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2.유적 (21/100)



〈 21화 〉2.유적

"으으.."


도로스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등부터 떨어진 덕분에 다른 곳은 멀쩡했지만 등이 시큰 거렸다. 그는 움켜쥐고 있던 페퍼박스를 옆에 뉘어놓고 일어섰다. 다행히 가슴께에 달린 라이트는 별다른 파손없이 무사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색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커다란 방. 다행스럽게도 한 곳에 문이 달여 있었다. 일행은 그가 누워있던 곳 근처에 쓰러져있었다. 애초에 떨어진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서 별다른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카지트지. 그는 찝찝한 얼굴로 처참한 상태의 카지트를 봤다. 카지트 또한 떨어진 그멍 근처에 누워있었는데 구멍 너머로 밀려든 토사에 허리 아래가 파묻혀 있었다. 코를 골며 자는 것을 보니 문제는 없는 것 같다만.



닥터 윌슨과 프로바움 또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본 그들은 하나 같이 찝찝함이 섞인 묘한 표정으로 카지트를 바라보다 고갤 돌렸다. 저런 상황에서도 태평하게 코를 골고있는 모습에 기가 차는 것이다.

"아무튼, 일단 살긴  것 같군 그래."



"위험,했습니다. 하,필  때 천장,이 무너질 줄,은"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에 카지트 또한 일어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아암. 잘 잤ㄷ..어?  잠깐, 이거  이래?"

카지트는 흙더미에 삼켜진 하반신을 보고 기절할 듯 놀라며 용을 썼다. 그러나 제 아무리 힘이 강한 수인이라도 불안정한 자세에서 힘을 낼 수는 없는 법. 토사는 먹이를 문 악어처럼 카지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야야!  좀 도와줘! 이거 안 빠진다구!"

그러나 프로바움은 들은 척도 하지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카지트의 존재를 무시하며 닥터 윌슨레게 말을 걸었다.

"꽤나 넓은 곳이군. 그렇지않나 닥터?"

귀뚜라미는 힐끗 카지트를 곁눈질했다.

"예, 그렇,습니다. 게다,가 상태보존도 제,법  되어 있,습니다. 아쉽,게도 유물은 없,지만."




방은 닥터 윌슨과 프로바움이 묵었던 여관의 방보다 수십배는 컸다. 바닥엔 700년 세월의 먼지가 두껍게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고 도로스가 뚫어놓은 천장을 제외하면 어디 금간데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러나 가구가 하나도 없어 살풍경 해 보였다.


"어이! 다들! 무시하지 말고 좀 도와달라고!"


"저 쪽에 문이 있으니 거기로 나가면 되겠군."


"영감! 닥터 윌슨! 도로ㅅ?!"

프로바움은 주위를 둘러보는 척 카지트의 근처로 접근해 그를 가볍게 발로 찼다. 그리고는 태연한 어조로 그를 놀렸다.



"아니, 자네 지금 거기서 뭐 하는가?"


"영감, 자꾸 그럴래?"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빨리 일어나게. 반신욕같은 걸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니."




혼자서 잘도 자더군. 프로바움은 이죽였다.

"그리 칭찬해도 나오는 건 없다고."



살쾡이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번엔 프로바움이 얼굴을 구겼다. 여차저차 카지트를 흙더미에서 꺼낸 일행은 - 깊숙히 묻힌 탓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가만히 천장에 귀를 귀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으며 동굴을 뒤흔들던 진동 또한 없었다. 녀석은 물러간 듯 했다.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전투와 노동으로 쌓인 피로도 상당했고 유일한 출구인 문 밖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버킷 리스트 목록 하난 채웠군."


무기를 손질하던 프로바움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작아서 곁에 있던 도로스만이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버킷 리스트? 양동이에 이름표 따위를 붙이는 건가? 그런데 그런 단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걸까. 도로스는 뜻모를 도시의 언어에 당황했다.

"예?"



"예전부터 저녀석 얼굴을 걷어차주고 싶었다오."


이 일행, 정말 괜찮은 걸까. 그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프로바움과 카지트를 번갈아 봤다. 자동인형은 애초에 대답 따위 바라지 않았다는  다시 무기 손질에 열중했다. 요컨대 걷어차고 싶은 놈을 걷어차는  버킷 리스트라는 거군. 도로스가 이해한 내용을 나중에 써먹어 보기로 하며 보우건을 늘어놨다.



대형 크로스보우는 산성침에 녹아버린 터라 그에게 남은 무기는 보우건 2정과 숏소드 뿐. 남은 보우건 마저도 볼트 대부분을 소비해버려 남은 볼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탄창 1개도 채 되지 못한다니. 그는 쯧 혀를 찼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꽤나 큰 손실이었다.


