살아있다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이번만 해도 유적 안이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간신히 떼어놓지 않았던가. 파이프에서 그런 걸 만났다면 진작에 죽은 목숨이었다.
설령 그게 죽었다고 해도 그것 또한 문제다. 죽었다면 토사에 파묻혀 있을 텐데, 그것을 무슨 수로 꺼내겠는가? 둘에겐 인력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설사 꺼냈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총알도 손쉽게 튕겨내는데 칼이라고 듣을 리 없다. 결국 가죽을 얻을 방법 따윈 현재로썬 전무한 것이다.
눈 앞에 거금이 있건만 놓치는 것만 벌써 두 번째. 오랜 경험에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 알고 있는 둘이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눈 앞에서 큰 돈을 놓쳤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둘은 다시 일어나 걸었다. 이번엔 뛰지 않았다. 한나절이나 뛰었음에도 통로는 이상이 없었으므로 건물 전체가 무너진 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돌연변이와 싸웠던 층 아래는 대부분 무너졌으리라.
둘은 하루종일 걷고 걸었다. 700년의 어둠과 침묵의 배일에 감싸인 통로는 마치 별세계로 향하는 듯 끝없이 이어졌다. 시간관념이 무너졌다. 프로바움의 회중시계만이 유일하게 시간을 말해주는 도구였다. 둘은 천천히 지쳐갔다. 하루, 그리고 이틀. 이틀 동안 어두운 통로를 걷기만 하자, 여러 생각마저 천천히 바스라졌다. 정신적으로 천천히 메말라가는 느낌. 간간히 방향이 바뀔 때마다 둘은 그들이 아직 통로를 걷고있음을 상기했다.
"미치겠군."
끝나지 않는 영원한 미로에 카지트는 지친 어조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무릎이 다 쑤셨다. 정신력이 강한 둘조차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카지트는 다시 한 번 감을 체크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같았다. 맞는 길. 제대로 가고있는 걸까 의심스러운 이 길이 맞는 길이라니.
혹시라도 자신의 감이 틀린 건 아닐까 생각하며 카지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천전인 감은 도로스의 그것만큼 정확하지 않다. 가끔 맞지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번이 그 때 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천만다행히 카지트의 걱정은 기우로 끝이 났다. 통로의 끝을 고하듯 강철 문 하나가 떡하니 나타났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돌연변이들이 득시글한 유적 안잉 아니었다면 그는 큰 소리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 동안 말없이 파이프 담배만 뻑뻑 피워대던 프로바움도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아, 또냐."
카지트는 문을 당겼다. 이번에도 잠겨있었다. 그는 물흐르는 듯한 손길로 트리플배럴 샷건을 꺼내 손잡이에 갈겼다. 좁은 공간에서 총을 쏴서 총성 때문에 머리가 울렸다. 망가진 손잡이를 당기자 이번엔 문이 열렸다. 끼이익, 녹슨 쇠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퍼졌다.
지독한 썩은 내가 풍겼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모아 폐수에서 숙성시킨다면 이런 냄새가 날까. 후각이 둔한 자동인형마저 코를 쥐고 한 걸음 물러날 정도. 뼈를 깎는 혹독한 수련으로 다져진 카지트라도 이 냄새느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 뛰어난 후각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후각을 칼로 쑤시는 듯한 악취에 그는 반쯤 넉다운되어 흐물거렸다.
"카지트, 괜찮은가? 쯧, 이거라도 쓰게. 없는 것 보단 낫겠지."
보다못한 프로바움이 손수건을 물에 약간 적셔 그에게 건넸다. 방독면을 가지고 올 걸. 도로스의 방독면이 눈 앞에 아른 거렸다. 후각이 어느정도 불쾌한 공기에 적응이 되자,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돌연변이의 둥지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듯 온갖 역겨운 것들로 뒤범벅이었다. 뭔지 모를 것의 뼈부터 배설물까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미친. 살다살다 내가 돌연변이 둥지까지 들어와보네."
"동감일세. 이런 난장판은 또 처음이군."
원래는 누군가 쓰던 방이었을 공간은 벽에서 터져나온 흙에 침식당한 채 죽어있었다. 온갖 이물질과 흙에 뒤덮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벽이 무너진 듯, 그곳에서 밀려들어온 토사엔 기어갈 수 있는 공간이 뚫려있었다. 크기가 작은 돌연변이의 둥지 인 것 같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카지트는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데. 아무래도 크기가 작은 녀석이 살던 것 같아. 숫자는..잘 모르겠지만 대충 두 셋 정도 되려나? 저기 흙에 구멍난 곳을 보면 기어다니는 녀석이겠지. 상대하긴 별로 어렵지 않겠어."
"아무래도 우리가 꽤 높이 올라온 것 같군. 이 구멍으로 기어가면 유적 입구 쪽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프로바움은 팔짱을 끼곤 카지트 쪽을 바라봤다. 악취에 코를 막은 터라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음, 그럴 것 같긴 하네. 아래쪽엔 아무래도 그 우두머리랑 밀폐된 공간 때문인지 한 마리도 없었으니까. 어쨌든 일단 움직이자고. 으으, 냄새 때문에 죽을 거 같아."
둘은 망설임없이 구멍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길이라곤 그곳 밖에 없었고, 이런 냄새나는 공간엔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지트의 감 또한 이곳으로 나가면 될 것 같다고 외치고 있었기에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다.
카지트가 먼저, 그리고 그 뒤를 프로바움이 따라 기어갔다. 포복 전진해야하는 이런 좁은 공간에선 부피가 작은 소드오프 샷건이나 리볼버 같은 무기가 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운이 따랐던 건지 큰 토굴에 다다를 때까지 둘은 어떤 돌연변이 조차 만나지않았다.
"어휴, 이제야 좀 살겠다."
카지트는 거칠게 코를 문질렀다. 악취에 마비되다 못해 죽어가던 후각은 퀘퀘한 흙냄새에 그나마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
한참 코를 마사지하던 카지트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한 줄기 바람, 그리고 그나마 덜 퀘퀘한 바깥의 냄새. 그는 한줄기 미소를 되찾았다. 드디어 바깥의 공기를 다시 맡을 수 있는 것이다. 도시의 찬란한 불빛과 떠들썩한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술이 땡겼다.
"영감, 잭팟이야."
웃음기띈 목소리에 프로바움 또한 한 껏 고무된 얼굴로 물었다.
"확실한가?"
카지트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오감은 절대 그에게 거짓말 하지않았다. 카지트는 앞장 섰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이 약간 걱정되었으나 둘은 잘 헤쳐나가리라 믿었다. 특히 도로스는 그보다 더 뛰어난 길잡이니까.
드디어 유적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