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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2.유적 (14/100)



〈 14화 〉2.유적

바스톤을 떠난지 이틀 째, 통로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대형 파이프를 떠나 곁가지처럼 얽히고 섥힌 소형 파이프는 키가 2미터 조금 넘는 카지트의 두 배 쯤 되었다. 들고 있는 랜턴과 조명이 없었다면 바로 앞에 있는 사람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암흑이 파이프 속에 너저분하게 흘렀다. 녹슨 쇠의 냄새. 콧 속을 칼로 긁어내는 듯한 폐기물들의 악취. 눈알 위를 기어다니는 듯한 오염된 공기.  모든 것들이 도로스들의 곁에서 그들이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며 부유하고 있었다.




마을을 나왔을 때와 비슷한 광경, 비슷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무언가가 달랐다. 도로스는 곰곰히 생각했다. 뭔가가 다른데. 그때는 어땠지? 마을을 나와서 카디프로 향했을 때...그 때는 엄청 긴장했었지. 뭐가 튀어나올지 알  없었으니까. 온 사방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어서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 잠깐만, 여유?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깨달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모든 생각하는 것들에게 악의적이고 적대적인 환경을 지나오면서, 도로스는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들이 두렵지 않았다. 혼자라면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내딛는 한 걸음  걸음엔 명백한 경계와 말할  없는 고독감이 묻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완 전혀 달랐다. 신뢰할 만한,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 대화를 나눌  있는 상대가 곁에 있다.  사실 하나만으로도 파이프 속에서 느꼈던 고독과 단절감의 상당수가 엷어지는 것을 느꼈다. 둘러보는 시선엔 한층 자신감과 여유로움이 붙었고, 발걸음엔 목적지에 대한 확신과 앞으로의 희망이 함께 했다.



카디프로 가는 도중엔 돌연변이들과의 연전에 그다지 느끼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동료가 있고없고의 차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도로스는 혼자서 파이프를 돌아다닌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동료가 있다는 건 좋은 거구나. 도로스는 마음깊이 놀라움에 젖은 감탄을 토해냈다. 이거라면 해볼만 했다. 발걸음은 가볍고 몸상태는 최상. 안그래도 얼마 전에 각오까지 다진 상태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바스톤에서 출발한  이틀 째지만 아직까지 돌연변이와 마주치지 않았다. 시작이 좋았다. 계속 이대로만 순조롭게 간다면 유물을 팔아서 토벌대를 조직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도로스는 토벌대를 조직해 마을로 보낼 내일을 상상했다.



"오, 좋아. 기합이 바짝 들었군 그래."


카지트가 도로스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뭐 그렇죠. 처음해보는 유물탐사니.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카지트씨 말대로 바짝 벌어야죠."


도로스는 씨익 웃었다. 웃음은 방독면에 가로막혔으나 그 웃음에 깃든 의미만큼은 카지트에게 전해진  그도 따라서 씨익 웃었다. 나머지 둘도 오는 길에 도로스의 사정은 대충 전해들은 덕분에 미소에 숨겨진 의미를 대강 알아채곤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마을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홀로 먼 도시까지 온 사내. 그런 사내는 둘로써도 싫어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래서, 기대되냐?"

"음..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지금은 모험을 즐길 시간은 없는 걸요.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싸우고 있을 테니까, 빨리 돈을 모아서 토벌대를 보내야죠."

"것 참, 성실하긴."


좀  즐기면 좋을텐데. 김샜다는 듯 카지트가 한숨처럼 내뱉자, 도로스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런 의미에서 다각열차같은 게 있으면 좀 더 빨리 갈  있을텐데."




"얌마, 그런 무서운 소리하지마라."



카지트가 질린 듯이 손사래쳤다. 도로스도 어떻게 그가 무사히 바스톤까지 왔는지 대강은 눈치채고 있었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제 왠만하면 다각열차는 타고 싶지 않았다. 인공적인 기묘한 흔들림이란 건 생각보다 꽤 기분이 나빠서, 속이 뒤흔들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닥터 윌슨도 이것저것 손을 써보았지만 그리 효과는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 치료법들이 그에게 먹히지 않는 까닭은 그가 '인간'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애,초에 다각,열차는 그 크기 때,문에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대,형파이프에서 밖에 움,직일  없습,니다. 크,기차이 때문에 도시,와 마을을 잇,는 중형, 소,형 파이프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설명은 비교적 내용이 쉬웠던 덕분에 그도 알아들을  있었다. 닥터 윌슨의 설명은 기초상식이 부족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난해한 내용과 곤충형 수인의 독특한 구강구조 덕분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카지트.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엉? 뭔데?"

