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경매
"후우, 진짜 죽을 것같습,니다."
닥터 윌슨은 이를 갈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미 대부분의 녀석들은 잠이 들었고, 깨어있는 건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두 수인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수마에 못이겨 고개를 까딱대고 있는 상황이라, 덕분에 약간이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도로스는 저들의 대장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봤다. 등을 돌린 채 누워있었는데, 자고 있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가슴께에 잠들었다고 판단할 뿐.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닥터 윌슨은 그렇게 말하곤 입을 뻐끔거렸다. 아마 무언가를 전하려는 모양인데, 아쉽게도 도로스는 독순술을 할 수 없었다. 혹여 배웠다해도 곤충 계통 수인들의 독특한 구강구조 때문에 읽지 못했겠지만. 한참을 무어라 전하러던 닥터 윌슨은, 이번엔 제대로 보란 듯 땅에 무언가 글을 썼다. 다행이 이번엔 읽을 수 있었다.
메..세..ㅈ..ㅣ? 메세지? 카지트와 프로바움에게 메세지를 남겼다는 건가? 도로스는 닥터 윌슨이 땅바닥에 버려둔 삽과 곡괭이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뭔가를 적고 삽 밑에 놔두긴 했었지. 그렇다면 그게 카지트들에게 보내는 메세지였던 것 같다.
도로스가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 때, 닥터 윌슨이 끼어들 듯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로스, 이제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 지 압,니까?"
닥터 윌슨은 눈짓으로 플라잉 몽키즈를 가리켰다. 혹시나 깨어있을 놈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도로스 또한 그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뒷경매'라고 하는데 어딘진 잘 모르겠어요. 혹시 압니까?"
닥터 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땅 위에 글자를 썼다. 도..망. 도망? 지금 도망가자는 걸까? 그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도로스는 감시자들을 곁눈질 했다. 그들은 아직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아마 우리,들은 뉴 펜리스로 가게 될 겁,니다. '뒷경매'엔 가본 적이 없지만, 용병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퍼져있는 이야,깁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는 사람들은 알 겁,니다."
"그렇군요."
도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곳까지 가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이 끝장날 것 같았다.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도로스는 혹시 자는 척 이야기를 듣고 있는 녀석이 있을까봐 카지트와 프로바움의 이름을 숨겼다.
"음...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수심에 젖은 얼굴로 귀뚜라미는 손을 비볐다. 5일 후에 메드비크에서 만나기로 했건만, 벌써 3일째, 이제 4일 째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온 거리를 생각하면 아마 하루 정도 더 걷는다면 바스톤에 도착할 것이다. 바스톤에서 뉴 펜리스까진 대략 이틀 정도가 걸리니, 그 땐 둘과 헤어진지 7일 째가 된다.
5일 후에 도로스와 닥터 윌슨이 메드비크에 도착하지않아 이상하게 여긴 둘이 탐색을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운좋게 닥터 윌슨이 남긴 메세지를 바로 발견한다하더라도, 이미 도로스들은 바스톤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스톤에 도착한다면,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뉴 펜리스에 도착해서 '뒷경매'에 옮겨져 있을 테고.
그는 감을 체크했다. 감은 여전히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도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그래도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내일이면 바스톤에 도착할 테고, 그렇다면 다른 플라잉 몽키즈가 있을지도 몰랐다. 숫자가 더 불어나면 탈출의 기회는 절망적이 되리라.
선택의 기로. 위험을 감수하고 탈출을 시도하느냐, 아니면 탈출을 포기하고 경매장까지 가느냐. 이건 애초에 선택지도 아니다. 당연히 답은 하나 밖에 없으니까. 그는 다각열차를 탈 때 들었던 카지트의 조언을 떠올렸다.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대신 위험한 길'. 카지트는 카디프로 발멘들을 데리고 갈 때 그 길을 골랐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도로스는 깨어있는 녀석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글씨를 썼다. 지금 도망? 짧고 간결한 내용에 닥터 윌슨 또한 주위를 경계한 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묶인 손은 어쩌지? 도로스는 로프에 묶인 손을 들어 그에게 보여줬다. 꽤 단단하게 묶인 터라 잘라내지 않는 이상은 풀기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닥터 윌슨은 문제를 가볍게 해치웠다. 곤충의 턱과 입을 이용해 로프를 갉아버린 것이다. 무언가를 갉아먹는데 최적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곤충의 턱은 정말로, 말도 안될 정도로 손쉽게 손을 포박한 로프를 분해했다. 그 중간에 사각사각하고 잡음이 났지만 다행이 그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양손이 자유로워진 둘은 짧게 눈빛을 교환하고, 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움직였다. 도로스는 한 수인의 허리춤에 매여있는 방독면에 눈길을 주곤 다시 플라잉 몽키즈에게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방독면이 아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을 자처하고 싶진 않았다.
