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2.유적 (28/100)



〈 28화 〉2.유적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멈춰섰다. 얼마나 오래 달린 건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애매해진 시간감각이 일분과 한 시간을 구분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유적을 무너뜨릴 것만 같던 진동과 굉음은 이미 멈춰있었다. 그들이 너무 멀리와서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싸움이 결착난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주위엔 이미 흙과 돌 밖에 없었다. 문명의 잔재조차 찾아 볼 수 없는 곳. 대체 얼마나 멀리 온 건지, 아직 유적 안에 있는 건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생각과 동시에 긴장이 풀린 몸은 바닥에 시체처럼 널부러졌다. 닥터 윌슨 또한 옆에 배를 보인채 누웠다.



"허억..허억.."



숨을 몰아쉬자 멈췄던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 것 같았다. 곤충이 뒤집어진 것 마냥 배를 위로 하고 누운 닥터 윌슨이 어떻게 일어날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쓸데없는 질문에 그는 픽 하고 웃었다.



"살았네요."

"산 것 같,습니다."



"카지트랑 프로바움은 어떻게 됐을까요?"




닥터 윌슨은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희망적인 관측이 불가능했다. 도로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겁니다. 둘은 베테랑이니까요."




그는 감에 귀를 귀울였다. 그러나 감은 만능이 아니었다. 제발, 살아있다고 해줘. 어떠한 언질없이 침묵하는 감에 그는 눈을 감았다. 살아있을 것이다. 그 둘은 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다. 카지트 또한 길잡이니 어떻게든 살아날 길을 찾을 것이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한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네 명   명. 그 두 명의 빈자리가 더 없이 크게 다가왔다. 일행을 이끄는 리더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카지트. 그리고 모두의 기둥이 되어주던 경험많은 프로바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는 애써 담담한  했다. 그러고보니 카지트가 토벌대 꾸리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었는데. 누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점점 우울해지는 기분을 떨치기 위해 그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남아있는 유일한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마 넷이라서 다행이네요."



"..예?"



"카지트 말마따나 넷이라서  명씩 나뉘었잖아요."


그는 4라는 숫자를 싫어하는 동료를 떠올리곤 킥킥 웃었다.




"셋이었으,면 혼자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는 듯 닥터 윌슨은 네 손을 비볐다.  대화를 끝으로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실 둘 모두 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닌지라 이런 상황은 꽤 어색했다. 도로스는 입을 달싹거리다 다물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는 까닭이다.




한참을 궁리한 끝에 그는 적당한 주제를 찾아냈다.

"새로운 지식을 위해서 목숨도 걸다니..대단하네요."

누운 채 어느새 젤리형태의 전투식량을 꺼내 먹고 있던 닥터 윌슨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생각했던 반응과 다르자, 하필이면 주제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한층 더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며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전투식량이나 먹기로 했다.



한동안 복잡한 얼굴로 가만히 도로스를 응시하던 닥터 윌슨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닙,니다. 사실 처음,엔 공부하는 게 너,무나 싫었,습니다."


갑작스런 중얼거림에 무슨 말인지 귀를 귀울이던 그는 이내 그것이 대답임을 깨달았다.

"..다만 그게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노력,했을 뿐입니,다."


"시선을 바꾼다?"



알 수 없는 말에 도로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시선을 바꾼다? 무엇에 대한 누구의 시선을 바꾼다는 말인가. 그는 닥터 윌슨의 말에 집중했다.




"네, 맞습,니다. 도로스,는 외형이나 종족,때문에 차별,당해 본 적 있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거리 탓인지 고립된 마을은 서로 도우며 살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바깥엔 돌연변이들이 득시글하지, 물자는 항상 부족하지, 종족이나 외형따위에 신경쓸 새가 없었으니 차별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마을을 나갈 때 항상 방독면을 쓰고 다니라고 말해준 사람들이 그들이지 않은가.

도로스의 부정을 본 닥터 윌슨은 부럽다는 듯 입매를 찌그러뜨렸다.

"좋은 이웃,을  것 같아 부럽,습니다. 제 경우에는...아니, 곤충,계통의 수인들은 종종 주위,에서 차별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숫자,도 동물,계통의 수인들보다 적고 아무,래도 외형이 외형,이다보니.."




그는 말을 흐렸다. 꽉 쥐어져 부들거리는 그의 주먹이 도로스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어조에 격정이 깃드는 게 느껴졌다.


"전에, 공터에서 제가 인류,를 위해 탐사한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반,쯤 거짓말,입니다. 그냥 이렇게 해서 성과,를 올린다면 차별,적인 시선이 좀 없,어질까 하는 얄팍,한 생각입니다."

갑작스런 고백에 도로스는 침묵했다. 애초에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것 또한 처음인 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오로지 듣는 것만이 지금으로썬 최선의 답이리라.

마치 강둑이 터진 것처럼 닥터 윌슨은 점점 감정적으로, 한층 더 깊이 말을 쏟아냈다.

"어릴 때 제가 살,던 곳은 그리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거기다 주위엔 전부 동,물계통의 수인종 뿐이고 곤충계통의 수,인이라곤 저와  아,버지 단 둘 뿐이어서, 알게 모르게 주위,에선 이런저런 차별을 받곤 했는,데..설마 그런 일까지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습니다."




목이 타는지 그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평소의 지적이고 얌전한 태도를 고수하던 그는 어디갔는지 도로스의 눈 앞에 있는 사내는 분노와 피로에 찌들어 헉헉 대고 있었다. 그 사람좋던 이를 이렇게 뒤바꾸어 버릴 정도의 사건이 대체 뭔지 도로스는 의문에 휩싸였다. 다만, 아주 불합리하고 역겨운 일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 일을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이 메이는 듯 말을 삼키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며칠 후에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난 터라 범,인이 누군지 조차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만.. 아마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벌인 짓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그러한 사건이 벌어진다고 그는 담담히 감정을 죽여가며 말했다. 담담하기까지 한 어조에, 오히려 도로스는 그 이면에 넘실거리는 불합리한 고통과 분노를 눈치챌 수 있었다.