"왜 굳이 소수로 팀을 짠 거죠? 머릿수가  수록 분배되는 돈이 적어진다는 건 알겠는데  다른 이유가 있나요?"

카지트는 그냥 소수가 편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제,가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어..예."


"아,시다시피 이,번 목,표는 유,적 조사,와 유물 발굴입니,다. 토벌,같은 게 아니,죠. 따,라서 굳,이 많은 인원,이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임무,에서 최악의 수,는 돌,연변이와 싸우,는 겁니,다. 최,고의 수는 돌연,변이를 피,해서 다니,는 것,이죠. 따라,서 팀이 크면 클,수록 움직임,이 느려,지는 건 필,연. 즉, 돌연변이,에게 탐,지당 할 확,률이 올라갑,니다. 그렇기,에 소수정예,로 기,동성을 살려,서 빠르게 돌,아다니는 게 낫,기 때문에 소,수로 팀을 짰,다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카지트?"


도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설명도 어려웠지만 곤충수인 특유의 끊어지는 말투 때문에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카지트 또한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다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황급히 닥터 윌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어..어엉. 맞아!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군 그래!"

역시 닥터! 카지트는 있는 힘을 다해 윌슨을 띄워줬다. 닥터 윌슨은 빙긋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대강의 내용을 파악한 도로스는 놀란 눈초리로 카지트를 쳐다봤다. 평소의 행실관 달리 착실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오오! 도로스는 박수를 짝짝 쳤다. 역시 도시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도 달라!


카지트와 오래 손을 맞춰온 프로바움만이 카지트에 대해 정확하게 궤뚫고 있었기에, 그는 파이프로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내뿜곤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다들 정신이 나갔군. 이러니까 4명은 안돼. 역시 한 명을 더 뽑는 편이 좋았을 것을.."


혼란스러운 일행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을 이해해  동료가 한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간절히 생각했다.



"프,로바움은 왜 그,렇게 4라,는 숫자,를 싫어합,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4라는 숫자와 얽힌 일에서 좋은 일은 절대 없었네."



닥터 윌슨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동인형은 무뎌진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이따금 으음, 같은 신음을 내는 걸 보면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닌 듯 했다. 한참을 끙끙 댄 후에야 적당한 예를 찾은  그는 황동빛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디보자, 그래. 난 십 년  남부전쟁에서도 참여했었소. 그 때 내가 4 용병사단에 배치 되었었는데, 그만큼 최악이었던 곳도 드물지. 적들은 다가오는데 보급은 없고 사기는 바닥이었소. 붉은 피와 녹슨 철조각들이 사방에 나뒹굴고 화연과 증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지."



씁쓸한 담배내음이 어조에 묻어났다. 그는 그 지옥같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듯  곳을 바라봤다. 도로스는 옆의 카지트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걸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카지트도 남부전쟁? 그런데 참가했었나보군. 그런데 그게 뭐지? 그는 얌전히 닥터 윌슨의 설명을 기다렸다. 지식을 가르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대개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곤 했다.


"십, 여년 전 남,부전쟁이,라..아하!  '쿠데타' 말,입니까? 덕분,에 아직,도 남,부가 국경을 폐,쇄하고 있다,는?"


도로스는 쿠데타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몰랐지만 그래도 대강의 지식은 얻을 수 있었다. 예전에 남부에서 전쟁이 있었고 지금까지 문을 걸어잠그고 있단 소리군. 그는 스스로의 이해력에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편 프로바움은 말하던 도중 뭔가를 떠올린  잠자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곤 카지트 쪽을 힐끗 바라봤다. 남부전쟁의 이야기가 나온 직후부터 카지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앞으로 걷고만 있었는데 그는 그 모습에서 폭풍전야와 같은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카지트의 사정을 어느정도 알고있는 그였기에 방금의 대화가 그의 금기를 살짝 건드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하곤 닥터 윌슨에게 이 주제에 대해 그만 이야기하자는 눈치를 줬다.

빠드득.


