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1.만남
그의 집은 대로에서 떨어진 복잡한 샛길에 위치한 작은 가정집이었다. 도로스는 그의 이미지와 전혀 맞지않는 소박한 외견에 집과 카지트를 번갈아 봤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와 함께하면서 느낀 이미지대로라면 삼류 주점 겸 여관에서 술마시며 도박할 것같은 인상이라 평범한 가정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도로스는 하마터면 집을 털었는지, 그리고 집주인은 어떻게 했는지 물어볼 뻔 했다.
"뭐,뭐야. 왜? 이상하냐?"
카지트는 고양이 수염을 바르르 떨더니 소리질렀다. 그 자신도 안어울린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듯 했다. 노부부가 살 것같은 자그마한 단층 건물 외벽엔 싱그러운 돌이끼가 문양처럼 모여있었다. 시간이 좀 지난터라 여기저기 돌이끼가 삐죽나오고 있었지만 주인이 어지간히 시간을 쏟아부었는지 전체적인 모양은 아직 깔끔했다. 그는 별다른 변명없이 도로스를 집안으로 밀어넣었다. 수염이 삐쭉 곤두선게 만약 그가 인간이었다면 얼굴이 새빨게 졌으리라.
도로스는 집 안을 열심히 구경했다. 카지트와 집 외견의 괴리가 너무 심해 집 내부는 어떨지 진지하게 생각해봤었지만, 생각 외로 평범했다. 온 사방이 핑크빛으로 빛나지도 않았고 이상한 조형의 인물상이 전시되어 있지도않았다. 말 그대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거실엔 조금 낡은 소파와 탁자가 있었고 주전자와 컵 등 일상용품이 있었다. 먼지가 조금 쌓여있는 걸 제외하면 푸근한 가정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더욱 매치가 되지않았다.
"..생각보다..어, 음, 예쁘네요?"
"..아오."
도로스의 아무 생각없는 발언은 카지트의 마음에 다대한 피해를 준 것 같았다. 카지트는 대체 뭐가 예쁘다는 건지 묻지 않았다. 대신, 잡아먹을 듯한 험한 눈초리로 도로스를 잠시 노려보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로스도 그를 따라 반대편 소파에 앉은 채 그를 바라봤다. 계속 주위를 둘러보는 도로스가 불편한지 카지트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큼, 일단 이야기 하기 전에 말야. 내용도 듣지않고 바로 하겠다고 하는 건 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이죽이는 듯한 카지트의 말에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 해 하던 도로스는 그제야 내용도 듣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창백해졌다. 그러고 보면 토벌대 파견을 도와준다는 이야기에 무턱대고 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맙소사! 어쩌자고 그런 짓을.. 도로스는 방독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수락을 하더라도 일단 그 내용을 먼저 들었어야 했다. 그는 성급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뭐, 내가 할 제안은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그 말에 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진짭니까?"
"진짠진 어떻게 알겠어?"
카지트는 또다시 이죽였다. 건들건들한 태도에 틱틱대는 말투로 보아하니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도로스는 대강 그의 성격을 파악했다. 생각 외로 눈 앞의 수인이 속이 좁았다. 활기차고 수다떠는 걸 좋아하긴 해도 보이는 것 만큼 속이 넓은 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치안대로 안내할 때도 그랬지. 다만 그 건에 대해선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도로스 자신 때문에 카지트는 의뢰보상금을 홀라당 까먹었으니. 어쨌든, 약점 잡힌 지금 카지트의 속을 긁는 건 별로 좋지 못한 것 같았다. 도로스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이곤 입을 다물었다. 필요한 때 이외엔 침묵으로 일관할 작정이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도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보자..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하나. 아, 넌 처음이니까 모를지도 모르겠구나.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하자. 도로스, 넌 용병이 뭘 하는 지 아냐? 아니, 질문 다시해야겠군. 용병에 대해 얼마나 알지?"
사람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후줄근한 한량처럼 철없고 가볍던 인상은 사라지고 경험많은 전사의 노련함과 날카로운 기도가 그 자리를 메웠다.
도로스는 긴장했다. 아니,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긴장해있었다. 근육엔 힘이 과할 정도로 들어가있고 정신은 바깥의 잡음 하나하나 잡아낼 정도로 곤두서있었다. 영문모를 상태에 도로스는 의아해하며 카지트를 보곤 그 이유를 깨달았다. 카지트의 눈에선 감정을 배제한 것 마냥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 소름이 끼쳤다. 마치 무정물을 보는 듯한 메마르고 차가운 눈은 지금까지 도로스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도로스의 감은 위기를 감지했다. 거절했다간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 무의식 중에 그걸 느꼈기에 그의 육체와 정신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여기서부턴 신중히 대답해야 해. 도로스는 속으로 뇌까렸다.
