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만남
도로스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넓고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많으니 유물에 돈을 쏟아붇는 부자 쯤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건 그렇고 아직 가장 큰 의문이 남아있었다. 도로스는 조심스레 카지트를 불렀다. 아무래도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묻기는 좀 껄끄러운 질문이었다.
"저기, 카지트."
"엉?"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됩니까?"
"어, 그래. 뭔데?"
"왜 하필 접니까?"
도로스는 말하고 나서 탓하는 어투로 들리는 문장에 아차 하며 턱을 문질렀다.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었을텐데.
카지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도로스는 용기를 내어 같은 내용을 조금 더 순화해서 말했다.
"아무래도 절 구했을 때부터 절 이 일에 끌어들이기로 작정한 거 같은데, 왜 굳이 접니까? 여기 와보니 굳이 저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세상물정에 어두운 도로스라도 이유없는 친절따윈 없다는 건 잘 알고있었다. 지금이야 카지트가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것저것 도와줬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째서 도로스 자신을 택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 그건가.."
카지트는 이해했다는 듯 눈을 살풋 찡그리곤 머리를 긁적였다.
"음..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참을 끙끙대던 카지트는 툭 하고 내뱉었다.
"감이야. 어쩐지 넌 꽤 쓸만할 거 같았거든. 그리고 도움을 줘야 나중에 도움을 받지 않겠냐."
지금처럼 말이지. 카지트는 씨익 웃었다. 살며시 드러난 송곳니가 불빛에 반짝였다. 끙끙대던 것 치곤 간단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도로스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길잡이의 감이야 그 정확성에 대해선 자신도 잘 알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카지트가 그 이상 해줄 것 같지도 않았기에 도로스는 얌전히 다른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 '믿을 수 있는 놈들'이란 건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의뢰 중개인에게 의뢰를 받으니까. 녀석들이 이놈저놈 지켜보다가 알려주는 거겠지 뭐. 이놈이 입도 무겁고 쓸만하다, 그런거."
가볍게 대답한 카지트는 또 뭐 궁금한 거 있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도로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음.. 그건 그렇고, 오면서 생각한 건데 잘못된 길로 종종 가는 것 같던데요."
사실 종종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었지. 하지만 도로스는 그 사실을 모른척하고 태연스레 물었다. 카지트도 뭔가 생각이 있었을 테니까. 다만 그 '생각'이 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큼, 그게 말야."
카지트는 당황한 모습으로 코를 긁적였다. 실룩이는 갈색코가 손바닥 뒤로 사라졌다.
"사실 말이지, 내가 더 빠른 길로 왔거든. 근데 돌연변이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
그렇게 말한 카지트는 재빨리 덧붙였다.
"큼, 출발은 내일 모레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푹 쉬어두라고. 슬슬 어두워지니까. 그리고 내일은 같이 물건 사러 갈 거니까 뭐가 필요할 지 대충 생각해둬."
말 돌리는 게 확연히 티가 났지만 도로스는 잠자코 있었다. 반응으로 보건대 반 정도는 진짜인 듯 했고, 나머지 반은 그냥 몰랐던 것 같았다. 도로스는 카지트가 설명해줬던 선천적인 길잡이와 후천적인 길잡이의 차이점을 떠올리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남의 실수를 헤집을 필욘없지. 도로스는 주의를 날짜로 돌렸다.
마을의 식량과 무기의 잔량을 계산 해볼 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아마 두 달 반, 그러니까 대략 75일 정도. 카디프까지 열 흘 가량 걸렸으니 남은 기간은 65일. 돌아갈 때 15일 정도 걸린다는 걸 감안해 볼 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50일 정도일 것이다. 누이의 얼굴이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누이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그는 병약한 누이가 어떻게 지낼지 궁금했다. 편지라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애초에 편지배달부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여행자나 길잡이들도 갈 수 있을 터였다. 도로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유물 발굴은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 유적 상태에 따라 달라. 그리고 무슨 유적이냐에 따라서 또 다를 테고. 이것저것 변수가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에메랄드 컴퍼니에서 기간을 넉넉히 준다면 한 한 달 정도 걸리진 않을까."
"한 달이라.."
50일 중 30일. 남은 20일이라면 뭔가 일이 생겼다해도 충분히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난 동료들한테 얘기 전하고 올 테니까. 좀 쉬어둬. 꽤 피곤할 텐데."