도로스는 카지트의 입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아마 다른 일행들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무언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카지트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 없었지만 눈에선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이글대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동료사이에도 개인사를 묻는 건 실례였음으로 일행은, 정확히 말해서 도로스와 닥터 윌슨은 카지트에게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짐작하곤 침묵했다.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자 어색한 침묵이 일행 사이를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기침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불편한 침묵 속에서 얼마를 그렇게 걸었을까, 발소리와 함께 검은색을 기조로 파란색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군데군데 문양과 디자인이 달랐지만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나 전체적인 인상은 비슷했던 덕분에 갓 도시에 상경한 도로스조차 그들이 누구인지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치안유지대로군."

"저들이 왜 돌아다니는 거죠?"


도로스는 프로바움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글쎄, 나도 모르지. 돌연변이 잡으러 왔나? 아님 순찰이겠지."

카지트는 어느새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와 재잘댔다. 그와 동시에 살얼음 위를 걷는  같던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상시의 분위기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도로스는 일행  카지트의 영향력이나 장악력이 대단하단 걸 다시금 깨달았다. 마치 방금 전의 냉막한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는 평소 그랬듯 신나게 떠들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과는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도로스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몰라 가만히 있었다.

일행이 치안유지대를 발견했듯이, 저쪽 또한 일행을 눈치채고 다가왔다. 총 8명의 수인들이었는데 개과 수인부터 코뿔소처럼 보이는 수인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걔 중 계급이 제일 높은 건 치안대를 인솔하고 있는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있는 개과 수인인 것 같았다. 일행은  손을 내밀어 보임으로서 적의가 없음을 표했다.




"수고들 하십니다~."




"용병들인가? 어디로 가는 길이지?"

"이번에 발견된 유적이 있다길래 그쪽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잠시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던 치안대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기 말이군. 새로 발굴된 곳이라 많이들 가더군. 그런데 자네, 최근에 수상한 자를  적 있는가?"




"수상한 자? 잘 모르겠는데요? 종족은, 인상착의는 어떻게 됩니까?"

막연히 수상한 자라고 한다면 그 범위가 터무니 없이 넓었다. 일행이 자세한 내용을 묻자 치안유지대 대장은 잠시 말을 골랐다. 바로 대답할 수 없는  보면 그로써도 꽤나 난감한 질문인 듯 했다.


"사실..우리도  모른다. 최근에 광신도들이 날뛰고 있어서 말이지. 아직까지 녀석들을 봤다는 목격자들이 없으니 우리들로써도 난감할 따름이군. 안그래도 돌연변이 숫자가 늘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곤란한데 말야."

카지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그렇습니까? 그것 참 곤란하네요. 최소한 종족이나 인상착의를 알아야 그나마 할만 할 텐데."

"그렇지. 덕분에 부하들만 고생하는 군. 아 참, 그리고 그 새로운 유적 부근에서 돌연변이들이 많이 발견된다고 하니까 조심하게나. 덕분에 발굴 속도가 영 아니라는 모양이야."

이건 의외의 정보였다.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았다. 돌연변이들 덕분에 진척속도가 느려졌다는 건 아직 그들에게도 유물을 발굴할 기회가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먼저 돌연변이들을 헤쳐나가야 하겠지만. 생각치도 못한 정보에 일행은 감사를 표했다.

"뭐,  해보게. 그리고 혹시 거동이 수상한 자를 발견할 경우 지체없이 가까운 치안유지대에 알려주게. 보상은 확실히  걸세."



증거나 목격담이 없어 치안대도 수사에 그리 힘을 쏟고 있지않는 듯 했다.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도시와 마을 주변의 돌연변이 처치인 것 같았다. 치안유지대는 일행과  마디 간단히 주고 받은 후 그대로 순찰을 위해 떠났다. 보통 도시를 경비하고 있을 치안유지대가 저렇게 순찰을 돌러 나왔단 소리는 그만큼 상황이 좋지않다는 소리같았다. 그러고보면 치안대가 주위 마을에 파견되서 바쁘다고 치안대본부에서 그랬었지. 도로스는 카디프의 치안유지대 본부를 떠올렸다. 카디프의 치안대도 주위 마을을 순회하고 있을 터 였다. 그대로 우리 마을까지 순찰로에 넣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러기엔 너무 멀어서 가망이 없다는 걸 도로스도 알고 있었다.

일행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유적과 가까운 마을에서 짐을 풀고 정보를 얻은 후 바로 유적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정확시 3시간 후. 도로스일행은 유적과 제일 가까운 마을, 메드비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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