한 발 한 발 신경을 기울인채 걷느라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모든 신경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어, 잠자는 녀석들의 작은 뒤척임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렇게 십 여분을 걸었다. 둘은 간신히 플라잉 몽키즈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위치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후우.."
닥터 윌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로스 또한 물 한 바가지 부은 듯 끈임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둘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시 한 번 술래잡기를 할 텐데, 이번엔 술래가 죽자살자 달려들게 뻔했다.
이제 최대한 도망치는 일만 남...어라?
도로스의 몸이 날았다. 찰나의 부유감 속에서 이쪽을 향해 웃음짓는 멕도너가 보였다.
"흐,흐어.."
몸이 파이프의 벽에 부딪혔다. 콰앙! 폭음이 울렸다. 이대로 짜부라져 버릴 것 같은 고통이 온몸에 엄습했다. 폐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로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벽에 부딪힌 걸까. 어째서 온 몸이 이렇게 아픈 걸까?
저쪽에서 북을 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움직임에도 뼈 마디마디가 쑤셨다. 이상하게 시야가 새빨갰다. 붉게 변한 세상은 흐릿했고, 여전히 어두웠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마치 세상이 돌아버린 것 같다.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껏 해야 여기까진가? 많이 가지도 못했군."
바위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도로스의 귀를 때렸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거대한 손이 그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팔다리가 마치 가죽처럼 덜렁대며 끌어올려 졌다. 거대한 손의 주인공이 그를 응시하며 사납게 웃어제꼈다. 마치 괴물처럼 흉한 웃음이었다.
"도망가려는 노력은 가상하다만 아쉽게 됐군."
미처 웃음기를 없애지 못한 음성으로 그는 말했다. 아찔한 고통에 반쯤 놨던 정신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샘솟기 시작하는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도로스는 고통이 약간 가시는 걸 느꼈다. 그는 눈 앞의 괴물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도.
잡혔구나. 참담한 심정에 그는 눈을 감았다. 자는 척 했던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닥터 윌슨과 대화하는 걸 내버려두었을까.
"너희들은 항상 이렇단 말이야. 그렇게 손쉽게 도망갈 수 있을 정도로 플라잉 몽키즈가 쉬워보였나?"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잔혹한 심성에 그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멕도너는 도로스와 카지트가 도망갔으면 했던 것이다. 그래야 이렇게 도망치려는 순간에 사로잡아서, 희망이건 뭐건 완전히 부셔버릴 수 있을 테니까. 구역질이 나는 것 같았다. 도로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 이렇게 썩은 내가 나고 구역질이 치미는 악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체념한 '척' 눈을 감았다. 아직 그들이 카지트와 프로바움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하면 안된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눈을 감은 채 절망한 도로스의 모습에 그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곤, 그를 내팽겨쳤다. 금속 바닥에 쳐박힌 몸이 아파 도로스는 신음을 흘렸다.
닥터 윌슨은? 온 몸을 잘게 써는 듯한 통증에 앓으면서도 그는 동료를 찾았다. 그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처음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였지만, 이내 너무나 조용하단 걸 깨닫곤 얼굴을 굳혔다.
설마. 아냐, 아닐거야. 설마.
기분나쁜 예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었다. 제발. 안돼. 제발.
"흐하하하, 그 표정! 그래! 바로 그 표정이야!"
멕도너는 닥터 윌슨에게 다가가 그를 발로 찼다. 닥터 윌슨은 크흑 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도로스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멈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열린 입에선 콜록이는 피섞인 기침과 앓는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쿨럭 쿨럭.."
도로스의 눈이 점점 풀렸다. 그를 향해 내뻗은 손은 중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철썩 떨어졌다.
"이런, 그만 해야겠군. 소중한 상품이 죽어버리면 안되지."
발길질을 멈춘 그는 아쉽다는 듯 혀를 짧게 찼다.
도로스의 눈이 감겼다. 정신이 점멸했다. 파이프의 한기가 뱀처럼 그의 몸에 얽혔다. 닥터...무사해야 할 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