도로스는 그제야 온 몸을 내리누르는 피로를 깨달았다. 토벌대에 정신을 쏟고 있어서인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예, 근데 여관은 어딥니까?"
카지트는 손사래 쳤다.
"아냐, 그냥 내 집에서 묵어. 아마 내일 모두 모여서 브리핑할 거야. 침대는 구석에 있는 걸 써."
카지트 셋은 족히 들어갈 침대는 꽤나 깔끔했다. 금속 프레임은 잘 관리했는지 흔한 흠집 하나 없이 반짝였으며 매트리스 또한 먼지가 살짝 쌓인 걸 제외하면 새 것처럼 깨끗했다. 그 위엔 접혀진 이불과 베개가 놓여있었는데 약간의 흐트러짐이나 구겨짐 없이 반듯하게 각이 잡혀 있었다. 병적일 정도로 각잡힌 모습에 도로스는 이걸 어지렵혀도 되는지 고민했다.
"진짜 괜찮나요?"
"엉. 맘대로 써."
도로스는 카지트의 눈치를 보며 장비를 벗고 간단한 차림으로 침대 위로 슬그머니 올라갔다. 손을 짚을 때마다 푹푹 꺼지는 것이 여간 비싼 게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침대에 눕자 노곤함과 안락함이 그의 몸을 감싸안았다. 딱딱하고 축축한 땅바닥에 익숙해졌던 그의 몸은 상상을 뛰어넘는 푹신함과 안락함에 순식간에 취해버렸다.
"근데 그 방독면은 안 벗냐?"
"이건 좀 사저ㅇ..이..잊어..서.."
도로스는 벌써 반쯤 수마에 몸을 맡긴 채 띄엄띄엄 대답했다. 수마에 내리눌린 입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는 듯 했다. 도로스의 상태를 본 카지트는 피식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카지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도로스의 정신은 잠에 취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길가로 나온 카지트는 동료들의 숙소로 향하며 도로스에 대해 생각했다.
"왜 도로스인가..였나."
혼자서 파이프를 돌아다니는 녀석은 주로 둘 중 하나다. 일행에서 떨어진 낙오자 이거나 세상물정 모르고 알량한 실력만 믿고 나대는 멍청이. 전자야 가끔 일어나는 일이니 별로 놀랍진 않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이다. 애매모호한 실력에 쓰잘데기 없는 자신감만 가득찬 이들은 위험하다. 그 '위험'의 의미나 강도는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일행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 몇 번이나 그런 일행을 본 적이 있는 카지트에겐 가장 상종하고 싶지않은 유형은 사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로스는 그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아니, 여기까지 온 배경을 생각해보면 후자에 가까우려나. 마을에서 혼자 뛰쳐나온 점은 그다지 칭찬 해주고 싶진 않았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는 건 중요하니까. 운이 좋아 스스로 길잡이의 능력을 보유했지, 아니었다면 이미 한 참 전에 죽어 나자빠졌으리라. 만약 그랬다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도로스를 믿고 기다릴 마을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음으로 밀어넣는 일이 된다. 자기 혼자만 죽으면 그만이지만 괜히 남까지 엮어서 끌고 가버린다. 역시 난 그런 놈들이 싫어. 카지트는 거칠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스스로가 싫어하는 유형인 그를 택한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겹친 까닭이다.
솔직히 말하지면 급했다.
카라와 카노의 의뢰를 받은 직후에 에메랄드 컴퍼니의 의뢰가 떨어졌지 뭔가. 한 번 받은 의뢰를 취소한다는 건 의뢰 취소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이전에 쌓아놓은 신뢰에 타격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급한 사정이 아닌 이상 할 수 없었다. 카라와 카노 또한 에메랄드 컴퍼니의 유물 의뢰에 관해 들었을 것이다. 그쪽도 꽤나 경험있는 녀석들이니까.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기회가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으니 그 둘도 애가 탔을 것이다.
그래서 돌연변이를 상대하더라도 최대한 빠른 길로 오는 방법에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던 거겠지.
발멘이야 그 성격에 중개상이 의뢰를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경호나 파괴, 박살을 주로하는 플라잉 몽키즈 소속이니 유물 의뢰와는 연이 없기도 했다. 일단 확실한 것만 둘. 카디프에 경력있고 신뢰도도 높으며 아직 의뢰를 받지 않은 이들을 떠올리던 카지트는 이내 그만두었다. 한 손은 가볍게 넘었던 탓이다.
