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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 〉2.유적 (22/100)



〈 22화 〉2.유적

뚜벅뚜벅.



발소리가 잠든 침묵을 깨고 울려퍼졌다. 도로스 일행은 기계적으로 앞과 뒤를 경계하며 발을 놀렸다. 만연한 어둠과 죽어버린 정적. 좁은 직사각형의 강철 통로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뱃속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치 미궁에 발을 들인 것 같다. 도로스는 생각했다. 일행이 가진 불빛은 밝았으나 통로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기엔  없이 부족했다. 일정한 영역 밖에서 칠흑빛 어둠이 빛을 게걸스레 살라먹고 그들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씩 나오는 방들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걸어갈 의지 조차 잃어버렸을 것이다.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반복적인 풍경은 어떤 상념이든지 지워버리는 기이한 힘을 품고 있었다. 일행은 두런두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이런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긴 했지만 이런 곳이기에 대화를 나누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같았다.

"대체  건물은 무슨 용도로 지은 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크기,나 규모로 봐선 단순,한 공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복합,적인 다용도 건,물은 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아까 발견했던 방들도 거주지 같은 느낌이었죠. 사람은 없었지만."

도로스는 오는 도중 발견했던 몇 개의 방들을 떠올렸다. 처음 떨어졌던 방과 비슷한 넓이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과는 달리 제대로  가구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다만 그곳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뼈나 흔적등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 최고의 두뇌를 가진 닥터 윌슨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선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지 못했다.


그나마 700년 동안 쓰여진 적 없던 가구들은 신기하게도 제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서 덕분에 일행은 잠시 찝찝함을 잊고 오랫만의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더란다.


그 밖에도 그나마 외관이 멀쩡해 보이는 유물들도 몇  있어서 이대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일행의 주머니는 꽤 풍족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나갈 수  있다면.

통로는 그들이 걸어온 시간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시간이 더 많아 보였다. 애초에 끝이라곤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일행은 계속 나아갔다. 수 십 분. 수 시간. 혹은  이상. 길은 간간히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꺾였으며 중간중간 비슷한 방들이 계속 나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탐사가 계속되어 주머니가 유물로 두둑해질 때마다 일행은 정신은 초췌해져 갔다. 종국엔 끝모를 학구열로 불타던 닥터 윌슨의 열의 마저 식어버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젠장, 차라리 쌈박질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군. 이거 진짜 못해먹겠는데."



카지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명확,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도로스는 닥터 윌슨의 고급 어휘를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지칠대로 지친 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조차 귀찮아 했다.

"목표가 있다 해도 시작점조차 모르니 계속 나아가는  외엔 방도가 없다네. 곤란할 따름이지."




프로바움또한 지친 목소리로 나즈막히 대답했다. 도로스는 카지트의 말에 동의했다. 이건 차라리 싸우는 게  나을 판이었다. 전투는 최소한 끝이라도 나지, 걷고 있는 미궁은 끝 조차 없는 것 같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시여, 제발 좀  거지같은 미로에서 나가게 해주십시오!"



카지트는 아예 정신을 놓은  두 팔을 벌리고 큰 소리로 기계장치의 신에게 기도했다. 벌린 팔이 얼굴을 스칠  해 도로스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웅웅 하고 카지트의 기도가 통로 안에 메아리 쳤다. 돌연변이를 경계해야하는 판에 불러들이는 짓을 하고 있으니, 자동인형이 호통을 쳤다.



"이 정신나간 고양이녀석!"


"뭐? 고양이? 난 살쾡이라고,  고물아!"



둘은 이내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카지트야 그러려니 했지만 그 점잖던 프로바움 마저 카지트의 페이스에 휘말리니 말다툼하는 어린애처럼 빼액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남은 둘은 잠깐 놀라는 눈으로 자동인형을 보곤 주위에 집중했다. 다행히 주위엔 아무도 없는지 이런 소란에도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서로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 저기 뭔가 보이는데요?"

한동안 갓난아기들 마냥 뀨뀨꺄꺄 시끄럽던 말다툼은 도로스의 말에 마치 시간을 멈춘 것처럼 뚝 끊겼다. 그 찰나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말을 꺼낸 도로스가 당황해서 뒤돌아  정도였다.




