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합법 사령술사-4
“둘이 만난 적이 있나?”
거인이 내려다보는 듯한 성 조르주의 시선이 둘을 관통했다.
“당연하지. 난 니아트리브에 처박혀 있었고 얘도 니아트리브 출신인데. 내가 지금껏 해준 말은 귓등으로 넘겼나?”
“한 번 더 확인할 필요는 있으니까. 원래 스코티시에 있었잖나. 언제 니아트리브로 내려간 거야?”
“자의는 아니고 시대에 휩쓸려서 어쩌다가. 나라에서 그렇게 하라는데 거부할 수 있나.”
거지 노인, 아니 초월자 노인이 의석에 털썩 앉았다.
“꼴을 보아하니 그동안 잘 지냈나 보구나.”
“할배가 초월자셨다니, 몰랐네요.”
“초월자는 무슨. 그냥 거지일 뿐이야. 일단 너희 둘 다 자기소개부터 하지?”
“아차차, 자기소개를 까먹었네. 안녕 꼬마야, 이 누나는 아나스타샤라고 해. 저어기 멀리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초월자란다.”
“시베리아의 마귀할멈이겠지.”
“오라비! 체통 지키라는 사람이 누구셨더라?”
“네 말대로 지금은 공석보다는 사석에 가깝지 않느냐. 아참, 나는 조르주라고 한단다. 에크나르프에서 살고 있지.”
“나는 알지? 원래 신분은 요 둘하고 같다. 이름은 뭐...... 그냥 대충 배거라 불러.”
“......”
초월자. Transcendence master.
강한 마법사를 가리키는 대마법사(Master mage 또는 Master wizard)의 경지 이상의, 아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알려진 지고한 존재들.
말로만 들은 존재를 셋이나 한 번에 만난 데다, 거지 노인이 그 초월자라는 사실에 소년은 굳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이들도 귀족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되나? 초월자니까 좀 다르려나? 아니지, 이름을 먼저 알려주는 것 보니까 귀족 예법과는 다르게 대해야 하나?
“어머나. 가만히 있으니까 꼭 인형 같네. 덜 커서 그런가 남자같지가 않아. 혹시 여자 아니지?”
“남자 맞다 아나스타샤. 내가 이 녀석 키웠다.”
“키워? 무슨 속사정이길래 요런 귀여운 녀석을 키웠을까? 오라비는 알어?”
“오면서 대충 들었다. 일단 결계부터 쳐.”
장난기가 엿보였던 표정을 걷어낸 조르주의 말에 바바 야가가 고개를 끄덕이고 절굿공이를 창처럼 한 손으로 휘리릭 돌렸다. 그러자 주위의 마력이 꿈틀대면서 대회의장 한가운데에 그들을 감싸는 돔형 결계가 순식간에 생성되었다.
간단한 손짓 한 번에 막대한 마력이 움직이는 것에 소년이 살짝 입을 벌리고 바바 야가를 바라보았다.
“놀랐니? 표정이 별로 안 변해서 알아볼 수가 없네. 오라방, 얘 원래 이래?”
“언제까지 오라비 오라방이라 부를 거냐? 시대가 변했는데 아직도 옛말을 쓰고 있어.”
“조르주 오라비는 그렇다쳐도 오라방은 이름 뺏겼잖아.”
“하긴...... 어쨌건 너도 앉아라. 들을 게 많다.”
***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래. 어차피 이야기하는 거 맨 처음부터 얘기하는 게 좋겠지.
시간을 거슬러서 검은 역병이 돌았던 때로 돌아가 보자. 대략 오백이었나 육백이었나. 그쯤 되었을 거다. 아 삼백팔십 년 전이라고? 이거 섬에 틀어박혀 오래 살다 보니 시간관념도 없어졌구만.
어쨌건 나는 초월자로서 검은 역병과 싸웠단다. 이 둘도 그렇고 다른 초월자들도 모두 말이야. 아무렴 악마가 지상에 올라와서 난리를 치고 있는데 가만히 있던 초월자는 아무도 없었지.
