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1.만남
"맙소사.."
도로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털썩 주저앉은 몸엔 정말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상황은 다른 일행도 비슷해서 카라와 카노도 벽에 기댄 채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오로지 카지트와 발멘만이 쌩쌩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로스는 복잡한 감정을 한숨에 담아 쏟아냈다. 일행은 정말 미친 듯이 싸웠다! 몇 걸음 걸으면 돌연변이가 나타나고, 밥을 먹고나면 돌연변이가 나오고, 잠을 잘까 하면 돌연변이가 출몰했다. 지난 이틀간 돌연변이와의 끊임없는 전투는 카지트와 발멘을 제외한 일행들의 체력을 한계까지 몰아부쳤다.
"최근 돌연변이 수가 늘었다던데..정말이군."
카라가 힘없이 내뱉었다. 털을 윤기를 잃고 엉망이 된 채 구불거렸지만 그는 다듬을 생각도 하지않았다. 부스스한 꼴은 그도 다르지않아, 도로스는 두 체력바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과 어느정도 유대감이 싹 트는 것을 느꼈다.
도로스는 말없이 웃고 있는 카지트를 힐끗 쳐다봤다. 아무래도 그가 미심쩍었다. 이곳까지 오는데 갈아탄 파이프만 십 수 개에 이른다. 그리고 도로스는 보았다. 그 때마다 카지트가 잘못된 길을 고르는 것을.
처음 한 두 번은 잘못된 길을 골라도 그러려니 했다. 가끔씩 그의 감도 빗나갈 때가 있었으니까. 그게 세 번 네 번을 넘어가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도로스는 그를 주시했다. 아니나다를까, 카지트는 '올바른 길'을 힐끗 쳐다보곤 태연히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올바른 길을 인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도로스는 그가 일행을 일부러 위험한 길로 내몬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가 일행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카지트가 나름 조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위험하다 느끼는 곳은 피하고 적절하다 생각되는 곳으로 데려가니 뭔가 나름 생각이 있는 듯 했다. 그 예로 지금까지 나온 돌연변이들은 모두 충분히 상대할 만한 녀석들이었다. 거기에 도로스는 중간에 끼어든 입장이니 별로 분란을 조장하고 싶진 않았다.
도로스는 그 나름대로 카지트가 왜 일행을 돌연변이 밭으로 내모는 걸까 생각해봤지만, 이내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깊게 생각하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고 카지트 나름 뭔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다.
"흥, 약해 빠졌군. 그래서야 용병이라고 할 수 있겠나?"
발멘은 카지트를 제외하고 자빠져 있는 일행을 둘러보더니, 코웃음치며 비웃었다. 카지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도로스는 자긴 용병이 아니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쓸데없이 기운빼고 싶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발멘을 쳐다보는 그의 눈엔 작은 경탄이 떠올라있었다.
일행 중 발멘이 제일 잘 싸웠는데 그는 마치 보여주기라도 하듯 일행의 눈 앞에서 돌연변이들을 으깨버렸다. 그의 주무기는 그의 키만한 워해머였는데, 일격일살로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반드시 무언가가 터지곤 했다. 대부분은 돌연변이들의 머리통이었지만 간간히 다른 부위도 흩날려서 그의 흥을 돋궜다. 허리춤엔 더블배럴 샷건으로 보이는 뭔가가 꽂혀있었지만 아직까지 그가 사용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일행 앞에서 넘치다 못해 질질흐르는 체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허공에 워해머를 휭휭 휘둘렀다. 부-웅 공기를 짓이기는 소리가 꽤나 위협적이었다.
"저 놈 저거, 머리통 좀 깨부수더니 아주 신이 났군."
카지트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내젓고는 도로스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무기를 손질했다. 그는 한 손엔 아밍소드를, 다른 한 손엔 프랜시스카 계통의 도끼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의 무기엔 피가 붉은 녹처럼 달라붙어있어 기괴한 느낌을 줬다.
