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 구출
계단을 올라와 카지트와 프로바움이 마주한 건 드넓은 공간이었다. 전의 광장을 방불케 하는 넓이에, 있는 거라곤 이곳저곳에 박힌 굵은 기둥들 뿐. 덩치 큰 우두머리가 활동하기 편할 정도로 넓고, 숨을 곳이 그리 많지 않은 곳. 싸움엔 그다지 적합하지않은 장소였다.
"미치겠군."
프로바움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곳에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그래도 체구나 장갑이 상대 쪽이 월등한데 지형마저 상대에게 유리하다면 필패나 마찬가지였다. 둘은 빠른 속도로 가장 가까운 기둥 뒤에 숨었다. 녀석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조용히 기다렸다. 녀석이 올라올 때, 둘은 가진 최고의 화력을 쏟아부었다. 화약식 샷건과 페퍼박스. 귀를 때리는 소음과 함께 납탄환이 녀석의 갑피를 미친듯이 때렸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녀석은 페퍼박스의 위력에 잠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났으나, 그 뿐이었다. 오히려 한 차례 사격을 퍼부은 덕분에 둘의 위치를 파악한 괴물은 빠른 속도로 기둥으로 다가와 낫을 휘둘렀다.
"으앗!"
카지트가 기겁하며 물러나자, 기둥은 순식간에 조각조각 쪼개졌다. 피어오르는 먼지를 틈타, 둘은 숨어있던 기둥에서 나와 각각 다른 기둥으로 숨었다. 녀석에게 의미없는 견제를 날리며 카지트는 외쳤다.
"어이, 영감! 뭔가 좋은 수라도 있어? 이대로 가다간 끝장인데!"
프로바움은 고민했다. 무언가 쓸 만한 수가 없을까? 무기는 통하지않는다. 경험에 물어볼 것도 없이 튕겨나가거나 얕게 박히는 총알만 봐도 그들이 가진 무기론 상대할 수 없다는 건 명확했다. 그렇다면 다른 수는? 자동인형은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따라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
돌연변이는 소리는 들리는데 모습이 보이지않자 광분하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닫힌 공간이라 그런지 소리가 반사되어 울렸다. 덕분에 둘이 숨어있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그의 눈길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닿았다. 짧은 번뜩임. 무언가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반짝였다. 가능할까? 가능성은 있다. 다만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카지트 자네, 출구는 알겠나?"
들어온 곳은 이미 통로가 무너져 막혔다.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만약 일이 그의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통로없이는 시도도 해볼 수 없었다. 출구가 없다면 모두 사이좋게 죽을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카지트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대답했다.
"출구라면 대강 알겠어! 여기서 좀 멀어! 기둥 맨 끝에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대답에 자동인형은 만족스럽다는 듯 삐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방 안의 기둥은 2열로 쭉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출구는 그들이 올라온 계단의 정 반대편. 즉, 기둥을 따라간다면 출구가 보일 터였다.
"충분하군. 지금부터 뭘 할 건지 설명하겠네."
프로바움의 설명은 들은 카지트는 경악했다. 성공하면 무사히 둘만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다같이 유적 속에 파묻혀 짝짝꿍이나 하게 될 터였다.
"자네의 감은 어떤가?"
카지트는 조용히 감에 집중했다. 도로스만큼 선명하고 명확하진 않지만, 경험으로 쌓아올린 감은 이 정도라면 해볼만 하다고 그에게 고했다. 진짜냐. 이런 건 별로 안좋아하는데.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외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작전을 위해선 녀석의 주위를 완전히 이쪽으로 끌어와야한다. 둘은 눈짓을 주고 받은 후, 천천히 무기를 들었다. 서로 오랜시간 동안 합을 맞춰온 터라 눈빛만 보고도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프로바움은 그가 숨어있는 기둥에서 상체를 내밀고, 화약냄새 나는 대화로 녀석을 도발했다.
건물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폭음. 온 몸에 틀어박히는 강렬한 탄환에 녀석을 주춤거렸다. 돌연변이의 고개가 프로바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르렁, 낮게 울리는 분노. 방금 전의 대화로 녀석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것 같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였다. 톱니바퀴와 기계장치로 가득찬 몸 안에 연기가 핏줄처럼 흘렀다.
놈은 달렸다. 뱀이 미끄러지는 듯이 움직인다. 소리는 아주 약간의 부스럭거림 밖에 나지 않았다. 카지트와 프로바움은 녀석이 돌진하는 것을 보고, 진작에 다른 기둥을 향해 달렸다. 콰앙!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 기둥을 몸으로 들이받으며 손에 달린 두 낫으로 기둥을 채 썰듯 썰어버렸다. 그 기세에 둘은 질려버린 표정을 지었다.
