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경매
시야가 새햐애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숭이들은 시끄럽게 소리높혀 부산을 떨어댔고, 닥터 윌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신은 멀쩡했다. 차라리 기절해버렸으면 좋을텐데. 기절한다면 최소한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들켰다.
갑작스런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못하고 화이트 아웃한 사고가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들켜버렸다는 생각이 경보알람처럼 머릿속에 점멸했다. 어떡하지? 대답없는 의문이 잇따랐다. 박제당하거나 먹히거나 하는 등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결말들이 머릿속에서 좌르르 흘렀다.
그는 일어서기 위해 버둥댔다. 그 위에 올라타 팔을 구속하고 있던 수인 또한 그의 정체에 당황했는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재빨리 수인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 그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든 이들이 지켜봤다.
도로스는 아픈 손목을 매만지며 닥터 윌슨의 곁에 섰다. 그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눈으로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약간의 죄책감. 도로스는 그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일행에겐 나중에 넌지시 말해보려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던 변명처럼 들릴 것이다.
그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도로스는 지금 당장 플라잉 몽키즈에게서 도망치기로 했다. 그를 보는 녀석들의 눈이 심상치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거지 또한 그랬다. 앉아있던 녀석들까지 일어나서 슬금슬금 다가오는게, 딱봐도 둘을 포위할 작정인 듯 하다. 도로스는 다가오는 녀석들을 견제하며 떨어진 방독면을 찾았다.
어디있지? 빠르게 눈으로 바닥을 훑자, 그의 방독면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그는 혀를 찼다. 하필이면 다가오는 원숭이들 사이에 떨어져있었다. 아쉽게도 따로 여분의 방독면은 없었다. 저게 없다면 마을엔 들어갈 수 없을 게 뻔했다. 다가오는 녀석들을 보면 인간의 가치가 어느정돈지 알 수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 당장 주울 순 없었다. 아쉽지만 버리기로 했다. 방독면 때문에 잡힌다면 본말전도니까.
도로스는 닥터 윌슨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눈치빠른 귀뚜라미는 도망가자는 신호를 대강 알아듣고 옆으로 빠져서 조용히 짐을 챙겼다. 다행히도 녀석들의 눈은 전부 도로스에게 고정되어있는 상태라 닥터 윌슨에겐 그다지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가방을 챙긴 후 조그만 구슬같은 것 몇 개를 꺼내 손에 쥐었다. 긴장한 듯 가쁜 호흡을 보이던 그는 마음을 다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도로스!"
도로스를 포함한 모든 인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사방에서 날아든 시선에 움찔하면서도 천천히 행동을 개시했다. 손을 들어 던지는 자세를 취했다. 플라잉 몽키즈 중 몇몇이 그가 들고있는 가방이나 모습을 보고 도망칠 거라는 걸 짐작한 듯 그에게 달려왔다.
"달,립시다!"
마치 시간이 늘어난 것 같다고 닥터 윌슨은 생각했다. 천천히, 그의 손에서 떠나간 구슬들이 조금씩, 조금씩 원숭이 수인들과 가까워졌다. 늘어진 시간 속에서도 녀석들의 반응속도는 매우 빨랐다. 피하는 놈. 날아오는 구슬을 주먹으로 으깨려는 놈. 구슬을 잡으려는 놈.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
시간과 시간의 사이에서 닥터 윌슨은 몸을 그들에게서 돌렸다. 다만 곤충 계통 수인의 특징인 겹눈은 보통의 수인들보다 넓은 시야각을 가지고 있어서, 천천히 몸을 돌리는 사이에도 녀석들에게 닿은 구슬이 터지는 장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챙그랑!
파이프의 금속바닥에도 부딪힌 몇몇 개의 구슬이 금속성을 내며 터져나갔다.
회색의 연기가 천천히 사방으로 퍼졌다. 연기를 들이마신 이들이 천천히 목과 코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천천히 범위를 넓히면 연기가 닥터 윌슨에게 닿았다.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늘어져서 잘게 쪼개진 듯한 비명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닥터 윌슨은 도로스의 팔을 잡고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그들을 뒤따라잡은 연기가 둘을 어루어만졌다. 닥터 윌슨은 멀쩡했으나 도로스는 얼굴을 부여잡고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는 재채기가 그의 입에서 연신 터져나왔다.
그는 닥터 윌슨에게 무언가 말하려했으나 강렬한 기침이 그의 입을 막았다. 도로스는 결국 말하길 포기한 채 닥터 윌슨의 손에 이끌려 달렸다. 눈이 매워서 눈물이 멈추지않아 시야가 흐릿했다. 닥터 윌슨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라이트의 불빛에 의지해 끊임없이 달렸다.
한동안 정처없이 달리자 연기의 효과가 사라졌는지 비교적 멀쩡한 목소리로 도로스는 물었다.
"크흥, 방금 그게 뭡니까?"
도로스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눈물 콧물에 침범벅이 되어버린 동료의 모습에 닥터 윌슨은 잠깐 유쾌해졌다. 인간을 만난 것도 행운인데 이런 모습까지 보는 건 아마 그가 현대에선 처음 일지도 모른다.
"온갖 지독,한 냄새를 모아둔 겁,니다. 곤충,계통 수인들은 후각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으니 괜찮,습니다만, 후각,이 발달한 동물,계통 수인들에겐 매우 고통스러,울 겁니다."
