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유적
후욱.후욱.
거친 숨소리가 방독면의 필터를 타고 오염된 공기중에 퍼졌다. 말없이 복도를 걷는 일행의 눈은 심유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가서야 그들은 희미한 진동과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를 듣을 수 있었다. 무언가가 그들의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두근.
도로스들은 조용히, 그러나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천장과 왼쪽벽을 뒤덮은 토사. 피와 오물로 더럽혀진 바닥.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조금씩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두 계단.
두근.두근.
그들의 눈은 왼쪽벽과 천장의 토사에 집중되었다. 누가봐도 명백했다.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저 차디찬 흙의 바닷속에서 그들을 노리고 있음이.
두근.두근.
한 걸음 씩 내딛을 때마다 불안함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것은 이내 통제를 벗어나 긍정적이던 느낌을 살라먹고 몸을 옥죄었다.
두근---.
도로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육식동물을 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멈춰섰다. 일행의 선두에 선 그가 멈추자 동료들 또한 자동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프로바움의 속삭임이 잠든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니다."
도로스는 웅얼거렸다. 반쯤 목구멍에 걸린 말은 뛰어난 수인의 귀로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반쯤 뭉개진 발음에 일행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뭐라고?"
"옵,니다! 뛰어요!"
도로스는 일행을 잡아끌며 앞으로 내달렸다. 극도의 긴장감. 불안. 공포. 두려움. 압도될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렀다.
나약해진 정신과 반대로 몸은 살기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렸다. 아드레날린이 온 혈관을 내달렸다. 좀 더 많은 빛을 받기 위해 동공이 빠르게 이완되고 심장이 한층 더 기어를 올려서 기관총처럼 팔딱 뛰었다. 코 끝에서 씁쓰름한 화약내가 나는 듯 했다.
쿠웅!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일행 바로 뒤에 울렸다. 소규모의 지진과 함께 역겨운 먼지가 버섯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소름이 돋았다. 뒤돌아보고 싶지 않아. 도로스는 방독면 속의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다.
어차피 뒤돌아 볼 필요도 없었다.
"놈,입니다!"
그를 대신해 뒤를 돌아본 닥터 윌슨의 공포에 젖은 비명소리가 둔탁하게 복도에 울렸다. 쿠르릉. 그에 맞춰 천장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토사土砂가 유사流沙처럼 흘렀다. 안개처럼 퍼진 흙먼지를 뚫고, 도로스들은 휘청거리면서 달렸다.
크에에에에!!
놈은 기습에 실패한 게 아깝다는 듯 허공에 울부짖었다. 삐-하고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듯 했다. 곁에서 달리는 카지트가 살짝 휘청이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달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선 달리는 것 이외의 행동을 포기했다.
다른 동료들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놈에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빠르게 그들을 뒤덮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죽는다. 앞으로 조금. 오른쪽과 왼쪽.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위로 올라간다고 저걸 막을 수 있을까? 생존본능으로 흐리멍텅한 머릿속에 번갯불처럼 생각이 튀었다. 계단은 우두머리의 크기에 비해 월등히 좁았으나, 저것이라면 쉬이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괴물은 뱀처럼 좌우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도로스들의 바로 뒤편까지 바짝 쫓아왔다. 일행은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좀 더 빨리. 빠르게.
숨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어질어질했다. 도로스와 카지트 바로 뒤에서 달리던 프로바움과 닥터 윌슨은 뒷목을 서늘하게 하는 한기를 느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이 동시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어?"
놈이 손에 달린 낫을 치켜들었다. 두 쌍의 눈동자에 내려치는 칼날이 선명하게 빛났다.
"카지트으으!!"
프로바움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왼 편에서 나란히 달리던 닥터 윌슨을 강하게 밀쳤다. 프로바움의 앞에서 달리던 카지트 또한 눈을 크게 뜨며 왼 편의 도로스를 온 힘을 다해 밀쳤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아래로 향하는 계단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괴물의 낫이 둘이 달리던 곳에 수직으로 내리꽃혔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이런 상황까진 예견하지 못했는 듯, 카지트는 이마를 거칠게 찌푸렸다. 빌어먹을. 그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에서 재빨리 몸을 추스리고 일어난 둘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더를 바라봤다.