"기둥이 없어지면 천장이 무너지는 게 확실해? 안무너지면 숨을 데도 없다고!"
전력질주를 하며 카지트가 외쳤다. 쩌렁쩌렁한 고함에 녀석의 시선이 카지트에게 박혔다. 프로바움 또한 마주 고함을 질렀다.
"내가 그걸 어찌 아나! 그걸 알면 용병이 아니라 건축가를 하고 있었을 걸세!"
크에에엑!!
녀석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무사히 기둥 뒤로 숨은 둘은 숨을 가다듬으며 타이밍을 쟀다. 둘이 기둥 뒤로 숨은 것을 똑똑히 본 돌연변이는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양 옆으로 뉘인 낫을 보면 두 기둥의 사이를 지나가는 순간, 횡베기로 양쪽 기둥을 일격에 박살내려는 듯 했다.
둘은 다시 다른 기둥을 향해 뛰었다. 녀석은 두 기둥을 푸딩처럼 손쉽게 쪼갠 후, 그 기세 그대로 둘에게 달려들었다. 막 달리기 시작한 둘보다, 가속도가 붙은 녀석 쪽이 더 빨랐다. 이건 위험하다. 두 베테랑 용병들은 입술을 질끈 물고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머리 위로 날카로운 예기가 스쳐지나 갔다. 슬쩍 스쳐지나간 것 만으로 휘날리는 털에 카지트는 등골이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저런 날카로운 칼날이라면 막을 수도 없었다. 저 예기와 덩치라면 막는 그대로 쪼개버릴 게 분명했으니까!
녀석은 커다란 몸을 멈추려고 노력했으나 가속도가 붙은 몸은 그리 쉽게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괴물은 프로바움과 카지트를 지나쳐, 그 뒤의 기둥이 부딪힌 후에서 속도를 죽일 수 있었다. 이런, 망했군. 자동인형이 씹어먹듯 내뱉었다. 돌연변이가 멀쩡한 기둥과 출구가 있는 쪽을 가로막듯 서 있으니, 지나갈 수 없었다. 둘의 뒤엔 부서진 기둥들이 즐비했다. 둘은 근처의 기둥파편으로 몸을 숨겼다. 그나마 다행히 녀석이 기둥을 완전히 박살내지 않은 덕분에, 몸을 감출 수 있을만한 파편이 몇 개인가 있었다.
"쟤가 많이 화났나 본데? 영감, 위에서 저놈 엄마라도 죽인 거 아냐?"
이런 상황 속에서 조차 카지트는 농담을 했다. 혼자 킬킬대는 그를, 프로바움은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이 농담할 상황인가?"
"에이, 상황이 이리 됐으니 분위기 전환이라도 해보자는 거지 뭐."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의 눈엔 긴장이 가득했다. 프로바움 또한 그걸 알기에 잠자코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천천히 거체를 일으켰다. 주위를 훑는 노란 눈엔 여전히 질척한 분노와 고기에 대한 탐욕만이
가득했다.
"미치겠네. 저걸 어떻게 지나가지?"
카지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길목을 막은 채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 녀석은 골칫덩이었다. 속도 자체는 그들보다 약간 느렸으나 그 크기 때문에 리치는 월등히 길었다. 이대로 달려갔다간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낫에 베일 게 뻔히 보였다.
프로바움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는 곧 주먹만한 무언가를 꺼냈는데, 그것을 보는 눈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그는 말없이 카지트에게 손에 쥔 것을 넘겨주었다. 맙소사! 카지트는 하마터면 큰 소릴 낼 뻔 했다. 상황을 떠나서 프로바움이 건네준 건 그리우면서도 보는 것만으로 미칠듯이 짜증이 몰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에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손 안에 쥔 것을 바라봤다. 섬광수류탄. 기본적인 파편수류탄을 제외한 모든 수류탄은 모두 군용으로, 군을 제외한 개인이나 단체가 군용 장비를 소지하는 건 불법이었다. 물론 둘은 그런 사실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사람용으로 만든 걸 텐데. 돌연변이한테도 먹히나?"
"나도 모르지."
"영감은 아는게 대체 뭐요?"
"네 얼굴 걷어차는 법 정돈 알지."
