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유적
네 곳의 길 중 세 곳을 살폈으나 딱히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소득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700년 전의 자명종같은 특색없는 물건따위가 전부였다. 거액을 눈 앞에 두고도 가져가지 못하는 일행에게 그런 푼돈따윈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나 챙기긴 했다).
길 또한 세 곳 중 한 곳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지만, 그 문 또한 공동의 입구와 비슷한 식으로 막혀있었기에, 일행은 나머지 한 곳 마저 둘러본 후에 다시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최악의 경우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전에 탐색을 모두 마치는 편이 나았다.
네 번째 길 앞에 선 일행은 망설임 없이 올라갔다. 테라스는 1층을 제외하고 5층까지 층마다 하나 씩 있었는데 각 테라스마다 휴게실이나 주거용의 방따위로 연결되는 공간이 있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다른 길과 똑같았음으로 일행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탐색할 수 있었다.
"여기도 뭐 딱히 없는데."
"그러게요. 이런 걸 주웠는데 관상용 외엔 쓸모 없는 것 같아요."
도로스는 카지트에게 주운 공예품을 보여줬다. 라이트에 비친 공예품은 손톱보다 약간 두꺼운 두께의 직사각형 크리스탈이었는데 테두리에 얇은 철테가 박힌 물건이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그들에겐 관상용 이외의 용도는 없어보였다.
"아, 그거. 옛날에 본 적있어. 유물 전수회인가? 거기서 봤었을걸."
"유물전시회다."
프로바움의 지적에 카지트는 입을 다물고 한동안 침묵했다.
"확실히 이곳에도 쓸만한 건 없는 것 같군 그래."
프로바움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사람도 없고요."
도로스는 테라스에 기대어 공동 가운데 홀로 선 조각상과 뼈로 만들어진 기이한 원을 내려다 보았다. 탐사하는 동안 시체는 커녕 뼈 하나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도로스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사라진 사람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조각상을 지키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시야에 뼈의 원진은 마치 무언가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아주 사악하고 역겨운 무언가의.
"어이, 이제 볼 일 없으니 가자고."
카지트는 도로스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조각상에 고정된 그의 두 눈엔 탐욕과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도로스 또한 미련섞인 눈으로 조각상을 응시하다가 마지 못해 등을 돌렸다.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도로스 일행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문으로 향했다. 문의 구조나 재질 따위는 공동의 입구의 그것과 동일했기에 접착제와 헝겊뭉치 앞에서 간단히 열렸다. 일행의 후미에 선 닥터 윌슨은 마지막으로 조각상과 그 주위의 해골들을 슬쩍 응시하곤 이내 문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방에 들어선 일행은 얼굴을 굳혔다. 문 너머의 공간은 일자 형태의 긴 복도 끝에 위와 아래로 나눠진 Y자 형의 갈림길 이었다. 복도의 길이는 거의 네 층을 눞혀놓은 것처럼 길어서 라이트의 끄트머리에 두 계단이 어렴풋이 보였다.
본디라면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말끔하고 매끄러워야할 대리석 바닥은 먼지를 껴안은 핏자국과 자갈을 머금은 흙알갱이에 더럽혀져 있었고, 그 시대의 각종 명화와 예술품으로 치장되어 있었을 벽은 반쯤 흙에 매몰된 채 숨이 멎어 있었다.
눅눅한 노란색 라이트빛으로 가득찬 복도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나쁘게 느껴졌다. 조명에 물들어 본래의 빛을 잃고 변질된 채 신음하는 복도는 마치 죽음에서 되살아난 시체처럼 음산한 혐오감을 풍겼다.
도로스와 카지트는 주위를 경계하며 위험요소를 살폈다. 그러나 그들의 감은 위험 따윈 없다는 듯 침묵했다. 그럼에도 한동안 주위를 살피고 나서야 둘은 경계를 풀었다.
일행은 복도의 절반을 덮은 자갈과 흙더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오로지 닥터 윌슨만이 뒤에 남아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외벽이 부서진 건가?"