"용병..에 관해선 마을 아저씨들께 들어 본 게 좀 있습니다."
카지트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각종 협회나 학회 등의 조합들에게 의뢰를 받아 수행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맞아. 그게 바로 용병들이 하는 거지. 나도 비슷해.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알려줄 거지만, 나도 한 가지 의뢰를 받았어. 이 바닥에서 믿을 수 있는 놈들에게만 주는 의뢰라 아직까지 아는 놈들은 아주 극소수지. 보수가 꽤 짭잘해서 말야. 아무래도 이 이상 경쟁자를 늘이긴 싫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카지트는 말했다. 도로스는 뒤의 '경쟁자를 늘이기 싫다는' 발언에 주목했다. 그것이 암시하는 내용은 어느정도 머리가 굵은 이라면 간단히 잡아낼 수 있었다. 꿀꺽, 도로스는 침을 삼켰다. 아직 정확한 의뢰 내용은 모른다. 그렇다면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도로스는 내용을 듣기 전에 그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대답은?"
"한 가지 묻겠습니다."
"뭐지?"
"그 의뢰가 토벌대와는 무슨 상관입니까?"
"흠, 좋은 질문이야. 하지만 그전에 대답해야겠어. 의뢰인과 관련된 일이라 함부로 말할 순 없거든."
의도가 단번에 들통난 것 같았다. 도로스는 갈등했다. 왠지 한 번 발을 들이면 돌이킬 수 없을 것같은 느낌에 망설였지만,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하겠습니다."
"아~ 다행이다. 혹시나 거절할 까봐 맘 졸였다구."
카지트는 그제서야 소파에 몸을 뉘였다. 뼈가 없는 듯 흐느적거리는 모습으로 소파에 널부러진 모습에 도로스는 그가 '평소의 그'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방금 전의 날카로운 모습은 발멘과 대립각을 세울 때와 같다는 걸 상기했다. 이렇게 앞 뒤가 다른 사람은 처음이라 도로스는 복잡한 감정을 담아 그를 쳐다봤다. 어느 게 진짜 모습일까? 후자의 모습이 진짜 같긴 하지만 그렇다기엔 전자의 늘어진 혹은 촐랑거리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복잡한 상념에 골치가 아파진 도로스는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렸다.
'거절했다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도로스는 차마 묻지 않았다. 근접전의 달인과 밀실에서 단 둘. 거기에 그는 이 도시에 연고 하나 없다. 도시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일행 뿐이지만, 그 중 눈 앞의 수인을 제외하곤 그에게 털끝만한 관심도 없으니 그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음, 그다지 좋은 결과는 아닐 것 같은데.
세상엔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있는 법이다. 들어봤자 정신건강에 막대한 피해를 줄 내용이라면 지금은 묻어두는 편이 나으리라.
대신에 그는 물었다.
"그래서, 그 외뢰가 토벌대와는 무슨 상관입니까?"
"의뢰주가 말이야, 그 유명한 '에메랄드 컴퍼니'라고."
"에메랄드 컴퍼니?"
도로스는 들어본 적 없는 명칭에 고개를 갸웃했다. 카지트는 설마설마 하는 표정으로 도로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익숙치않은 단어를 되뇌이는 것처럼 '에뫼..에메랄드 컴,포니?' 중얼거리는 도로스의 모습은 그에게 파이프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카지트는 온몸으로 경악을 표출했다. 마치 번개처럼 몸짓 후에 소리가 잇따랐다. 캬아악! 하고 고양이과 특유의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난 카지트에 도로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소리없이 반문했다.
"맙소사! 너 진짜 모르냐? 에메랄드 컴퍼니를?!"
오, 데우스시여! 그는 기계장치의 신의 이름을 간절하게 외쳤다.
카지트는 주머니에서 탄환을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탄피 표면에 동그라미와 N자 모양과 닮은 번개모양의 표식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 문양이 에메랄드 컴퍼니를 상징하는 표시인 듯 했다. 원 안에 번개라. 도로스는 기억 속을 뒤적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문양을 본 기억은 없었다.
"어..잘 모르겠습니다."
"허...진짜 촌구석에서 왔구나."
"대체 그게 뭡니까? 토벌대 이름인가요?"
카지트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혼란스런 카지트의 마음 속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에메랄드 컴퍼니는, 음..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엄청나게 유명한 회사야."
"엄청나게?"
"응, 엄청나게."