프로바움은 히죽 웃었다. 본전도 건지지 못한 카지트는 울상을 지었다. 둘이 사이좋게 농담따먹기나 하고 있을 때, 녀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사방으로 산성침을 흩뿌렸다. 사방에 무언가 녹아내리는 소리와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이러다가 옴짝달싹 하지도 못하고 녹아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서로 떠들 때가 아니군."
이게 제대로 먹혀야 할 텐데. 그는 간절한 기도를 담아 섬광탄에 입을 맞추었다. 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시여, 이 수류탄에 축복을 내리사 적의 눈을 산산조각 내기를. 짧은 기도가 이어졌다. 수많은 전쟁에서 아군 적군 상관없이 엿을 먹였던 섬광탄은 이내 둘도 아니고 넷도 아닌, 정확히 셋을 센 이후 던져졌다. 그리고 카지트와 프로바움은 눈을 꽉 감고 봐뒀던 기둥 쪽으로 전력으로 달렸다.
그들이 던져진 수류탄을 지나치고 돌연변이가 그들을 보고 달려들 준비를 할 때, 섬광이 공간을 찢었다. 마치 거대한 태양이 차오르는 듯 했다. 등 뒤에서 터졌음에도 빛이 뒤통수를 뚫고 눈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어질어질 했다. 눈을 감고있던 덕분에 그 정도는 덜했으나 여전히 강력했다. 고작 몇초. 빛은 사그러들었다. 둘은 귀에서 삐- 울리는 이명을 들었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달렸다. 빛이 사라지자 바로 눈을 떳지만, 시야가 좀먹은 것처럼 이상했다. 프로바움은 녹아내린 구덩이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끄에에에에!!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 어떤 비명보다 감미롭고 처절하면서 동시에 소름끼쳤다. 다행이 섬광수류탄은 괴물에게도 유효했다. 눈에 총알을 박아넣는 듯한 고통과 순식간에 사라진 시력에 당황한 듯 녀석은 난동을 피웠다. 낫과 산성액이 온 사방 천지를 베고 녹였다. 우르릉.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둘은 기둥 여러 개를 너머 거의 마지막 기둥에 도달하고 있었다.
난동부리는 녀석이 사방으로 휘젓고 다닌 덕분인지 기둥이 무너진 곳부터 천천히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시작된 붕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무너진 천장과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토사는 바닥을 채우다 못해, 도미노처럼 바닥마저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괴물 또한 꺼져가는 바닥과 물처럼 흐르는 토사를 느꼈는지 당황하며 기둥 덕분에 아직 무너지지않은 곳, 즉 카지트와 프로바움이 있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어? 잠깐, 저게 왜 이쪽으로와!"
출구에 거의 근접한 카지트는 꽥 비명을 질렀다. 앞도 보이지않는 녀석이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통에 기둥이고 뭐고 남아나지 않았다. 온전히 천장의 무게를 버티고 있던 기둥들이 몸통박치기에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터지기 시작한 풍선처럼 파국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기둥이 무너짐과 동시에 천장또한 더 이상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둘은 출구로 향하는 문에 달라붙었다. 카지트가 고개를 살짝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문은 잠겨있는 건지 아니면 700년의 세월에 녹슬어버린 건지 손잡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은 철제라 유리처럼 부수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범람하는 흙의 바다와 그 앞에서 길을 이끌고 있는 유적의 우두머리가 바로 코 앞까지 치고 들어왔다.
"젠장! 문이 안열려!"
도로스만큼 세밀하고 정확하지 않은 카지트의 감 또한 이번만큼은 빗나가지 않는다는 듯 맹렬하게 울렸다. 수 십초. 그 안에 열지 못하면 그대로 사망할 게 분명했다. 돌연변이에게 죽든 아니면 흙더미에 압사하든지 간에.
"카지트, 비키게!"
프로바움은 거칠게 카지트를 밀치고 다짜고짜 페퍼박스를 손잡이에 겨누고 총신을 돌렸다. 차르릉 돌아가는 총신.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과 화약의 불꽃이 춤췄다. 매캐한 연기가 문을 두들겼다. 페퍼박스의 거친 노크에 문은 그 모습을 잃고 나뒹굴었다.
좁은 통로. 둘은 아무런 의심이고 뭐고 할 새 없이 그 안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직후, 말소리를 쫓아온 돌연변이가 그 입구를 막았다. 그 거체는 통로 안에 들어가기엔 너무나 컸다. 그리고 그 뒤를 산사태처럼 밀려든 토사의 물결이 뒤덮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돌연변이는 처량하게 울었다. 그러나 이미 저 통로너머로 사라진 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