둘로 나뉜 먹이에 돌연변이는 어느쪽으로 가야할 지 고민하는 듯 잠시 멈춰섰다. 그러나 이내 방향을 정한 듯 수인과 자동인형을 무시하고 내려가는 계단 위의 둘을 바라보며 소름끼치게 웃었다. 가시처럼 무분별하게 난 이빨 사이로 걸쭉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치이익, 고기 익는 소리는 내며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카지트는 할 수 없다는 듯 쯧, 혀를 차고는 소드 오프 샷건을 놈에게 겨눴다. 프로바움 또한 그를 따라서 페퍼박스를 조준했다.
"어이, 도로스! 5일 후 메드비크에서 보자!"
타앙! 타앙!
큰 소리로 외치며 카지트는 화약식 샷건을 우두머리에게 갈겼다. 세 발의 벅샷이 화연을 풍기며 녀석의 머리를 때렸다. 놈의 두꺼운 갑각에 얕은 생채기가 생겼지만 그게 다였다. 오히려 어중간한 위력이 돌연변이의 화를 돋군 듯, 도로스와 닥터 윌슨에게 향하던 녀석은 몸을 틀어 카지트와 프로바움을 노려봤다.
생리적인 혐오감을 유발하는 기분나쁜 눈에 둘의 몸이 잠시 굳었지만, 이내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어서 가! 크윽.."
수평으로 휘둘러진 칼날을 카지트와 프로바움은 굴러서 간신히 피했다. 낫에 가격당한 벽과 천창이 부스러기 마냥 우수수 무너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페퍼박스가 분노찬 고함을 질렀다. 장전된 스물네발의 탄환이 일제히 돌연변이의 갑각을 때렸다. 이번만큼은 돌연변이에게도 어느정도 타격이 있었는지 괴물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가! 빨리!"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살쾡이와 자동인형은 우두머리가 주춤한 순간을 틈타 위쪽으로 도망쳤다. 동시에 붕괴된 천장과 벽에서 흘러내리는 흙과 돌의 격류가 아래계단을 휩쓸기 시작했다.
"도로스! 저희도 빨리!"
도로스는 입술을 꽉 물고 닥터 윌슨과 함께 전속력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짙은 녹색에 가까운 무언가를 흘리던 돌연변이는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난 듯 두 손에 달린 낫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쿠르릉!
"흐앗!"
둘은 기겁하며 반쯤 구르듯 계단을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곳에 무너진 천장이 입을 맞췄다. 화가 단단히 난 듯 놈이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탓에 위층에서 암석 파편과 흙덩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좋지않은데. 도로스의 감이 경고했다. 이러다가 돌연변이에게 죽기전에 낙석에 압사당할 판이다.
하지만 몸이 생각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직 돌연변이에게 압도당한 채 였다. 감이나 감각이 예민해서 그런건지 다른 동료들보다 녀석에게 좀 더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바닥을 굴러서 간발의 차로 낙석을 피했다. 머리를 스치는 바위덩이에 뒷목이 서늘했다. 어정쩡하게 일어난 도로스는 다시 달렸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체감상 1층 정도의 높이인 것 같다. 닥터 윌슨이 보조를 맞췄다.
어두운 일직선 복도. 마치 땅이 우는 듯 거센 흔들림으로 요동치는 복도를 둘은 내달렸다. 몸이 조금 풀린 듯 아까보단 상태가 나아졌다.
어디로 가야하지?
생각할 시간이나 여유따윈 없었다. 도로스는 갈라지는 바닥을 뛰어올라 피아며 본능적으로 감에 의지했다.
앞으로. 왼쪽. 오른쪽. 올라가고. 내려가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한 시간? 아니, 어쩌면 1분일지도 모른다. 둘은 살기 위해 정신없이 달렸다. 위쪽에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듯 여전히 무언가 파괴되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연신 유적을 뒤흔들었다.
700년의 낡아빠진 역사는 괴물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유적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하지? 정신없이 몰아치는 먼지폭풍 한 가운데서 그는 눈을 감고 최대한 감에 집중해보려고 노력했다. 닥터 윌슨은 말없이 삽을 꺼내들고 도로스를 노리고 날아드는 바윗덩이를 하나씩 쳐냈다.
"..저쪽!"
도로스는 돌연 눈을 뜨고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나 불빛은 흙먼지와 암석에 가로막혀 흐릿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는 닥터 윌슨을 이끌로 무작정 가리켰던 방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