짙은 암흑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조금  진한, 혹은 옅은 어두움이 보였다. 불빛 덕에 그 어두움의 밀도차가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에 일행은 도로스의 말처럼 그들의 앞에 무언가가 있음을 짐작했다.



그들은 도로스가 당황하던 말던 다시 신중한 태도로 앞으로 전진했다.


"이건..계단이잖아?"

"그것도 위와 아래쪽으로 나뉘는군."



신기하게 생긴 계단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옆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란히 설치 되어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엔 빨간색 혹은 적갈색인 고무 비슷한 재질로 마감되어 있었다. 손잡이의 아랫부분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던 듯 군데군데 깨져나간 유리 파편이 보였다.


계단 또한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 계단 하나 하나 조그마한 판자를 삐뚤빼뚤 모아 맞춘 듯한 톱니바퀴 자국이 나 있었다. 검은 계단을 감싸고 있는 노란 테두리가 불빛에 반사되서 기이하게 빛났다.




"어느,쪽으로  겁,니까?"

글쎄, 잘 모르겠군. 프로바움은 말하며 카지트를 응시했다. 길을 모를 땐 리더에게 맡겨야지. 일행은 카지트에게 부담을 꾹꾹 눌러담았다. 그는 대충 손을 몇 번 내젓고는 냄새를 맡고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등 애를 썼다. 그러나 애초에 공기의 유동조차 활발하지 않은 밀폐된 공간인 터라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젠장, 여기도 애매하네."

한동안 머리를 끙끙 싸매던 그는 반쯤 자포자기한 태도로 이내 위를 가리켰다.


"위로 가자. 위에 가면 출구 비슷한 거라도 보이겠지."



하긴 계속 밑으로만 내려온 느낌이라 위로 가보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애초에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 위나 아래나 별 차이 없기도 하고.



일행은 카지트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계단은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미칠 정도로 길어서 일행은 대체 제대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의아해 할 정도였다. 아니, 사실 그렇게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움직이는 거북이같은 발걸음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거기에 가파르기도 해서 자칫하다간 굴러떨어질  같은 느낌이었다. 자연히 손잡이를 잡은 일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끼이익.

안정성이란 단어 따윈 돌연변이가 물어간 듯 한 걸음씩 내딛일 때마다 들리는 녹슨 쇠들의 비명이 도로스들의 귀를 때렸다. 으으, 신음소리가 그의 입을 비집고 나왔다.


잠잠한 '감'에 따르면 굳이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이란 건데 믿어도 되는 건가? 그는 한 순간이라도 빨리 다시 땅 위에 발을 딛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사람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상황은 도로스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니, 비단 도로스 뿐만이 아니였다. 일행 전체가 패닉과 생존본능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계단이 술마신 사람처럼 작게 휘청했다. 이성없는 동족의 비명에 프로바움은 연신 파이프와 몸으로 연기와 증기를 뿜어댔다. 일행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간 말의 무게 때문에 계단이 주저앉아버릴 거라는 말도안되는 생각조차 들었다.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 이곳에서 떨어진다면 저 아래, 그들이 계단을 지나가기 전에 올라왔던 곳으로 추락할 게 뻔히 보였다.

끼이익.


계단이 또다시 흔들렸다. 일행은 반쯤 엎드리다 시피 몸을 낮추었다. 닥터 윌슨에 이르러서는 반쯤 울고 있었다. 끼륵끼륵 같은 특이한 소리였지만 호흡곤란이 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던 도로스는 그런 것에 신경쓸 새가 없었다.


끼이익.



또다시 계단이 좌로, 우로, 아래로 흔들렸다. 도로스들은 이미 완전히 엎드린 자세로 앞으로 기어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상관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최대한 조심스럽게, 최대한 이상한 계단이 흔들리지 않게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광경이 보였다. 일행은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쯤 정신을 놓아버렸다.

"젠장. 위는 막혔군."


허탈한 듯,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카지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계단은 연결이 끊어진 채 허공에 우뚝 서 있었다. 저러니 흔들거릴만도 하지. 도로스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정신적인 피로감에 방독면에 달린 고글을 쓸어내렸다. 프로바움은 또다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4'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내용이 대강 짐작이 갔다.




닥터 윌슨은 외모에 맞지않게 벌벌 떨면서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어떻,게 내려갑,니까."



도로스는  앞이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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