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2.유적
조각상과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을 무렵, 무언가를 발견한 카지트가 조각상 주변을 가리켰다. 일행은 천천히 그가 가리킨 곳을 응시하다, 숨을 삼켰다.
"저건..대체.."
도로스는 거대한 충격에 말을 흐렸다. 다른 일행 또한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흔적들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조각상 근처에는 손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뼈들이 탑을 쌓다 못해 굴러다니고 있었다. 조명의 빛을 받아 누렇게 빛나는 해골들이 텅 빈 눈으로 700년 만의 침입자들을 응시했다. 못해도 수십은 넘는 뼈들은 조각상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그 주위를 뱅 두르고 있었다.
도로스들은 눈 앞의 광경에 욕지기와 생리적 혐오감이 치솟는 걸 느꼈다. 어째서 저들은 이렇게 죽어있는가? 누가 저들을 죽였는가? 수많은 의문이 일행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카지트는 예리하게 날 선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섣불리 다가갈 엄두가 서지 않았다. 광기에 찬 예술가가 죽기 전에 남긴 유산처럼 기이한 역겨움이 담긴 조형물들. 정체모를 원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아 일행은 도저히 그 앞에 설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시라도 입을 연다면 잠든 해골들이 깨어나 그들을 덮칠 것만 같았다. 꿀꺽. 일행 중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공동 안에 귀곡성처럼 맴돌았다.
"..갑..시다.."
어두운 정적을 뚫고 나온 소리에 일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봤다. 닥터 윌슨. 귀뚜라미 계통의 수인은 굳게 입을 다물고 앞으로 나갔다. 오로지 더듬이만이 불안한 듯 자꾸 꼼지락 댔다.
한 걸음 씩 뼈 무더기와 가까워질 때마다 그는 걸음을 잠깐 멈추었지만 이내 다시 발을 놀렸다. 남은 셋은 그가 뼈 무더기와 가까워지는 광경을 망연스레 쳐다봤다. 학자의 탐구욕때문일까? 아님 그와 다른 무언가? 그들은 어째서 동료가 저렇게 다가갈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
뼈무더기에 다가가 손가락을 가져다 댄 그는 이미 반쯤 헐떡이고 있었다. 테두리가 되어 조각상을 빙 둘러쌓은 뼈들은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의 키 반만큼이나 쌓여있었다. 그는 천천히 해골을 쓰다듬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 마법이 풀린 것처럼 뒤에 남은 셋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 뼈들은 대체.."
"'인간'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쩐지 울음기가 묻어다고 도로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인 터라 그는 곧 방금 생각했던 것을 잊어버렸다.
"인..간?!"
다른 일행 또한 그 내용에 놀라고는 닥터 윌슨의 입에 집중했다. 다닥다닥 쌓인 뼈가 꽤 무섭긴 했으나, 닥터 윌슨이 몸소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뼈라는 걸 보여준 탓에 무서움이 조금 덜 했다. 그래도 직접 만지기는 조금 뭐한 듯 카지트는 조금 거리를 두었다.
"네, 인간,의 것인 듯 ,합니다. 현존,하는 동물계통의 수인,이나 곤충,계통의 수인과는 뼈 구조,와 외형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보지 못한 종족이,라면 '인간' 밖에 없,으니 이게 그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혹여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종족일 가능성은?"
자동인형의 질문에 귀뚜라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이 정도,의 숫자라면 이야기,가 되지 않은 쪽이 이상,할 정도 입니다. 전설,의 동물이라는 소문,이나마 있는 '인간'이라는 쪽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또 그렇군."
흠, 하고 프로바움과 닥터 윌슨은 나머지 일행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태연히 나누었다. 도로스와 카지트는 이야기 듣는 것을 반쯤 포기하곤 이것이 '인간'의 뼈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었다.
"으음, 조금 다르긴 하군."
카지트는 자신의 귀와 꼬리를 만져보며 말했다. 사실 뼈들은 아무런 구별없이 아무렇게나 쌓아져 있었기에, 해골을 제외하곤 전혀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다.
도로스 또한 방독면 위로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면서 해골과 어느정도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누나를 제외하곤 자신과 같은 종족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그에게 이 광경은 조금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상실감? 씁쓸함?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기분은 그저 꿀꿀함을 넘어 우울하기까지 했다.
