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 구출
풀풀 날리는 먼지에 카지트는 홰치듯 사방으로 손을 휘둘렀다. 행동거지완 다르게 깔끔떠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열심히 먼지가 몸에 닿지않게 애쓰던 그는 프로바움의 재촉에 마지못해 무너진 천장 파편 위에서 내려왔다.
양 팔을 벌리며 오랜만에 보는 두 동료를 환영하려던 그는 도로스의 맨 얼굴을 보고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의 입에서 기계장치의 신의 이름이 터져나왔다.
"데우스시여! 영감, 도로스 좀 봐! 얼마나 고생했으면 머리 윗부분 빼고 탈모가 왔어."
그 말에 도로스의 기분이 팍 상했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기껏하는 말이 저거라니. 역시 카지트는 카지트였다. 도로스는 왠지모를 익숙한 기분을 느끼며 불퉁하게 대답했다.
"전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요."
"태어날 때부터 탈모라니."
끔찍하단 듯 카지트가 몸서리를 쳤다. 불쌍하다는 동정어린 눈빛에 도로스는 손에 든 리볼버로 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때마침 닥터 윌슨이 타이밍좋게 끼어들지 않았다면 카지트는 머리가 좀 시원해졌으리라.
"인,간은 원,래 그렇다는 것 같,습니다."
"으음, 진짠가! 인간이라..."
도로스는 그의 눈길에 찔금해 눈을 피했다. 지금까지 그를 속였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낼까? 아님 욕심을 낼까? 인간은 희귀하다 못해 부르는 게 값이라는 것 같으니 후자일 수도 있다. 어느쪽이든 싫은데. 그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도로스의 외모를 둘러보던 그는 이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단 평범하게 생겼는데? 팔다리가 네 개에 근육질일 줄 알았는데."
동심이 깨어진 것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는 우울하게 말했다. 말은 그래도 그다지 놀라지않은 것 같아 도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는 눈은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나마 이런 반응이라도 보여주는 카지트완 달리, 프로바움은 반가워하는 눈빛으로 조용히 파이프담배를 피웠다. 도로스의 정체에도 그다지 놀라지않은 듯 했다.
"그런데 프로바움은 제가 인간이라는 거에 별로 놀란 것 같지 않네요?"
"뭘, 이 나이쯤되면 사소한 일에 쉬이 놀라지 않게 된다오. 그리고 인간을 본 적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오. 자네같은 경우는 처음봤지만."
"예? 저같은 경우요?"
"그렇소. 내가 본 이들은 어디 한 군데 수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소. 가령 귀라던가."
도로스는 감옥에서 첫날 말릭이 '불량품' 운운했던 것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땐 다른 수인들을 얕잡아 지칭하는 줄 알았는데, 혹시 그게 프로바움이 봤다는 인간들은 아닐까?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다만 프로바움의 설명으로 볼 때, 그처럼 수인의 특징이 없는 인간은 더욱 희귀한 듯 했다.
"나중에 악수나 해달라고. 인간이랑 악수하면 행운이 온다면서?"
끼어든 카지트의 말에 그건 전부 거짓말이라는 닥터 윌슨의 부연설명이 이어지자, 카지트는 그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의 지식에 압도된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설명에, 참다못한 자동인형이 끼어들었다.
"뭐, 그건 그렇고. 자네가 보낸 두 메세지는 잘 받았네. 덕분에 헤멜 일 없이 올 수 있었지."
그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닥터 윌슨이 부끄러운 듯 손을 꼼지락 댔다.
"예? '두' 메세지요?"
도로스는 의아한 얼굴로 닥터 윌슨을 바라봤다. 분명 삽 아래에 놓은 메세지는 하나 아니었나? 그 메세지 이외에 다른 메세지를 두는 걸 그는 보지 못했다.
"예. 하난 삽 아래에, 그리,고 두 번째는 중간,에 넘어졌,을 때입니다."
넘어졌을 때라. 도로스는 기억을 더듬어서 플라잉 몽키즈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중간에 닥터 윌슨이 넘어졌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찢어서 바닥에 버린 소매 또한. 어라? 잠깐. 설마, 그 때 소매 안쪽을 만지면서 꼼지락 대던 것이 메세지를 쓰던 것이었나? 도로스의 의문에 닥터 윌슨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역시 닥터 윌슨."
괜히 일행 최고의 두뇌가 아니었다. 그렇게 잡힌 상황 속에서도 동료들에게 힌트를 남기려 하다니! 도로스의 감탄 어린 시선에 귀뚜라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허둥지둥 댔다.
"흠흠, 아무,튼. 빨리 도망가,도록 합,시다. 큰 소란을 피웠,으니 지원이 올 겁니,다."
"잠깐만 기다리게. 이 녀석은?"
프로바움은 천장에 깔려 정신을 잃은 고양이를 가리켰다. 단정했던 수트는 넝마조각이 되었고, 날카로운 예기를 자랑하던 레이피어도 동강이 나 더 이상 못써먹을 것 같았다.