허리춤엔 기압식 리볼버와 화약식 소드오픈 샷건을 차고 있었다. 어딜 봐도 원거리보단 근거리에 치우친 무장이었다. 신기하게도 샷건은 더블배럴이 아니라 트리플배럴이었지만 총기지식이 없는 도로스에겐 그게 그거 같았다.
도로스도 그의 애기愛器를 꺼내 손질했다. 화려한 장식없이 투박한 보우건 이었지만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소중한 무기였다. 자연히 볼트를 조이고 기름칠을 하는 손엔 애정과 신뢰가 물씬 풍겨나왔다.
"그 보우건말야, 어디서 산 거야? 성능이 꽤 괜찮은데?"
"..제가 만들었어요. 동네 아저씨들이랑."
"오오, 잠시 봐도 될까?"
도로스는 카지트에게 보우건 한 정을 건네주었다. 그의 손에 딱 맞는 무기라 그런지 그보다 큰 카지트가 쥐니 너무 작아 맞지않았다. 마치 어른이 애들 장난감을 쥔 꼴이라 카지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허 참. 재주도 좋아."
보우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카지트는 대단하단 듯이 그를 쳐다봤다. 부품 하나 하나 손수 만든 듯 품질이 들쑥날쑥 했지만 오히려 그게 다른 부품들과 미묘하게 맞물려 수제란 느낌을 줬다.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외형은 장식용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실전용이란 걸 여실히 드러냈다.
카지트는 자기 무기도 보라면서 트리플 배럴 소드 오프 샷건을 풀러 도로스에게 내밀었다. 허벅지 길이만한 그것에선 금속 특유의 차가움과 진한 화약냄새가 풍겼다. 횡으로 누운 두 총열 아래 하나가 더 붙어있는 꼴이었는데 한 번에 최대 3발을 동시에 쏠 수 있는 것 같아 도로스는 작게 감탄했다.
"이게 화약식 무기군요.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화약식 무기는 이야기로만 들어본 터라 위력이 어느정도 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보우건 보단 셀 터 였다.
"와...진짜 촌구석(크흠!)..멀리서 왔나 보구나."
도로스의 기침소리에 재빨리 말을 바꾼 카지트는 별난 걸 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큼큼 목을 가다듬고 설명했다.
"화약식 무기는 좋지. 장전도 편하고 한 발 한 발이 세고."
카지트는 응응,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근데 좋은 만큼 단점도 많다니까. 일단 총알값이 비싸서 말이지, 재수없으면 의뢰비를 총알값으로 다 털어넣어야 한다니까? 그리고 시끄러운 건 또 얼마나 시끄러운지. 한 두 발 쏘면 주위의 돌연변이들 이목을 죄다 끌어모으니 골치아파 죽겠어."
그래서 난 이놈이 더 좋다니까? 카지트는 기압식 리볼버를 꺼내 입을 맞췄다. 기압식이라면 마을에서 몇 번 본 적 있으므로 도로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리볼버의 위쪽에 눈금이 들어간 동그란 계기판과 정체모를 선과 톱니바퀴가 붙어있었다. 모향은 마을의 것과는 다르지만 아마 비슷한 용도인 것 같았다.
"어? 잠깐. 멀리서 왔다고 했지?"
카지트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너 말야, 여기까지 혼자 온거야? 길잡이도 없이?"
"네. 어쩌다보니.."
"맙소사. 진짜 대단하잖아!"
그는 도로스의 양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 소란에 발멘은 그들을 힐끗 보았으나, 이내 다시 무기를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갑작스런 칭찬에 도로스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지트는 힐끗 다른 일행을 훑어봤다. 카노와 카라는 잠이 든듯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고 발멘은 수련이라도 하는 마냥 워해머를 휘두르느라 관심이 없는 듯했다. 딱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저 녀석들은 눈치 못챈 거 같은데 내 생각엔 넌 길잡이의 재능이 있는 거 같아."
