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2.유적
메드비크는 카디프나 바스톤에 비하면 정말로 작은 마을이었기에 일행은 곧바로 여관에 짐을 풀고 유적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유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셈이었지만 이미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주민들은 하나같이 불친절하고 배타적이었다. 덕분에 일행이 얻은 정보는 유적의 위치와 대략적인 규모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성 정보 뿐이었다. 다시말해서 그다지 도움되는 정보는 없었다.
"허, 역시 죄다 쓸모없는 정보였군 그래."
카지트는 허탈하게 말했다. 다들 정보의 정확도가 그리 높지는 않을꺼라 예상은 했었지만 그 예상과 현실의 괴리가 이 정도라면 누구든지 허탈해 하리라.
도로스들은 파이프에서 나와 거대한 공동空洞 속에 반쯤 흙더미에 파묻힌 거대한 건물을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맹세컨대 이런 거대한 건물을 마주하는 건 그의 길지않은 인생에서도 처음이었다. 땅 위로 불쑥 고개를 내민 건물의 윗부분만 해도 대형 파이프의 지름보다 훨씬 커다랬다. 그것이 건물의 한 귀퉁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건물 전체의 크기는 얼마나 될 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거대한 육면체의 귀퉁이만을 잘라 내놓은 것같은 이 건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겉은 투박한 회색빛의 석재로 둘러쌓여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석회암인가? 하지만 그건 잘 부스러 질 텐데? 탄광마을 출신인 도로스가 건물에 사용된 석재에 관심을 갖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대체..뭐로 만들어졌는지 감도 못잡겠네요."
"아,마 먼 옛,날 사용되었,던 결합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좀 특이,하군요. 이,런 거대,한 크기라,니. 대체 무엇,을 만들던 공장,일까 궁금,합니다."
닥터 윌슨도 도로스의 곁에서 연신 유적에 대해 감탄을 터뜨렸다.
"공장..인가요? 그걸 어떻게 알죠?"
"간단,합니다. 일단 서부,는 먼 옛날,부터 공장,지대로 유명,하죠. 그,리고 저 건물 좀 보,십시오. 외벽,이 단조롭지,않습니까? 동부,에도 저것,과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건물,이 몇 채 있긴,합니다만 보,통 외벽,을 페인트 등,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즉, 저건 주거,용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저 크기는...꽤 놀,라울 정도,입니다. 무언,가 거대한 걸 만,들거나 각,종 부속품,을 만들어 하나,로 합치던 공장,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군요. 정말 흥미,롭습니다!"
닥터 윌슨의 말이 뒤로 갈수록 빨라져 도로스는 이해를 포기하곤 그냥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음, 맞습니다. 정말 흥미롭네요. 무미건조한 응답에도 닥터 윌슨은 별로 개의치않는 듯 했다. 정확히 말해선 유적에 한 눈 팔려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겹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여 도로스는 눈을 문질렀다. 뭔가 이상한 걸 본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뜨고 닥터 윌슨을 봤지만 겹눈은 반짝이지 않았다.
일행은 유적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적에 가까워질 수록 밑도 끝도 없이 커지는 건물에 도로스는 자연스레 압도되었다. 정말로 저런데 들어가는 건가. 괜시리 목이 탔다.
유적 앞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다들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조직이나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같았다. 두 패로 나뉜 그들 중 한 무리는 유적의 입구-로 생각되는 구멍- 앞에 천막을 쳐 놓고 한 무더기의 무언가를 분류하고 있었는데 크기와 모양새로 보아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들인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무리는 무장한 채 유적의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행을 발견한 듯 싶었지만 섣불리 다가오지않고 관찰하듯 일행 쪽으로 시선만 던지고 있었다.
"카지트, 저 사람들은?"
"유적발굴단이야. 아마 에메랄드 컴퍼니 쪽 사람들일 걸."
일행이 유적 입구쪽으로 다가가자 유물을 분류하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카지트의 예상대로 자신들을 에메랄드 컴퍼니 산하 유물발굴대라고 소개한 이는 군청색 털을 가진 늑대계통의 수인이었다.
"처음뵙겠습니다. 전 발굴대를 인솔하고 있는 제롬이라고 합니다만, 이곳을 방문하신 목적이..?"
"에메랄드 컴퍼니의 유물 발굴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안그래도 손이 부족하던 참이었습니다."
유물 발굴 위해 왔다는 말에 그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웃었다. 카지트는 그와 반대로 뭐 씹은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잠깐 무언가를 생각한 후 물었다.
"이번 일에 동원된 용병들 숫자가 꽤 될 텐데요? 아직 손이 부족하단 소리는 대ㅊ.."
끄아아악!
그 때 였다. 커다란 비명이 유적 입구에서 솟아났다. 몇 초간 이어진 비명은 금방 수그러 들더니 곧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일행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입구와 발굴대 대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 유적 밖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이들이 입구 쪽으로 모여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일행은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했다. 뭔가 이상하다. 도로스의 감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도로스들과 제롬은 얼굴을 굳힌 채 입구를 노려봤다. 그들 중 가장 예민한 이는 유적 안에서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타다닥! 타다닥!
한참을 그렇게 응시하자, 입구에 걸린 램프 너머로 조금씩 그 '누군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용병이다! 용병이 되돌아오고 있어!"