애초에 종족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는 했지만 살아있는 동족이 있었다면 누나의 병에 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뼈에 대해 토론하던 닥터 윌슨과 프로바움은 일행을 이끌고 조각상 앞에 섰다. 뼈 무덤 위를 지나가야 했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죽은 뼈라는 걸 확인한 이상 두려움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았다.
조각상은 근처에서 보니 그 크기가 더 컸다. 거의 직경이 3m 쯤 되는 공이 위로 갈수록 얇아지는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받침대의 땅과 연결된 아래부분은 카지트 둘이 껴안아야 할 정도로 두꺼웠으나 공을 받치는 바로 아래부분은 한 손으로 감쌀 정도로 얇았다. 구는 뭔지 모를 재질로 만들어져 투명한 듯 하면서도 거울처럼 일행의 얼굴을 비췄다.
무언가 특별한 게 있는지 구체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일행은 그것 외에 주목할 만한 점을 찾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뭔가 글씨가 써 있는데? 어디 보자."
두꺼운 밑둥엔 무언가 글씨가 음각으로 쓰여져 있었다. 카지트는 글씨를 읽어보려고 애를 썼으나 현대의 언어완 비슷하면서도 다른 언어인 터라 읽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이건..고대,어입니다."
닥터 윌슨은 음각된 글씨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고대어? 읽을 수 있어?"
닥터 윌슨은 고개를 끄덕이곤 글씨 앞에 주저앉았다. 글씨와 수첩을 번갈아 보면서 무언가를 휘갈기던 그는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번역은 10분도 안되는 시간에 끝났는데, 쓰여져 있는 글이 단문인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고대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행에게 번역문이 적힌 수첩을 내밀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일행은 번역문을 소리내어 읽었다.
"위대한 지도자, Oz를 위하여?"
"오즈? 그게 뭐지?"
번역문을 봐도 모르는 소리 투성이였다. 오즈? 들어본 적 없는 단어에 도로스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닥터 윌슨 또한 모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누군,가의 이름으로 추정,됩니다만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조차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일행 중에 없었다. 카지트는 반색하며 외쳤다.
"그럼 이거, 우리가 최초 발견자라는 거 아냐?!"
최초 발견자라는 단어는 마법처럼 지쳐있던 일행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조금 축 쳐져있던 닥터 윌슨마저 방긋 웃음을 지었다. 곤충의 신기한 표정변화를 도로스는 몰래 힐끗거렸다. 오로지 프로바움만이 파이프담배를 피며 눈을 감고조용히 사색에 잠겨있었는데, 그는 방방 뛰어다니며 온 몸으로 기쁨을 표시하는 카지트에게 툭 내뱉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옮길건가?"
일행은 침묵했다. 카지트는 팔을 벌리고 뛰던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생각하던 그는 대안을 내놓았다.
"음..그..그래! 그냥 저 글씨만 파갈까?"
"그럼 저 구체는 무너지겠군."
"그럼 구체를 가져가는 건.."
"저런 크기를 가지고 갈 자신은 있나? 보아하니 무게도 꽤 나갈 것처럼 보이네만."
프로바움의 날카로운 반박에 카지트는 기가 팍 죽었다. 이쯤되면 사실상 무리라는 걸 그 또한 깨달았다. 보아하니 저 구체가 오즈인지 뭔지와 관련있는 것 같은데, 글씨만 파낸다면 구체가 무너져서 깨질 것 같고, 구체를 옮기자니 불가능했다. 나가기 위해선 돌연변이의 파도를 뚫어야 할 텐데. 짐을 버리고 전력으로 달려도 모자랄 판에 저런 족쇄를 달고 나갔다간 객사하기 쉽상이었다.
그는 빼액 성질을 냈다.
"아오! 그럼 어쩌라는 거야!! 저걸 여기 두고 가자고? 최초 발견이니 엄청 비쌀텐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말로 저걸 가져갈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투와 생존에 관해선 그만큼 약삭빠르고 똑똑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프로바움 또한 그게 그저 투정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참을 날뛰던 그는 제풀에 지쳐 잠잠해 졌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그냥 다른데 둘러보고 쓸어담아야지."
그는 나잇값 못하고 꼬맹이처럼 틱틱 거렸다.
할 수 없이 도로스들은 주위를 샅샅이 살핀 결과, 몇 개의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둥 사이에 층층이 쌓인 높은 테라스로 가느 길. 대부분은 노후화와 붕괴 때문에 막혔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그 중 넷 뿐이었다.
거액을 눈 앞에 두고 물러난 일행은 김빠진 태도로 한 군데 씩 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