"총괄관리인이라고 하던데요?"
"그거 잘 됐군."
프로바움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말릭의 품을 뒤져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갇힌 사람들을 전부 풀어줄 속셈이었다.
"증인은 많을 수록 좋고, 목소리는 다양할 수록 좋네. 이 모든 사람들이 증인이니, 녀석들도 당분간은 경거망동하지 못할 걸세."
그리고 빠져나가기 위해서 미끼는 많을 수록 좋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영리한 동료들은 그 속뜻을 알아챘다.
이렇게나 많은 증인들이 있으니 은폐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뒷경매'의 실체와 플라잉 몽키즈를 고발한다면, 녀석들은 공공장소에선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터. 함부로 날뛰었다간 그게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 그리고 법정공방이나 대중에 대한 이미지 등 신경써야 할 꺼리가 늘어나니, 도로스들에 대한 신경도 어느정도 분산시킬 수 있고.
일행은 재빨리 모든 감옥문을 열었다. 처음엔 불신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이들도 한 명씩 자유롭게 풀려나기 시작하니, 감옥 안은 서로 먼저 풀어달라는 소리로 가득찼다. 이윽고 모든 감옥문을 열자, 모두가 감격에 겨워하며 앞다퉈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 우리도 빨리 가자고."
넷은 인파에 섞에 재빨리 밖으로 향했다.
바깥은 마치 거대한 미로를 연상시켰다. 위로 높기보단 옆으로 퍼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들이 있던 곳은 제일 큰 건물 옆에서 좀 떨어진 작은 건물이었는데, 넓은 부지에서도 한 외진 구석에 따로 박혀있는 곳이었다. 본관과 묘하게 떨어져있고 본관 뒷편에 절묘하게 숨겨져있어, 어지간히선 눈치채기 힘든 위치였다.
"여긴 대체 뭐죠?"
"보는 그대로 미술관일세."
여기저기 둘러보던 도로스는 지리적 이점을 깨닫고 가볍게 감탄사를 토했다. 용케도 이런 곳을 발견한 듯 싶었다. 갇혀있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바글바글 퍼졌다. 프로바움은 품 안에서 가면을 꺼냈다. 화려한 큐빅이 알알이 박힌 검은 가면은 가면 무도회에서나 어울릴 법했다. 프로바움은 가면을 도로스에게 건냈다.
"그런데 왜 미술관이 경매같은 걸.."
"뭐 뻔하지. 경비는 플라잉 몽키즈가 해주지, 부지는 넓고 숨길 곳은 많지, 낮에는 열고 밤에는 문닫으니까 밤에 열어도 눈치 못채지. 나쁜 놈들은 의외로 뻔하다구."
왠지 그럴싸하게 들리는 카지트의 설명에 도로스가 멍하니 끄덕이고 있자, 프로바움은 주머니에서 가면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일단 이거라도 쓰고있게나. 오는 길에 사왔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은 바탕에 조그마한 큐빅들이 알알히 박혀있었다. 이마부분엔 금테와 깃털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가면무도회같은 곳에서도 눈에 튈 정도로 쓸데없이 휘황찬란했다.
미적감각은 오는 길에 버린 듯한 가면은, 쓰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튀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튀는 가면이라니. 도로스는 좌절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방독면이 그리웠다. 빌어먹을 원숭이놈들! 그는 가면을 쓴 모습에 카지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한쪽에 삐익, 하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미술관을 경비하던 플라잉 몽키즈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행은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으리라. 그리고 포위망을 만들겠지. 포위망에 잡히면 꽤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아니, 단순히 곤란해지기만 하진 않겠지.
달리면서, 도로스는 궁금증을 풀어놓았다.
"카지트, 근데 어떻게 우리가 거기 있다는 걸 안 겁니까?"
"음, 사실 확신은 못했어. 나쁜놈들이 으레 그렇듯 대충 여기쯤 숨겨놨겠지 했는데. 근데 갑자기 세 녀석이 달려가지 뭐야? 딱봐도 아, 이놈들 따라가면 되겠구나, 그래서 따라갔지. 그리고 좀 있으니까 총소리까지 나더라고?"
그는 씨익 웃었다. 프로바움이 덧붙였다. 이곳에서 플라잉 몽키즈와 경비계약을 맺은 큰 건물은 이곳밖에 없었소. 꽤나 정확한 이유였다.
"미술관에서 총소리? 행위요술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뻔하지. 거기에 녀석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게 있다는 거야. 예를 들면 노예라던가."
"행위요술이 아니라 행위예술일세."
프로바움의 지적에 카지트는 입을 다물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럼 천장을 부순 건요? 마침 그 위치에 그 총괄관리인이라는 수인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가 그 위치에 있는지 알았어요?"
"어...그랬어?"
카지트는 당황했다. 건물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건물 위에 있던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냥 감으로 때려맞춘 것일 뿐.
