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1.만남 (2/100)



〈 2화 〉1.만남

"...길을 잃었나."

도로스는 외투의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폈다. 왼쪽 어깨에 달린 조명에 의지해 이리저리 지도를 둘러본 도로스는 이내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지도를 집어넣었다. 낡은 누더기 위 여기저기 그어진 선들과 모양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길잡이를 구해볼 걸. 후회는 언제나 뒤늦은 법이다. 새삼스레 얻은 작은 깨달음을 곱씹으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없는 거다. 생각하기 전에 움직인다. 감에 의지한 그의 지론은 항상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꽤 괜찮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아마.


아마, 그러..겠지?

"곤란한데."


얼마 못 가 멈춰선 그는 난감하단 듯 콧등을 긁었다. 두꺼운 가죽장갑이 얼굴 전체를 감싼 방독면을 긁으면서 부드득 소음을 만들었다.  앞에 나타난  가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은 그를 당황케 했다.

좋은 소식은 다행스럽게도 막힌 파이프는 아니란 것이다. 벽이 보이길래 당황했지만, 막힌 길이 아니라 왼쪽으로 꺾인 코너였다. 주위가 어둠에 휩싸여있기에 이 파이프가 어디로 이어져있는진 모르겠지만, 코너 머너로 계속 이어지는 길을 보니 최소한 막힌 파이프는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녹이 슬고 중간 중간에 갈라진 틈이 있긴하지만 중간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쁜 소식이 있었다. 도로스는 눈 앞에 고인 '나쁜 소식'을 방독면 너머로 노려보다,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좁은 소형 파이프를 빠져나온지 어느덧 3일 째. 그는  위기에 직면해있었다.

도로스는 주위의 폐기물을 주워서 앞으로 던졌다. 라이트의 빛 사이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폐기물은 철퍽, 하고 떨어졌다. 그가 던진 폐기물은 단단한 바위 혹은 금속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닥에 부딪혀 철퍽, 하는 소리보단 딱, 하는 소리가 나는 게 정상이다. 철퍽 같은 소리가 나려면,


"웅덩이 밖에 없지..."


도로스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가슴께에 달린 라이트의 불빛은 파이프를 반쯤 침수시킨 뭔지 모를 액체를 비추고 있었다.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시커먼 액체는 타르나 석유를 연상시켰다.


검은 코너.

사람 열 댓 명을 나란히 세울  있을 것같은 파이프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썩은 오수 위를 떠다녔다. 그의 바로 앞이야 신발코가 살짝 잠길 정도였지만, 코너를 돌면 웅덩이의 깊이가  깊어지는  보였다. 그 양이 얼마 되지않았다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봐도 그의 허리께 쯤 올 듯한 깊이라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하반신의 움직임에 제약이 걸린 상태에서 돌연변이들에게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등에 맨 대형 크로스보우도 문제였다. 도로스의 키만한 크로스보우는 저곳을 건너는 동안 필연적으로 반쯤 폐수에 담궈질 텐데, 어떤 악영향을 미칠 지 몰랐다. 폐수 속에선 장전하는 것도 무리일테고.

가죽이 얇은 녀석들 쯤이야 소지한 소형 듀얼보우건으로 쉽게 상대할 수 있지만, 어느정도 중장갑인 녀석들에겐 대형 크로스보우 혹은 발리스타라고 불리는 이녀석을 써야한다.

도로스는 혹시 다른 길이 없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길 따윈 없고, 그의 시계視界엔 갈라진 파이프나 흙과 돌, 폐기물 따위만 보일 따름이었다. 다시 돌아가야하나 도로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는 길에 몇  갈림길을 지나왔으니, 다시 돌아가서 반대쪽으로 가면 되리라.


그러나 도로스는 왔던 길로 돌아가는 대신,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끗 봤다. 시침과 분침은 13시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마을을 떠나 헤멘지 6일 쯤.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왔던 길로 되돌아 갈 것인가.

망설임은 길었지만 결단은 짧았다. 도로스는 이대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감이 그대로 가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감은  믿을만 해서, 마을에 있을 때도 돌연변이를 때려잡거나 탄광을 돌아다닐 때엔  많은 도움이 되곤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막힌 곳없이 왔으니 그 성능은 충분했다. 도로스는 거대한 웅덩이를 향해 한 발 내딛었다.

도로스는 등에 맨 배낭과 허리에  보우건을 폐수에 닿지않게 최대한 위로 오도록 조정하곤, 대형 크로스보우를 앞으로 겨눈 채 알  없는 액체 속으로 전진했다.

폐수에 발을 들이자마자 느낀 점은, 점성이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대체 뭐가 섞인 건지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발에 걸리는 저항이 상당한 게, 습격당한다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정말로 위험할 것 같았다.


코너를 돌자, 예상대로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발목에 오던 폐수는 종아리, 무릎, 골반을 지나 허리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도로스는 불빛을 멀리 저 앞으로 비추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거리에, 파이프의 바닥이 희미하게 보였다. 수위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같았다. 거리로는 20m 남짓 했다.


그렇게 웅덩이와 십 수분을 싸우자, 입안에선 단내가 나고 크로스보우를 든 양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폐수의 점성때문에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많은 힘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렇게 반 정도 건너자, 파이프 안은 이미 철벅 하는 소리와 후욱 내뿜는 숨소리만으로 가득 찼다. 몸은 지칠대로 지쳐서 헉헉 대고 있지만 그보단 오히려 정신적으로 힘겨웠다.

칠흑같은 어둠으로 가득찬 파이프 속에서 홀로 작은 조명 하나만 의지한 채로 나아가는 건 정말로 고된 일이었다. 돌연변이들의 습격에 대한 불안과 경계, 길을 잃진 않았는지 걱정과 염려. 거기에 시간적인 압박까지 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누나나 어른들의 말대로 길잡이라도 구했어야 했다. 길잡이 없이 파이프를 누비는 건 정말로 미친 짓이란 걸 지금와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도로스의 마을은 깡촌 중의 깡촌이자 오지 중의 오지라 길잡이는 커녕 변변한 여행자조차 찾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이 위험에 처한 지금, 언제 올지도 모르는 길잡이를 기다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감이 좋은 그가 직접 나서지 않았는가.


도로스는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렸다. 마을에서 그나마 제일 가까운 도시까지 15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마을을 떠난지 6일이면 거의  정도 왔을 테니, 반만 더 가면 된다. 해왔던 것처럼 한다면 무사히 도착할  있으리라.

간신히 웅덩이를 건넌 도로스는 모든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대자로 바닥에 누웠다. 허리 아래쪽이 아릿한 게 폐수에 독성물질이 꽤 들어있었던 것 같았다. 도로스는 축축 쳐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조그마한 약병을 꺼냈다. 독이나 유해물질에 강력한 면역력을 가진 돌연변이의 피로 만들어진 약은 이런 중독증상 쯤이야 금방 낫게 해줄 수 있을 터다.

도로스는 약병을 방독면 아래쪽에 난 포트에 돌려끼웠다. 도로스는 방독면 안에 부착된 빨대를 입으로 재주좋게 꺼냈다. 빨대로 약을 복용하자, 아릿한 하체는 순식같에 멀쩡해졌다.


도로스는 그대로 누워 파이프 천장을 올려다봤다. 불빛에 비친 각종 먼지가 허공을 떠다녔다.

"돌연변이들은 안왔네."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하며 도로스는 눈을 감았다. 체력회복  잠을 잘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돌연변이들이 다가온다면 예민한 감각이 알아서 그에게 알려줄 터였다.

도로스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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