"어째서 그런 걸?"
도로스는 코를 흥, 풀었다. 저건 단순한 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면 냄새 때문에 눈이 따갑고 혀에서 이상한 맛까지 난단 말인가? 인간인 도로스 조차 이 지경인데 인간보다 후각이 더 발달한 수인들에게라면 화학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원숭이 녀석들은 아마 지금쯤 땅바닥을 구르며 괴로워 하고 있을 것이다.
"호신용,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저같은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필수,입니다."
도로스는 대체 '저 같은 사람'이 누군지 묻고 싶었다. 닥터 윌슨이 일행 중에서 제일 전투력이 떨어진다지만 그래도 돌연변이 한 둘 한테 당할 정도까진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일반인보단 확실히 셀 것이다.
"이 정도라면,켈록, 돌연변이한테도 먹히겠는데요? 유적에 있을 때 썼으면 괜찮았을텐데."
"카지트가 있으,니 쓰지않았습,니다."
도로스는 아, 하고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긴, 카지트 때문에 못쓰겠네요."
후각이 둔한 닥터 윌슨이나 자동인형인 프로바움이라면 몰라도 고양이과의 예민한 후각에 이걸 터뜨렸다간 카지트가 닥터 윌슨을 진심으로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도로스도 그땐 방독면을 쓰고 있었으니 의외로 괜찮았을 지도 모르고.
"허억, 좀, 쉬고 갑,시다."
체력이 부치는 듯 닥터 윌슨은 파이프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걸보니 어지간히 뛴 듯 했다. 도로스 또한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파이프 너머로 차가운 어둠이 올라왔다.
얼마나 도망쳤는지는 모르지만 그 원숭이들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을 쫓아올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지만. 그는 반쯤 실신할 것 같은 닥터 윌슨을 응시했다. 그래, 잠깐만 쉬다 가자. 다행히 그의 감은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도로스가 그 희귀,하다는 '인간'일 줄이야..정말 놀랐,습니다."
도로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동료들에게선 이것저것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자기 정체를 끝끝내 숨긴 셈이라, 살짝 미안한 느낌까지 들었다.
"으음, 사실..좀 나중에 말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괜찮습,니다. 세간,에서 인간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한테도 숨긴 건 좀 슬프지만 말입니다, 닥터 윌슨은 장난스런 어조로 덧붙였다. 그 큰 겹눈엔 호기심이 가득차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 순진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에 괜히 미안한 마음만 더 커져, 도로스는 어설프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말할 걸.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는 어떻게든 차오르는 질문을 애써 내리누르는 기색이었다. 아마 평상시같았으면 달려들 듯 다가와 온갖 질문을 퍼부어댔으리라.
"하하, 농담,입니다. 그런,데 도로스가 인간이,라는 건..다른 마,을 사,람들 또한 인간,입니까?"
"아뇨. 저랑 제 누나만 인간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동물 계통 수인이고요."
닥터는 조금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고개를 숙이자 길어진 그림자가 라이트의 경계선 너머로 사라졌다. 빛의 경계선 바깥은 적막했다. 빛 안에서 닥터 윌슨의 말이 울려퍼졌다.
"그렇습,니까? 조금 아쉽,습니다. 인간의 풍습,과 전통, 생활양,식 등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알아들을 수 없는 고급 어휘들의 난무에 도로스는 대화를 반쯤 흘리며 그저 맞장구쳤다. 그간의 경험으로 복잡한 단어가 나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배운 덕이다.
"아, 맞다. 닥터 윌슨, 혹시 나중에 저희 마을에 들르면 제 누나 좀 진찰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누나분,께선 어디가 안좋으,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거든요. 조금만 걸어도 피곤하다고 하고, 항상 기침을 달고 살아서 조금 걱정되서.."
"물론,입니다. 그런데..양친께선?"
도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딱히 부모님에 대한 안좋은 추억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단순히 양친이란 단어의 뜻을 몰랐을 뿐. 그가 어물쩡 거리자 닥터 윌슨은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민감한 주제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마을,에서 인간,으로 사는데 뭔가 특별하,거나 그런 건 없습,니까?"
"예? 딱히..누나랑 둘이 살긴하지만 그리 불편한 건 없습니다. 다들 서로 돕고 사니까요. 뭐, 가끔 절 낳아주셨다는 부모님 얼굴이 궁금하긴 하지만요."
"어릴 때..돌아가셨습니까?"
닥터 윌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또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까닭이다.
"예, 마을 앞에 버려져있었대요. 그래서 누나네 부모님이 거둬주셨는데, 그분들도 원체 병약했던 분들이시라..."
도로스는 말을 흐렸다. 닥터 윌슨은 대강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조금 도로스가 부러웠다. 최소한 그의 곁엔 누나와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친절한 마을사람들이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던 그와는 정반대로. 다만 그런 저급한 질투에 휘둘리기엔 그의 정신은 너무나 강인했다. 닥터 윌슨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이어가던 도로스는 대화를 멈췄다. 찌릿, 하고 감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도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갑시다. 계속 앉아있으면 잡힐 거에요."
그는 그들이 왔던 파이프 쪽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물러났다. 닥터 윌슨 또한 굳은 도로스의 표정을 보고 말없이 일어나 그의 곁에 섰다. 둘은 곧 파이프의 어둠너머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