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1.만남 (3/100)



〈 3화 〉1.만남

도로스는 눈을 떴다. 힐끗, 손목에 찬 시계를 보자 16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의 두 세시간을 내리 잔 셈이다. 도로스는 상체만을 일으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세상에 살아있는 건 그 밖에 없는 것처럼 주위는 여전히 어둡고 조용했다. 도로스는 장비를 다시 둘러메고 움직일 준비를 했다.

장비들은 폐수에 닿지않아 모두 무사했지만, 검은색 바지와 신발은 폐수에 찌들어있었다. 지금이야 방독면을 쓰고있기에 냄새를 맡을  없지만, 분명 상상하는 것 이상의 악취가 날 게 틀림없었다.




그는 괜스레 찝찝한 느낌을 털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휴식을 취해서 그런지 몸엔 힘이 넘치고 정신은 맑고 뚜렷했다.

 시간 가까이 걷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도로스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누렇게 빛바랜 종이 위에 선 여러 개가 그어져있었는데, 전문가가 아닌 예전에 도시에 나갔던 마을 어른 중  분이 돌아다닌 곳을 그린 지도라 그런지, 조악하기 그지없어 낙서라 부르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아서 도로스는 힘겹게 지도를 읽어내리다 왼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맞게 왔는지 파이프는 가면 갈 수록 좁아졌다. 한 두 시간 동안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좁아지기 시작했는데, 네 시간 째가 되어선 누구나 알  있을 정도로 파이프의 둘레가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전에 왔던 파이프보다도 더 좁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소형 파이프가 되었다.


"..음"


도로스는 점프하면 머리가 부딪힐 것같은 낮은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계속해서 걸어갔다.

"맙소사.."

작은 탄식이 방독면을 뚫고 터져나왔다. 그의  앞엔, 있어야 할 길이 없었다. 그 말인 즉슨, 파이프가 막혔다. 결국 올 것이 왔다. 마을 어른들이 편한 파이프 따윈 없다고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수월하게  게 신기할 지격이다.


도로스는 지도를 폈다. 보기 힘들지만 지도엔 분명 좁은 길(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그는 도로 앞을 쳐다봤다. 파이프 어디 한 군데가 허물어졌는지 토사가  앞을 꽉꽉 메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믿었던 지도은 100% 맞지는 않는 것 같다. 하긴, 10년도 더 됐다고 하니까  사이에 파이프가 무너지거나 구멍이 나는 것정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것보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느냐이다. 이대로라면 돌아가야 할  밖에 없겠는데. 도로스는 파이프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달 반 정도. 두 달 반 이후엔 마을 내 모든 탄환과 화살 재고가 없어질 터. 그렇다면 돌연변이들의 습격에 취약해 질 수 밖에 없다. 애초에 그가 마을을 나선 이유도 마을 주위에 급증한 돌연변이들을 없앨 토벌대를 요청하기 위해서다.

마을에서 도시까지 보통 15일 정도 걸린다고 하면 왕복 한 달. 탄환과 화살 재고가 떨어질 때까진 아직 한  하고 보름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돌연변이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변수를 고려한다면 그보다 짧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도로스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되돌아 가는데 4시간.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니 실질적으론 8시간 정도 허비한 것이다. 돌아가기엔  시간이 아깝고 머리 한 구석에선 감이란 녀석이 이 길이 빠른 길이라고 알렸다. 길이 막혔는데 맞는 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토사에 가로막힌 좁은 파이프. 일방향이라 다른 통로나 구멍은 없었다.

도로스는 기다란 막대같은 무언가 (아마 재질로 판단 건대 녹슨 철봉일 듯 하다)를 주워 흙더미에 푹 쑤셔넣었다. 생각 외로 손에 걸리는 느낌이 단단하고 끝없이 들어가는게, 쌓인 두께가  되는 것 같았다. 아마  정도라면 파는데 못해도 한 나절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도로스는 흙더미를 포기하고 시선을 돌려 파이프벽을 바라봤다.

"..혹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고, 이런 행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머리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로스는 주먹으로 파이프를 때렸다. 어린 시절 뛰놀던 마을 뒷편의 탄광엔 가끔씩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생긴 구멍이  건너편에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그건 탄광에서의 이야기고, 거대한 흙더미 안에 끼워진 파이프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통.


"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상함을 느낀 도로스는 다시 파이프를 때렸다.

통.


이상했다. 파이프 너머엔 흙이 있을텐데, 그렇다면 이렇게 속이  소리가  리 없었다. 설마, 하고 도로스의 입이 벌어졌다.


"비어..있는 건가?"

피식피식, 도로스의 입가에서 웃음이 방귀처럼 새어나왔다. 어째서 벽 너머에 파이프가 있는가,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넓고 넓은 땅 속에 파이프는 널리고 널렸다. 그런 것보다도 파이프 너머에 빈 공간이 있다는 건 지금 이 상황에서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도로스는 방금 쳤던 곳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을 두드렸다.