입구에 무리지어 서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외쳤다. 곧이어, 피에 절은 고양이과 수인 하나가 밖으로 달려나와 철푸덕 쓰러졌다. 무기고 뭐고 다 버리고 달려온 듯 옷을 제외하곤 아무런 장비도 없었다. 피에 절은 털은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더렵혀져 있었고 몸 구석구석에선 피가 끊임없이 샘솟았다. 두 팔 중 하나는 잘려나간 듯 휑했으며 다른 하나도 이상한 각도로 꺾인 게 성치 못해 보였다. 이에 대한 일행과 발굴대의 차이는 극명히 갈렸다. 일행은 땅에 널부러진 채 죽어가는 수인에게 시선을 집중했지만, 발굴대는 죽어가는 수인을 무시한 채 계속 유적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마치 아직 나올 게 남았다는 것처럼.
일행 또한 그 차이를 깨닫고 시선을 재빨리 유적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유적 안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발포 개시!"
탕! 타타타타탕!
퉁퉁퉁퉁!
각종 무기가 매섭게 피안개를 피워 올렸다. 고막을 뒤흔드는 총성과 화연이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수 십초 가량 이어지던 포화는 사격 중지 명령과 함께 그쳤다. 그리고 일행은 그제서야 안에서 튀어나온 게 뭔지 볼 수 있었다.
"흠, 저건..돌연변이로군."
"그것도 숫자만 셋이네."
프로바움과 카지트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개의 몸에 얼굴에 촉수를 단 돌연변이 셋이 걸레 쪼가리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발굴단은 한동안 입구 쪽으로 무기를 조준한 채 기다린 후,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무기를 거두었다. 그중 몇몇은 바닥에 누워있는 용병에게 다가갔지만 맥을 짚어본 후 고개를 저었다. 죽었다는 표시였다.
한 차례 피바람이 분 후에야 발굴대 대장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뭐..이런 상황때문이죠. 안 쪽에 돌연변이 숫자가 꽤 되는 상황이라. 전 일단 일처리 좀 하고 있겠습니다. 상의 후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닌 듯, 아하하 하고 그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일행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손이 부족하단 소리의 의미는 일행 모두 이미 확실하게 깨달은 후 였다. 일행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이거, 생각보다 위험한데? 손이 부족하단 의미는 벌써 많이들 뒈졌다는 거 아냐?"
"카지트, 말 조심하게."
적절치 못한 단어선택에 프로바움이 적절하게 경고했다.
"아, 미안해. 영감. 근데 이번엔 진짜 위험하다고. 감이 안좋아."
넌 어때? 카지트가 도로스에게 물었다. 사실 도로스도 비슷했다. 저 안은 위험으로 가득하다고 그의 감이 알리고 있었다.
"비슷해요. 별로 좋은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도로스는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그러나 갈증은 사라지지않았다.
"그,럼 돌,아갑니까? 좀 아,쉽군요. 저런 훌,륭한 옛 시대,의 건물,을 눈 앞에 두,고 돌아가,다니."
닥터 윌슨은 입맛을 다시듯 아랫턱을 딱딱 부딪혔다. 돌아간다. 도로스는 방독면 속에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필이면 거의 다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혹시라도 다시 돌아간다면? 이곳까지 오는데 7일. 왕복 14일 정도. 근 50일 정도 되는 시간이 순식간에 30일 조금 넘는 시간으로 줄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큰 벌이가 되는 일을 고작 하루 이틀 사이에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사이 다른 방법을 찾았다 해도 그곳까지 걸리는 시간이 이번과 비슷하다면? 도로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남아있는 선택지 따윈 없었다.
"불길..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전 가겠습니다."
단단히 마음먹은 그의 눈에 일행은 갈등했다. 위험을 피하고 싶은 카지트는 돌아간다 쪽으로 기운 것 같긴 했지만, 전에 도로스와 약속한 게 있어 쉽사리 돌아가자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닥터 윌슨도 학구열에 불이 붙었는데 목숨이 대수냐는 태도로 도로스 쪽에 붙었다. 프로바움은 침묵했다. 후우, 하고 연기의 파도가 그의 입에서 솟구쳤다.
"승산이 그리 높지않아 보이네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혼자라도 갈 겁니다."
도로스의 단호한 대답에 프로바움은 혀를 찼다. 자동인형의 표정은 대부분 무표정한 상태라 읽기 힘들었다.
"쯧, 이보게 카지트. 자네, 꽤 성가신 녀석을 데려왔구만 그래. 할 수 없지. 이 바닥은 돈과 신용이 전부니. 둘 다 잃으면 죽는 것만 못하지."
도로스는 프로바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아 데우스시여! 빌어먹을!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어차피 도와주겠다고 약속도 했으니까 말야."
카지트는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머리 속으론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을 터였다. 결단을 내린 일행은 제롬을 찾아갔다. 그는 한창 죽은 용병의 처리를 하고 있었던 듯 죽은 용병의 물건을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그래봤자 목걸이 등 전부 합해서 한 주먹도 되지 않았지만.
카지트는 그에게 에메랄드 컴퍼니에서 발급한 통행증을 보여줬다. 에메랄드 컴퍼니에서 발행한 통행증이 없으면 유적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간접적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표시였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길을 비켰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모험가님들. 그럼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마치 손님을 내보내는 점원처럼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를 뒤로 한 채, 일행은 유적 안으로 진입했다.
"통행증? 그런 건 언제 받은 겁니까?"
"헤헹, 유물 의뢰가 나왔을 때 제더 놈한테서 받아놨지. 의뢰 수락만 안했을 뿐이지 필요한 건 대강 다 준비해놨다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뭐, 사실 안된다네. 의뢰용 물품만 먼저 지급받고 내빼는 것들이 가끔 있어서 말이오. 그래도 저 치는 이 바닥에서 신용도가 좀 있는 편이라서. 인성관 다르게 말이지."
"시끄러워. 자, 이제부터 유적이니까 조용히 하자고."
일행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앞으로 나아갔다. 램프와 라이트의 불빛은 곧 유적의 어둠에 잡아먹혀 천천히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