도로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엄청나게, 라고 말해도 그와 카지트의 '엄청난'에는 무시 못할만큼 큰 차이가 있을 터였다. 도로스는 잠자코 카지트의 설명을 기다렸다.
"탄환부터 각종 기계장치까지, 별의 별 거를 다 만드는 거대 회사거든. 제품의 퀄리티도 꽤 괜찮아서 여기 동부는 커녕 다른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회사라고."
도로스는 혼란에 빠졌다. 이제야 막 도시가 추가된 그의 세계는 지방이니 거대 회사니 하는 그런 개념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너무 작았다. 그리고 대체 그런 거대회사와 토벌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번 의뢰는 유적 탐사 후에 무언가 기록이나 유물들을 찾아서 가져다주는 건데 그 가치에 따라 의뢰비를 줘. 근데 그게 어마어마한 돈이란 말이지."
"어느 정도인가요?"
"어디보자, 가장 낮은 게 1000너트다."
이번엔 도로스가 경악했다.
그가 마을에서 모은 돈이 300너트이니 그 3배에 달하는 돈이었다. 그 돈으로 뭘 살까 곰곰히 생각하던 도로스는 이내 도시의 물가를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카지트도 동시에 비슷한 결론을 내렸는지, 물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참고로 여기 물가 아냐? 저쪽 대도시만큼은 아니더라도 여기 물가는 꽤 비싸거든. 한 끼에 10너트, 1박에 50너트 정도야."
대충 잡일하면 시간당 10너트정돈 받으니까. 카지트의 제법 구체적인 설명에 도로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비싸군요."
발멘에게 100너트를 줬으니 수중의 돈은 200너트 뿐. 세 끼를 다 먹고 여관에 묵는다면 이틀하고 조금이면 다 사라질 돈이었다. 그리고 20시간을 일하면 벌 수 있는 돈. 자급자족해오던 마을이라 금전개념이 모호한 그에겐 어느정도 도움이 되는 기본지식이었다.
"그럼..토벌대는.."
"아, 이야기가 딴 데로 샜네. 어쨌든 그런 자질구레한 유물도 개당 그정도니 이것저것 모아서 한꺼번에 가져간다면 엄청난 돈이 되지. 그런 돈으로 네가 토벌대를 고용해도 돼."
"토벌대 가격은요?"
"글쎄, 구한다는 놈을 못봐서 잘 모르겠네. 그래도 두당 3만 가까인 하지않을까?"
"..."
도로스는 말을 잃었다. 3만..3만.. 그 거대한 숫자가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3만..대체 얼마나 일해야하는 걸까. 카지트는 몽롱한 정신으로 "3만.." 하고 중얼거리는 도로스의 등짝을 때려서 그를 깨웠다.
"뭐 그런 방법도 있다고. 그리고 남자 새끼가 쪼잔하게 그게 뭐냐. 남자로 태어났으면 크게 한 탕 쳐야지. 대박 하나 건지면 수 십만 까지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그런 녀석이라면 어느 회사든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거든. 실력자들에게 토벌대같은 걸로 빚을 지울 수 있다면 그네들로썬 좋아 죽을 걸?"
"그렇군요."
3만..그리고 수십만.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잘하면 돈도 벌고 토벌대도 보낼 수 있고. 이러니 여기저기 알리고 다니고 싶지않는 그의 심정이 대강 이해는 갔다. 누구나 유물을 발굴한다면 그 유물의 가치는 흔해질 것이다. 그리고 흔해빠진 것에 큰 돈을 쏟아부을 사람은 없을테고.
"근데 왜 그 에메..애미..애무.."
"에메랄드 컴퍼니."
"..에메랄드 컴퍼니에선 그런 큰 돈을 거는 겁니까? 그리고 유물이란 건 대체 뭐죠?"
"음, 글쎄. 나도 유물에 대해선 잘 몰라. 그냥 우리가 먼 옛날에 잃어버린 기술들이라는 거? 뭐, 일순간에 수 십만 명을 박살 낼 수 있다느니 순식간에 대형 파이프만한 크기의 굴을 뚫을 수 있다드니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들 밖에 없어서 말야. 그리고 에메랄드 컴퍼니는 그런 쪽에서 좀 유명해. 가끔씩 지금 같은 의뢰를 던져주는데 그때마다 큰 돈을 만질 수 있어서 말이지. 의뢰기간은 보통 정해놓진 않아서 몇 달 동안 할 때도 있고. 재수없을 땐 사흘만에 끝난 적도 있다던가? 아마 이번에도 무슨 유적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저러는 걸걸. 하여간 돈 많으신 윗대가리들은 다르다니까. 뭐, 우리야 좋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