퉁퉁퉁.


"있다! 있어!"


 번에 걸쳐 여기저기 두드린 도로스는 파이프 너머에 통로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크기론 중형 파이프정도. 5~7m 정도의  공간이 그냥 비어있을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보통 파이프 너머엔 흙과 돌로 가득차 있을 테니까!


도로스는 보우건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근접무기야 외투 속에 넣어둔 숏소드가 다였고, 발리스타를 쓰자니 공간이 여의치 않아, 파이프 외벽을 부술 수 있는 무기는 그것 밖에 없었다. 사실 보우건 정도의 위력으로 두께를 가늠할  없는 파이프 외벽을 뚫을  있을까 싶었지만,


팅팅팅팅.

연달아 발사된 볼트가 파이프 벽에 맞고 튕겨 어지러이 비산했다. 도로스는 반사적으로 한 팔을 들어올려 얼굴을 감쌌다. 볼트가 질긴 외투의 여기저기 박혔지만, 다행스럽게도 도로스는 상처없이 무사했다. 죽는 줄 알았네, 속으로 생각하며 도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에 있을 누이가 '넌 가끔씩 막나가니까 조심하렴. 항상 움직이기 전에 생각  하고.' 구박하는 환청이 귓가에 맴돌았다.

"역시 안되나..."

도로스는 이번엔 파이프 외벽을 주먹으로 냅다 후려갈겼다. 쿵, 하고 파이프가 살짝 떨렸지만 역시나 벽은 건재했다.


"으음..."


반탄력에 주먹이 징징 울리는 게 아프기 그지없었다. 도로스는 아픈 주먹을 맥없이 흔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머릿속엔 어떻게 벽을 부술까 생각만 가득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바닥에 떨어진 볼트들을 만지작 거렸다. 통짜 쇠로 만들었다지만 철의 질이 좋지않아, 몇 개는 성했지만 대부분의 볼트들은 살짝 휘거나 몇몇 개는 부러져있었다.

보우건으론 화력이 충분치 않다. 숏소드?  뼘 반 만한 검으론 뚫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은 건 발리스타 뿐인데,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드나들 듯한 좁은 공간에서 사람 키 만한 발리스타를 가로로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로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럴 때 폭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건만.


사실 어느정도 머릿수가 되고 넓은 장소에 자리잡지 않는 이상 폭탄같은 걸 가지고 돌아다니는 건 미친 짓이다. 좁은 공간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건 자살 행위일 뿐만 아니라 터질 때의 소음은 주위의 돌연변이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도로스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도로스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폈다. 각종 선들이 누런 종이 위에서 춤을 췄다.

"이 지도 대로라면 여기쯤 왔나?"


그는 복잡하게 얽힌 선의 한 부분을 짚었다. 제대로 따라왔다면 방금 짚은 선인지 지렁인지 모를 파이프가 아마 그가 위치해있는 곳일 터였다.

"그리고 그 옆엔.."

아무것도 없었다. 깨끗하다 못해 바래진 누런 공간이 여백의 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네."


도로스는 마을 어른  한 분이 자기가 가본 곳만 그렸다는  떠올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이지, 이 놈의 지도는 꼭 필요할 때 써먹을 수가 없었다.


"곤란한데.."


지도(라기보단 낙서)에 나와있지 않은 길. 운이 좋다면 지도에 나와있는 파이프와 합쳐질 것이고, 아니라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터였다. 도박의 순간. 도로스는 감에 의지했다. 지금까지의 경험대로라면 무턱대고 움직이는 것보단 감에 따르는 편이 좋은 결과를 내었다. 뭐, 다른 녀석들이 보기엔 그게 그거인  같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는 게 낫겠지."


도로스는 토사가 무너진 곳을 면밀히 살폈다.

역시나 파이프  부분이 깨져있었다. 깨진 파이프 윗 틈으로 토사가 들어온 듯 했다. 그러다 토사의 무게에 틈이 벌어졌는지 깨진 면이 휘어져 있었다.

그걸 본 도로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토사가 나온 곳으로 굴을 파고 가는 것이다. 두께조차 가늠못 할 파이프를 뚫느니 구멍난 곳에 굴을 파고 들어가는 게 더 현실성있었다. 빈 파이프가 있는 곳이야 소형 파이프가 깨진 위치에서 2~3미터 정도 떨어져있으니, 둘레를 생각해볼 때 굴만 판다면 바로 중형 파이프 안으로 들어갈  있으리라.


도로스는 장갑낀 손으로 파이프가 깨진 틈으로 새어나온 흙을 한 움큼 집었다. 차갑고 단단한 흙덩이는 손가락 사이로 마르게 휘날렸다. 이 정도라면 해볼만 했다. 마침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도 탄광 마을이 아닌가. 어린 시절, 몇 없는 친구들과 탄광에서 뛰어놀던 그였기에 굴을 파는 일이라면 자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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