프로바움 쪽도 비슷한 상황인 듯 투덜거리는 소리가 슬며시 들려왔다. 중간중간에 4라는 단어가 나오는  보면 불평하고 있는 듯 했다. 구리 철사를 엮어 만든 솔로 페퍼박스의 총열을 닦는 건 조금 신기했지만 그 뿐.


카지트는 고양이과 답게 털에 붙은 먼지와 흙덩이를 털어내고 있었다.     모든 신경을 집중한 모습에선 왠지모를 귀기마저 어린 것 같아 그는 고개를 돌렸다.



유일하게 닥터 윌슨만이 쉬지 않고 방의 내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바닥과 벽, 그리고 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닥터 윌슨, 뭐 하세요?"




" 건축 양,식과 기법 등을 보,고 있습,니다. 딱히 건,질  없는 것 같,습니다."


건질 게 없다는  치곤 그는 꼼꼼히 이곳저곳을 살폈다. 도로스의 눈에 다 같은 회색 벽이지만 그의 눈엔 무언가 다른  보이는지 가끔 가다 두들겨보거나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나마 금속 재질의 쌍미닫이 문엔 기묘한 선 몇개가 그려져 있었지만 의미없는 문양처럼 보였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문 앞에 섰다. 문은 도로스의 기준에선 평범했지만 카지트의 기준에선 작은 편이라,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있을 것 같았다. 일행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눈빛을 교환했다. 문 너머에 공간이 있다는 건 소리로 이미 확인했다. 남은 건 직접 확인하는 것 뿐.




카지트는 쌍미닫이문 사이에 손톱을 넣어서 벌리기 시작했다. 손톱이 아프다고 그는 우는 소리를 했다.




"으,으핫!"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도드라졌다. 그가 젖먹던 힘까지 짜내자,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기긱. 녹슨 쇳소리가 어두운 공간 내부에 울려퍼졌다. 일행은 라이트의 불빛을 사방으로 비추는 한 편, 언제든지 무기를 쓸 수 있도록 준비했다.

꿀꺽. 도로스는 침을 삼켰다. 전투 상태에 돌입한 머리엔 긴장감과 약간의 흥분감이 돌아다녔다. 한 사람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기자 그는 재빨리 뛰쳐나가 문의 왼편에 바싹 붙어서 무릎을 꿇었다. 싸늘하면서도 눅눅한 공기가 필터 너머로 아릿하게 느껴졌다. 그의 보우건은 이미 전방을 겨누고 있었다.

문 밖은 파이프를 연상케 하는 통로였다. 바깥의 파이프와 다른 점은 사각형의 통로라는 점일까. 덕분에 왼쪽과 오른쪽만을 방어하면 될 것 같아 도로스는 조금 안심했다. 뻥 뚫린 사방이었다면 돌연변이들을 상대하는데 애 먹을 게 뻔히 보였다.



문의 오른편엔 닥터 윌슨이 그와 비슷한 자세로 앉아 반대쪽을 겨누고 있었다. 카지트와 프로바움이 잇따라 나왔다. 그들은 한동안 모든 감각을 이용해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인데."



카지트는 무심코 말을 내뱉곤 입을 막았다. 일행은 그에게 눈총을 주고 다시 앞과 뒤를 경계했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설사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곳도 도로스 둘이 지나갈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라 방어하기엔 용이했다. 물론 탄환이 충분하다는 가정하에서.

카지트는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주위에 집중했다. 그러나 공기의 유동따윈 없었다. 어느쪽으로 가던 밖과 이어져 있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행에게 이 사실을 속삭였다.



"아직 갇힌 신세라는 거군. 일단은 움직이도록 합세.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순 없잖은가?"



웅얼거리듯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700년의 세월 아래에 잠든 통로에선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기이한 적막. 소리라는 개념을 배제한 듯 그들을 제외한 주위에선 어떠한 작은 소리마저 들리지않았다. 시커먼 어둠과 소름끼치는 침묵. 일행은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아 각자 한 마디씩 속삭였다.




"어디로 가야 할 까요."



"글쎄,  모르겠는데. 단서나 그런 것도 없으니 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방향을 정하는 대화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자 일행의 눈은 자연스레 리더인 카지트에게 모였다. 그의 감 또한 아무런 반응없는지라 카지트는 곤란하다는  도로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로스의 감 또한 침묵한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젠장, 될대로 되라지."


그는 반쯤 체념한 어조로  방향을 가리켰다. 처음에 도로스가 경계를 섰던 문의 왼편. 라이트로 비추기엔 700년 묵은 어둠이 너무나 짙어 그 머너를  수 없었다. 긴 세월을 너머 방문한 내방자들은 그들의 리더가 가리킨 곳을 향해 움직였다.


도로스는 힐끗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시 42분. 들어온지 거의 12시간이 지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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