에메랄드 컴퍼니가 의뢰를 시작한 지 이미 수 일이 지났으니, 떠날 놈들은 진작에 떠났다는 걸 고려한다면 아마 카지트와 카라 일행이 가장 늦게 뛰어든 사람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카라와 카노라면 도착하자마자 유물 의뢰를 수락하고 떠났을 것이다. 결국 내가 제일 마지막이로군. 경쟁자들보다 뒤쳐지는 느낌이 들어 카지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가 항상 "4명? 3이나 5는 상관 없지만 4는 안된다! 난 4라는 숫자가 싫어. 재수가 없거든." 그리 말하지만 카지트는 4명이야말로 이상적인 파티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팀을 나눠야하는 경우엔 두명 씩 둘로 나눌 수 있고. 다섯이나 여섯은 의뢰보상금을 나누는 머릿수가 많아지니 몫이 너무 줄어든다. 3명은 보상을 클 지 몰라도 나누기 애매하고. 그렇기에 4명이야 말로 괜찮은 인원임이 분명했다.
현재까지 모은 동료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셋. 하나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 하나를 구하는 건 절대 쉽지않을 거라는 걸 카지트는 알고 있었다. 이미 발빠른 녀석들이 입이 무겁고 쓸만한 녀석들을 모두 채어갔을 것이다. 혹여 남아있는 녀석들이 있다고 해도 돈을 미끼로 당분간 어디에 보내놨겠지. 경쟁자의 패를 줄이는 건 이 바닥에선 당연한 일이다. 경쟁자의 수가 줄어들 수록 얻는 이득이 늘어날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도로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도로스 혹은 카지트, 아니면 둘 모두에게 다행스럽게도 도로스의 실력은 꽤나 쓸만했다.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온 걸 보면 어느정도 실력은 있는 편이었고 거기에 길잡이 능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호랑이 돌연변이에게 크게 한 번 데였으니 만용 또한 어느정도 고쳤으리라 생각한다. 혹시나 고치지 못했다면 그가 손수 고쳐줄 것이다. 그 때는 재밌겠구만. 카지트는 씨익 비열한 웃음을 띄웠다.
도로스는 모르겠지만, 사실 카지트와 일행은 도로스가 호랑이 돌연변이와 싸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않을 때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랑이 돌연변이는 특유의 질긴 가죽때문에 성히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잡았다 하더라도 넝마가 된 가죽은 가치가 얼마 되지않기에 자칫하다간 총알값이 더 나올 수 있어 꺼리는 상대였다. 본래라면 둘 중 살아남은 자를 습격해 전리품을 강탈할 생각이었지만 돌연변이와 싸우는 도로스의 실력이 예상보단 뛰어났던 터라 카지트는 잘하면 쓸모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으로 재빨리 총을 쏴 도로스를 구해냈다.
그리고 도로스와 대화를 나누며 카지트는 그를 자신의 파티에 넣기로 결심했다. 준수한 실력, 착한 인성, 그리고 세상사에 대한 무지함. 그야말로 꽤 괜찮은 조합 아닌가! 그야말로 눈뜨고 코베이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이런 녀석들은 보호해줘야지. 카지트는 굳게 마음먹었다.
카라와 카노도 그를 자신들의 파티에 넣고 싶어했지만 카지트는 도로스의 옆에 딱 붙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엔 좀 더 시간을 단축하고 도로스의 실력도 볼 겸,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는 대신 돌연변이들을 더욱 많이 만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조금씩 눈치채지 못하게 도로스에게 돌연변이들을 보낸 카지트는 그의 실력은 진짜라는 걸 확신했다. 무기 자체의 성능 탓에 화력 면에선 조금 불안불안하지만 뛰어난 전투감각과 속사로 그 결점을 충분히 메꾸고 있었다. 카지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카지트는 도로스가 그의 일행에 속한 이상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줄 것이다. 그의 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누구보다도 관대한 그이니까. 그리고 도로스가 원하는 토벌대라면 그가 도와줄 수 있었다. 유적을 팔아 번 돈으로 토벌대를 조직해도 되고, 크게 한 건 올렸다면 에메랄드 컴퍼니 위쪽에서 접선이 올 것이다. 그 때 살짝 언급해도 좋으리라.
카지트는 앞으로의 일을 기대하면서 일행이 묵고 있는 숙소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