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경매
"어이, 똑바로 걸어."
플라잉 몽키즈의 수인은 칼 끝을 도로스의 등 뒤에 겨누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앞으로 걸었다. 메드비크는 이미 지났겠지? 잡히고 나서 반 나절이 넘게 걸었으니 아마 지나쳤을 가능성이 컸다. 혹은 바로 다른 마을로 향하는 루트를 탔다던가.
곁에서 걷고 있는 닥터 윌슨은 조금 지쳐보였다. 하긴 휴식없이 하루 종일 걷고있으니 지칠만 했다. 그 또한 조금씩 몸이 무거워지고 있었으니까.
도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하는 내내 정보를 모으고 녀석들의 행동 패턴 따위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얻은 건 거의 없었다. 고릴라 수인, 멕도너의 일갈 이후로 녀석들은 더 이상 도로스와 닥터 윌슨에게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주절대고 있지만 도로스나 닥터 윌슨이 한 마디라도 할 경우, 원래부터 조용했었던 것 마냥 입을 꾹 다물고 대장의 눈치를 봤다.
녀석들의 행동 또한 마찬가지 였다. 언뜻보면 자유분방하고 아무런 생각없이 돌아다니는 것같으나, 도로스와 닥터 윌슨에게 붙은 감시 두 명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세 명이 항상 주위를 맴돌았다. 그야말로 이중으로 감시받고 있는 셈이다.
이래서야 도망칠 수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반 나절 도안 살펴본 결과 녀석들에겐 빈틈이 없었다. 보통 숙련된 게 아닌 듯 행동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감이 경고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탈출한다면? 감이 또다시 울렸다. 마치 거미줄에 갇힌 듯 어떤 탈출 방법을 생각해도 감이 위험하다고 경보음을 울렸다.
이대로면 정말로 '뒷경매'에 팔려버릴 수도 있다. '뒷경매'가 대체 뭔진 몰라도 온갖 불법적인 것이 거래된다는 경매장이니, 딱봐도 좋은 꼴 보긴 힘들 것 같았다. 도로스 뿐만이 아니라 닥터 윌슨 또한.
닥터 윌슨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다만 불안한 듯 묶인 손을 소매 안쪽에 대고 바르작 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주위에 집중하지 않아 발걸음이 불안정해 보였다.
닥터 윌슨도 저 상태라면 그다지 도움이 될 의견은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의견 교환도 불가능하긴 했지만. 무슨 말을 꺼내던 둘의 곁에 붙어있는 감시자들 또한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야 탈출계획을 세운다는 의미가 없지.
머리가 아팠다. 결국 경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도로스는 고민했다. 그러나 경매장이라면, 그것도 불법적인 거라면 경비가 얼마나 삼엄할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보다 더욱 엄중하단 건 확실했다. 도망치려면 최소한 경매장에 도착하기 전에 도망가야 하는데, 지금도 이중으로 둘러진 감시에 쩔쩔매고 있으니.
도로스는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답이 보이지 않았다.
"으읏!"
소매 안쪽을 만지며 꼼지락 대던 닥터 윌슨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는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낙법이고 뭐고 할 새도 없이 부딪혔는데, 소리가 큰 걸 보니 꽤 아플 것 같았다.
"닥터 윌슨! 괜찮습니까?"
도로스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의 곁에 서 있던 감시가 그를 막아세웠다. 빌어먹을!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동료가 다쳤는데 근처에도 못갑니까?"
"괜히 호들갑이야. 그래봤자 넘어진 것 뿐이잖아? 쯧, 애들도 아니고."
물론 단순히 넘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닥터 윌슨은 넘어진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간 반응이없자 녀석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닥터 윌슨의 감시가 그를 발로 툭툭 건들었다.
"어이, 일어나. 언제까지 자빠져있을 거야?"
"으,으윽. 죄,송합니다."
닥터 윌슨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소매가 무언가에 걸린 듯 지이익,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이런.."
닥터 윌슨은 아쉽다는 듯 소매를 매만졌으나, 그런다고 찢어진 소매가 원래대로 돌아오진 않았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입으로 소매를 물고 쭉, 잡아뜯었다.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소매는 거친 여행 끝에 흙과 오물로 더러워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닥터 윌슨은 아쉬운 듯한 눈으로 잠깐 그것을 바라보더니, 감시역의 명령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닥터 윌슨. 괜찮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잠깐 어지러,웠던 것 뿐,입니다."
"어이, 잡담은 그만하라고. 그러다 돌연변이라도 오면 어쩔려고 그래?"
감시역이 둘의 대화를 방해하며 이죽였다. 말도 안되는 억지였지만 둘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소리는 그들이 떠드는 소리가 훨씬 컸다. 당연히 돌연변이가 온다면 플라잉 몽키즈 때문이리라. 그러나 저들과 다퉈봤자 도로스와 닥터 윌슨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빌어먹을 원숭이 놈들! 저놈들의 억지엔 이제 신물이 났다. 마음같아선 한 바탕 날뛰고 싶었지만, 뒷 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괜히 저들의 감시를 강화시킬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녀석들도 조금 지루해졌는지 조금씩 도로스와 닥터 윌슨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살짝살짝 대장의 눈치를 봐가면서 건드렸지만 대장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그들은 조금씩 대담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무리 중 하나가 도로스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뭔가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적이다, 검은색의 물체를 떨어뜨렸다. 도로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방독면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줍고 싶었지만 도로스는 참았다.
"어이쿠, 실수로 '내 물건'을 떨어뜨렸네?"
딱 봐도 도발하는 게 분명했다. 도로스는 이를 갈며 참았다. 저런 싸구려 도발에 넘어가지 말자. 어디까지나 그가 노리는 건 단 한 번의 기회. 최대한 무해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 녀석들이 방심한 그 순간까지. 그 때까진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춰야 한다.
"어이쿠, 실수로 밟아버렸네?"
뿌드득.
그러나 차오르는 분노만은 참기가 어려웠다. 이가 갈렸다. 누나랑 마을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준 소중한 방독면을! 도로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며 녀석들의 도발과 조롱을 견뎠다. 녀석들은 심심풀이용으로 도로스와 닥터 윌슨을 자극하는 듯 했다.
닥터 윌슨의 경우 도로스보다 취급이 더 좋지않았다. 녀석들은 '인간'이라는 희귀한 상품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는 듯 어디까지나 말만으로 약 올렸지만, 닥터 윌슨에겐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어디까지나 툭툭 건드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차후 그 강도가 증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거 때려도 되지 않아? 어차피 피부색도 이래서 때려도 티도 안날 테고."
원숭이 수인 중 하나는 더러운 것을 만지듯 닥터 윌슨을 찔러댔다. 좌우로 벌어진 곤충의 턱이 위협하듯 딱딱 부딪혔다. 그 또한 사람인지라 이런 상황에 화가 나는게 당연했다. 게다가 이들은 그가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의 기질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그가 받는 굴욕과 스트레스는 더욱 심할 터이다.
"멍청하긴. 그럼 이놈도 때려도 되지. 얼굴만 멀쩡하면 되잖아?"
그들은 도로스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저녁이 되어서 잠이 들기 전까지 계속되는 조롱과 비아냥에 둘은 안간힘을 쓰며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