"설마요."
도로스는 부정했다. 길잡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 까닭이었다. 길잡이는 지도의 대용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지도엔 단순히 길만이 나와있을 뿐, 어느 길로 가야 적들과 조우하지않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어느 길로 가야 위험을 피할 수 있을지 가르쳐주진 않는다. 길잡이는 그 특유의 판단력과 올바른 길을 찾는 능력으로 일행을 안전한 길로 이끌기 때문에, 훌륭한 길잡이를 가진 그룹은 높은 생환력으로 유명했다.
"아냐아냐, 이건 진짜야. 나도 길잡이긴 하지만 진짜 길잡인 아니라구."
카지트의 눈이 반짝였다.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의 번들거리는 눈에 도로스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지금까지 호의적이었던 그의 태도로 봐서 별 일은 없겠지만, 저런 눈빛을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긴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머리 한 구석으로 접어넣으며 반문했다.
"진짜..길잡이?"
"맞아. 길잡이는 두 가지로 나뉘는 거 알고 있어?"
"아뇨. 처음 듣는 데요."
처음듣는 이야기에 그는 귀를 귀울였다. 확실히 외진 곳에 살아서 그런지, 모르는 상식이나 정보가 많았다. 이런 기회나마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지도 몰랐다. 도로스는 이것저것 알려주는 카지트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집중했다.
"들어봐. 길잡이는 두 가지로 분류 돼. 선천적인 녀석들이랑 후천적인 녀석들이지."
아마 너와 나의 차이일 거야, 카지트는 덧붙였다. 도로스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선천적인 녀석들은 말 그대로 너 같은 녀석들이야. 대단한 감이나 뭐 그런 걸 가지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옳은 길을 고르지."
카지트는 바닥에 손톱으로 작게 글씨를 썼다. 서,ㅇ,처...성청젓. 도로스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도시의 글쓰는 방법은 다른 걸지도 모르지. 괜히 지적했다가 무지함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후천적인 건 나같은 녀석들인데, 하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경험 좀 쌓다보니 그거에 의지해서 판단하는 거지."
그는 바닥에 후청쩍이라고 적었다. 후청쩍.. 도시에선 후천적을 저렇게 적는 걸까. 역시 도시는 어렵군. 도로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선천적..후천적..카지트같은 분들이 더 대단하지 않나요?"
후천적이란 건 그만한 실력과 경험을 겸비했단 증거니, 가진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종종 실수는 해서 말야. 역시 선천적인 재능엔 못이기지."
카지트는 그에게 윙크했다.
"그래서.."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로스는 얼버무렸다. 그래서 자꾸 돌연변이가 많은 곳으로 간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주위에 들릴까 말을 삼켰다. 이런 곳에서 말을 꺼내봤자 내분만 일으킬 뿐이었다. 나중에 카지트와 단 둘일 때 말해보자. 도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버무렸다. 카지트는 조금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도로스를 바라봤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저 분들은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그리 친해보이진 않는데."
"아아, 발멘 녀석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녀석들이 고용주거든."
카지트는 턱 짓으로 골아떨어진 둘을 가리켰다. 카노와 카라는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여전히 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들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둘은 높으신 나으리의 부하란 모양이야. 이번에 파이프 파손? 박살? 뭐 그런게 꽤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느라 간단한 조사 차 보낸 거라던데. 난 길잡이, 발멘은 호위로 고용 되었고."
발멘은 잇달은 격전에 어지간히 몸이 달았는지 여전히 무기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이틀을 내리 싸우고도 저리 팔팔한 건 보니 보통 체력이 아닌 듯 했다.
"파이프 내에선 내 지시를 최우선으로 삼으라고 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너도 못구했을 걸?"
카지트는 도로스의 등을 탁탁 때리며 흐헤헤 웃었다. 도로스는 따라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해 최소한의 체력을 회복한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한시 빨리 도시에 도착해서 쉬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도로스와 일행은 지친 몸을 애써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