"유명,해지자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해지고 조금 더 높은 곳으로 간다면 차별,을 없앨 수 있을 거라고, 더는 주위,의 누군가가 모르,는 곳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서...그래서 미칠,듯이 학문을 배웠,습니다."

말을 마친 후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윤기나는 검은색 키탄질 피부가 살짝 붉어진 것처럼 보여 도로스는 잠시 눈을 비볐다. 귀뚜라미는 한탄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 그래도 거기도 결국, 마찬가지였지만 말입,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또다시 침묵이 둘의 사이를 갈랐다. 도로스는 그가 굉장이 불안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기사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만 했다. 어릴  아버지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 도로스는 자신을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누나나 마을사람들이 없이 홀로 지냈다면. 끔찍한 상상에 도로스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닥터 윌슨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시  번 깨달았다.

주위에 연고도 없이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의학과 고고학 박사가 되기까지. 대체 얼마만큼의 노력을 쏟아야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도로스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경탄과 존경섞인 눈빛에 귀뚜라미는 부끄러운  몸을 배배 꼬았다.

"진짜 대단하네요. 으, 저라면 대체 어떻게 됐을지.."


"아닙,니다. 저도 중,간에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게 재밌,어서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도로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닥터 윌슨은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오는 도중에  번이고 본 터라 수긍이 갔다. 그래도  의지와 끈기는 정말 존경스러웠다. 특히 광장에서 뼈 울타리에 다가설 때. 누구도 그 기분나쁘고 불경한 것에 가까이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압도되어 있었을 때, 오로지 그만이 그것에 다가섰다.

"그럼..그 광장에선.."

"그때는..음..명예? 학,구열? 그런  아닙,니다. 아니, 학구열에 가깝겠,습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그냥 그 땐..."



그는 중구난방으로 내뱉으며 말을 흐렸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회상하는  잠시 겹눈을 닫고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이내 말을 이었다.



"그냥 그 땐...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아버지 또한 조각,상 주위의 사람들,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죽어,갔으니..아무도  지 못하는 곳에서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 최,소한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다면..."

"아..그래서."


도로스는 거대한 공동 가운데 우뚝  조각상과  주위를 둘러쌓은 뼈들을 떠올렸다. 그때 조금 슬퍼 보였었지. 귀뚜라미는 흐린 미소를 지었다. 도로스는 또다시 길을 잘못 들었음을 느끼곤 입을 닫았다.  놈의 감이란  대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대화 주제나 대답을 고를 땐 하등 도움이 안되었다. 그는 곤란한 듯 뺨을 (정확히는 방독면을) 긁었다.

다행이 이번엔 닥터 윌슨이 주제를 바꿔 그에게 물었다.


"도로스, 그러고,보면 항상 방독,면을 쓰고 있는,데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좀 사정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고른다고 고른 주제가 도로스에겐 꽤나 대답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카디프에서 카지트의 반응으로 볼 때, 인간이란 건 그야말로 희귀하기 짝이없는 전설의 생물 비스무리 한 것인데. 게다가 광장에선 인간으로 추정되는 것의 뼈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잖은가.


그래서 더더욱 곤란했다. 그간의 여행으로 닥터 윌슨이 믿을만한 사람이란  확실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체를 털어놓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자니 닥터 윌슨의 이야기는 다 들어놓고 자기 이야기는 모른  한다는 것도 좀 그렇고.

"호흡기,가  안좋은 모,양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

딜레마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닥터 윌슨은 아는 듯 모르는 듯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사실 호흡기에 선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그리 희귀한 것도 아니라서 도시나 마을 내에서 방독면을 쓴 채 활보하는 사람들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아마 닥터 윌슨 또한 도로스를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 듯 했다.




도로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27분. 대강 쉴만큼 쉬었으니 슬슬 움직일 때였다. 돌연변이들의 우두머리와 마주친 게 언제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흘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다시 움직이죠."



"도로스."



"네?"

"길을 아십,니까?"



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진 건물의 틈새처럼 얽기섥기 조잡하게  있는 토굴은 분명 유적의 안쪽보다는 바깥쪽에나 어울릴 법 했다. 들쭉날쭉한 너비나 높이, 그리고 거칠거칠한 흙벽 표면을 보아하니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인공적인 구조물을 아닌 듯 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이런 통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느낌이 났다. 방향은? 도로스는 그의 감에 집중했다. 이번엔 감은 그의 기대에 제대로 답해주었다. 앞이로군. 어디로 나가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감을 믿고 따라간다면 분명 나갈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보면 복도에서 느꼈던 긍정적인 기분은 지금이었을 지도 모르겠네. 도로스는 생각했다. 부정적인 느낌과 긍정적인 기분을 동시에 느꼈던 때. 부정적인 느낌은 분명 그 괴물 때문일 테고, 긍정적인 느낌은 아마 지금인 것 같았다. 일행이 나뉘긴 했지만 일단은 살아남았고, 나가는 길 또한 감이 가르쳐  테니까. 남은 일은 메드비크로 돌아가서 카지트와 프로바움과 합류하는 것 뿐이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그 둘이라면 분명 그 괴물한테서 살아남았을  틀림없을테니까.

벌써부터 카지트의 입담이 그리웠다.



둘은 천천히 토굴을 나아갔다. 다른 둘에 대한 걱정을 마음 한 켠에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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