"그런 것 같군 그래. 그것도 위층에서 새어나온 것 같으니 규모가 상당하겠군."
"그렇겠지. 밖에서 봤을 땐 윗귀퉁이 밖에 안보였잖아? 근데 대체 여기가 몇층이지?"
카지트는 고양이 수염을 배배 꼬며 갸우뚱 거렸다. 프로바움 또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제대로 층을 세며 내려간 게 아니니, 이곳이 몇층이고 건물 내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한 건지 그들에겐 알 방법이 없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도로스는 머리를 긁적이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다. 흙에 잡아먹힌 복도를 둘러보며 느낀 건데, 느낌상 둘 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인 것 같은데 어쩐지 애매했다.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불투명한 막에 감싸인 듯한 느낌? 그거랑은 좀 다른데. 도로스는 골몰했다. 알 듯 모를 듯한 애매한 기분은 마치 간을 보는 듯 그의 머릿속을 희롱했다.
그러나 한참을 생각해봐도 도저히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랐다. 그나마 조금 더 근접한 설명이라면 불안감과 달성감? 안도? 행복? 뭐 그런 것들.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느낌이 심장소리에 맞춰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으음.. 이건 잘 모르겠네요. 왠지 둘 다 맞는 길 같은데..."
도로스는 말을 흐렸다. 나갈 수 있다는 말에 둘의 눈이 순식간에 그에게 쏠렸다. 갑자기 몰린 시선에 당황하면서도 도로스는 그가 느낀점을 최대한 상세히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화한다는 건 그의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모든 걸 전달하기 위해선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음.."
카지트는 나지막히 침음성을 내뱉으며 골몰했다. 그거, 예전에 들어 본 적 있는데. 항상 필요할 때엔 안 떠오르고 필요없을 때에만 갑자기 떠오르더라. 살쾡이는 투덜댔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무튼 좋지않은 것이란 사실 하나만은 확실하게 떠올랐다.
카지트의 대답을 들은 자동인형과 방독면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지금 상황도 그리 좋진 않건만 여기서 더 나빠질 수가 있다니.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으앗!"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침묵 중인 귀뚜라미를 툭 건드렸다. 육신은 이곳에 둔 채 아득히 머나먼 세계에서 사색을 즐기던 그의 정신은 생각치도 못했던 육체의 자극에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곤 빠르게 육신으로 돌아왔다.
얌전한 평소의 태도완 달리 짧고 굵은 비명이었던지라 오히려 건드린 이가 깜짝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자네, 괜찮은가?"
"아..예,예! 괜찮,습니다. 조금 생각 중이,어서...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프로바움은 큼큼 헛기침을 하곤 자세하게 설명했다.
"도로스가 무언가를 느꼈네. 긴장감과 안도감같은 상반되는 감정이라는데, 혹시 뭔가 짐작가는 게 있나?"
닥터 윌슨은 도로스 쪽을 쳐다봤다. 도로스는 카지트와 머리를 맞대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길잡이 끼리의 감각적인 대화엔 이성과 합리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보였다. 애초에 길잡이는 숫자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개체마다의 차이도 심한 편이라 그다지 제대로 연구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학문적 접근을 선호하는 그에게 길잡이가 느낀 기분 (혹은 감정)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해한 일이었다.
그는 역시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자동인형 또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자네는 뭘 그리 깊게 생각하는가?"
"오즈,라는 이름,에 대해 조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즈라..닥터 윌슨은 곰곰히 고민했다. 대체 누구의 이름이란 말인가? 그것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걸 고려한다면 분명 예삿 인물이 아닐 것이다. 700년 전의 인물. 그러나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자. 그렇게 큰 조각상까지 세울 정도면 인지도가 있다는 건데. 그러나 700년 이전의 역사가 으레 그렇듯 그의 이름 또한 역사에서 족적이 지워져 있었다.