"그냥, 총알이 틱틱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길래, 거기에 뭐가 있겠거니 하고 터뜨린 건데."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말을 잃었다. 덕분에 닥터 윌슨이 아니었다면 말릭과 사이좋게 이불 대신 천장을 덮고 잠들 뻔했다. 말없이 응시하는 두 쌍의 눈 빛에 그는 당황해서 부연설명했다.
"그 뭐냐, 너한텐 감이 있으니까 알아서 피하겠거니 했지. 내 감도 대충 이쯤에 쏘면 될 것 같다고..."
목소리가 갈 수록 줄어들었다. 그 또한 그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행동을 저질렀는지 알기 때문이리라. 둘은 카지트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도로스는 무의식적으로 경고사격을 날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않았다면 어떤 꼴이 됐을진...
"엇! 너는!"
익숙하면서도 짜증나는, 그런 목소리가 도로스의 귀를 때렸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원숭이 계통 수인들 한 무더기가 보였다. 갑작스런 소란에 묵고 있던 플라잉 몽키즈들이 뛰쳐나온 듯 했다. 걔중엔 눈에 익은 놈들이 보였다. 멕도너와 그의 부하들. 도로스는 가면을 쓰고 있으니 그들은 닥터 윌슨을 알아보고 눈에 불을 켰다.
도로스는 그 중, 그의 방독면을 가지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래, 그러고보니 저놈들이 있었지! 닥터 윌슨 또한 싸울기세 만만으로 녀석들을 노려봤다. 도로스 못지않게 그도 쌓인 게 많았으리라. 거기에 여러 연구결과가 담긴 수첩과 기껏 모은 유물들 마저 빼앗겼으니.
싸울까? 하지만 그 안에 포위망이 구성된다면? 마음같아선 한 바탕 녀석들을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기도. 무기에 생각이 미치자, 도로스는 아차했다. 그의 손때묻은 보우건도 놈들이 압수한 까닭이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끝까지 걸리적거리는 녀석들에게 도로스는 이를 갈았다.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이! 감히 도망치려고 해!"
멕도너가 고함을 질렀다. 중후한 음성이 대리석 바닥에 웅웅 울렸다. 쓸데없이 큰 목청에 카지트는 귀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쪽은 싸우고 싶은 것 같은데, 시간이 될까요?"
"음..애매하네. 혹시 몰라 치안대를 불렀네만, 그들이 제 시간 안에 와줄지 모르겠군."
도로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프로바움을 쳐다봤다. 치안대라고? 그들은 플라잉 몽키즈와 같은 편이 아닐까? 그의 표정을 읽고, 자동인형은 쓴웃음을 파이프연기에 담아 뱉었다.
"플라잉 몽키즈는 어디까지나 용병집단일세. 그런 주제에 덩치만 커서 도시를 좌지우지 할 힘까지 있지. 도시의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는 치안대 입장에선 오히려 치워버리고 싶은 상대라네."
아..하긴 플라잉 몽키즈 성향이 좀..그렇지. 몰랐던 사실에 신기해 하며 재차 물었다.
"그럼, 싸울까요?"
"얌마, 못본 새에 많이 거칠어 졌다? 왜, 저 녀석들한테 많이 당했냐?"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그동안의 수모를 곱씹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주 많,은 빚을 졌습,니다."
씹어먹을 듯 말하는 살벌한 귀뚜라미의 모습에 카지트는 떫떠름한 얼굴을 했다. 평소 순하던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더니만, 그게 딱 이 소리였다. 그가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저 녀석들을 사로잡는다면 인체실험이라도 불사할 것 같았다.
"..닥터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진짜 장난 아니었나 본데."
프로바움은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멀리서 치안유지대의 항복권유가 메아리 치듯 들려왔다.
"좋소. 싸우도록 합세. 어차피 탈출한 사람들 중 한 둘은 치안대와 만나겠지. 그들이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 줄거요. 우린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해치우고 떠나면 될 거라네. 치안대를 만나도 골치아플 테니까. 나머진 치안대에 맡겨두시오. 그런데...무기는 있소?"
도로스는 세 발 남은 리볼버를, 닥터 윌슨은 해쳇을 들어보였다. 맙소사, 프로바움이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건 완전히 맨손으로 중형 돌연변이에게 덤벼드는 꼴이었다. 프로바움은 먼 눈으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멕도너 일당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의 공허한 마음을 대변하듯 파이프가 힘없이 연기를 내뱉었다.
상대는 여덟, 이쪽은 넷. 그중에 둘은 무기조차 변변찮았다. 전부 근거리와 중거리 무기로 무장한 상대에 비해 빈약하다 못해 압살 당할 정도였다. 카지트 또한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둘을 쳐다봤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달려오는 녀석들에게 얼굴을 고정했다.
"..후우. 할 수 없지. 이번만큼은 내가 도와주겠소. 다만 총알 값은 나중에 받도록 하지."
"아, 진짜. 왠지 손해보는 느낌이지만..우리 일행이 신세를 졌다니 갚아줘야지."
카지트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