"프로바움, 오,즈란 이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프로바움은 고개를 저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 그이지만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없다네. 애초에 700년 전의 인물이 누군지 아는 수가 없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닥터 윌슨은 말을 흐렸다. 카지트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씩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도로스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대화에 참여했다.
"저기..이런 유적들은 온전히 남아있는데 기록이나 그런 건 없나요?"
"현재까진 거의 없다네. 크고 작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지."
"예? 대체 어떤 전쟁이었길래.."
"흠, 700년 간 셀 수,도 없이 많아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못해,도 수 십 번은 족히 넘을 겁,니다. 그나,마 그 중 가장 최근,이라고 한다면 십 년,전의 남부 쿠데타 겠,군요."
"정말 빌어먹게도, 크흠 실례. 하필이면 나도 그 때 참전했었지. 정말 최악의 선택이였네."
프로바움은 옛 기억에 빠져 눈을 감았다. 가끔 으음, 혹은 크으, 하는 신음을 흘리는 걸 보니 그다지 바람직한 기억은 아닌 듯 했다. 멋지게 양 끝으로 올라간 적갈색 카이저 수염이 부들부들 흔들렸다.
닥터 윌슨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사실 남부,니 북부니 나뉜 것도 고작 수 십년 전의 일입,니다. 바로 그 전,까진 모두 함께 치고박고 싸웠었,습니다. 그게 몇 백,년 씩이나 되어,버리니. 옛 인물,의 이름같은 게 남아있,겠습니까?"
자동인형은 닥터 윌슨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또다시 머나먼 세월의 흐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땐 어쨌느니 하며 추억을 곱씩는 그에게서 둘은 한 걸음 떨어졌다. 카지트는 닥터 윌슨의 말을 듣는 듯 했으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딴청을 부렸다.
도로스의 역사 선생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전,쟁에 전쟁을 거치,는 동안 700년 이전,의 자료,들은 전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이,후의 역사도 사라,진 부분이 군데,군데 있습니다만 700년 부근,의 자료 훼손이 제일 심합,니다."
"그리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700년 전의 유적은 우리의 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인 것 같네."
"예? 그게 무슨.."
"주위를 둘러보게나. 이곳엔 톱니바퀴와 증기기관이 없잖은가? 있는 것이라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일세. 가령 이런 크리스탈이라던가 말일세."
그는 도로스가 발견했던 공예품과 같은 것을 주머니에서 꺼내 흔들었다. 투명한 직사각형 모양의 수정이 노란 불빛을 받고 아름답게 빛났다. 자동인형과 귀뚜라미는 또다시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들어본 적 없는 단어와 고급스런 어휘들의 폭풍에 그는 진저리를 치며 빠져나왔다.
어찌어찌 반 정도는 간신히 이해했지만 나머지 반은 그대로 놓쳤다. 그래도 도로스는 나머지 반을 자기나름대로의 결론으로 메꿨다. 700년 전은 아예 모른다는 소리구나. 그는 알아들었단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학생입니다. 귀뚜라미의 칭찬에 도로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하다가 이내 픽 하고 웃었다.
어찌보면 우습기도 했다. 피범벅에 금방이라도 돌연변이들이 굴을 파고 나올 듯한 옛 유적에서 한가로이 역사 수업이라니. 처음엔 기괴하고 음산했던 복도도 지금에 와선 그저 신발이 좀 더러워질 것 같은 느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차갑게 보였던 라이트의 불빛도 약간은 따뜻하게 느껴지는 듯 하고.
그는 자기가 느꼈던 감각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그의 스승 또한 모르겠다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프로바움과 토론에 들어갔다.
그가 그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을 때, 카지트가 갑자기 버럭 소릴 질렀다.
"아! 아아아!! 이봐 다들! 생각났다. 도로스, 네가 느꼈다는 게 뭔지 생각났다고!"
두 팔을 허공에 내저으며 파닥거리는 모습에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으나 심각한 얼굴로 도로스의 두 어깨를 잡는 모습에 일행은 보통 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