검은 역병, 들어봤니? 잘은 몰라? 간단히 설명하자면 걸리면 죽고 죽으면 사령술사와 악마의 조종을 받는 시체로 되살아나는 전염병이다. 몸이 검게 변하면서 시름시름 앓더니 별안간 푹 쓰러져 죽었는데, 죽는다고 끝나는 게 또 아니야. 그 시체가 다시 되살아나 산 자를 공격하고 역병을 퍼뜨리는 악순환이 이어졌지.
사령술사와 악마가 합작한 역병이 돌자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죽어나갔어. 인간이건 엘프건 상관없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유로파와 북에프레카 이슬람이 합동전선을 구축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이니 살리니 했던 엘프 칸 제국과도 연합했을 정도지.
역병은 안 그래도 엘프 칸 제국의 정복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라 피폐해졌던 세상을 제대로 덮쳐버렸어. 악마들은 세상이 취약해졌을 그런 때를 노렸던 거겠지.
너무나 끔찍했던 일이라 지금 남은 기록 대부분은 그때를 전혀 언급하려 들지 않지. 그냥 역병이 돌았고 많이들 죽었다 이렇게만 기록했고. 오로지 연맹이나 왕실의 기밀서고에만 진짜 역사가 잠들어 있어.
그렇게 수십 년을 싸우고, 마법계에서는 사령술에 대한 증오가 판을 쳤지. 사령술이 역병 퇴치에 공헌을 많이 세웠지만 애초에 역병의 원인이 일부 사령술사였으니까.
결국 투표를 통해 사령술을 이 세상에서 지우자고 합의하게 되었어. 초월자들조차도 대다수가 감정에 휩쓸려서 증오를 표출하게 된 참으로 잘못된 일이었지. 이해는 하지만.
그래서 초월자들도 나서서 사령술을 지우기 위해 온 세상의 문헌과 사령술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원시부족 주술사까지 헤집고 다녔는데, 나는 신대륙 지역 중에 지금 유로파가 진출한 쪽을 맡았어. 임무는 다 했는데, 나는 다른 게 눈에 들어오더구나.
신대륙 원주민들이 너무 불쌍했던 거야. 인간과는 다르지만 엄연한 지적 생명체였으니까.
내가 맡은 지역은 남북으로 길쭉했는데 빽빽한 수림이 가득하고 고지대라 농사 지을 것도 없고 제대로 된 가축도 없었어. 유로파에서 왕국을 세우니, 우리 종교가 더 세니 하고 있을 때 거기 원주민은 겨우 부족 생활을 청산하고 있었지.
나는 그들을 측은하게 여겨 그들에게 농법을 가르쳐주고 가축 기르는 법 같은 걸 알려주고야 말았어.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그들이 불쌍해 보였더라도 개입해선 안 되었어.
그게 들켜서 나는 다른 초월자들에게 징계를 받았지. 이름을 빼앗기고 변방 섬나라인 니아트리브의 험한 북부 산지, 스코티시로 유배당한 거야.
나중에 내 도움을 받은 원주민들 소식을 듣자하니, 참으로 씁쓸하더구나.
그들은 나를 흰 얼굴의 신이라 추앙하면서 숭배하기 시작했고 내 재림을 기다리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가면서, 결국엔 대규모 인신공양을 필요로 하는 종교로 발전했지.
내가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흠, 얘기가 조금 샜구나.
어쨌거나 나는 그로 인해서 스코티시에 유배되어 있었단다. 그러다가 시대의 변화를 타고 흘러다니다 린던 빈민가에 들어갔지. 그리고 시간이 또 지나서, 널 만나게 되었단다.
누가 낳고 버린 건지, 빈민가 구석 빈집에 포대기도 없이 버려진 너는 범상치 않았다. 기지도 못하는 아기인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울지도 않으면서 사방을 살피고 있더구나. 어찌나 불길한 기운이 퍼지던지 처음 봤을 땐 악마가 땅에서 기어 나온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나도 그 힘에 이끌려 널 발견했고.
그래. 그건 네게 말해줬듯 세상을 멸망시킬 부정한 운명의 힘이었다.
그렇게 불길한 아기라면 보자마자 없애야 했어. 하지만 난 그때 널 죽이더라도 세상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 확신했다. 그런 불길한 기운은 결코 우연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
나는 신대륙 원주민이 뒤틀려 버린 이후로 줄곧 죄책감을 품고 있었지. 내가 뒤틀어버린 만큼 세상에 뭔가 도움을 줘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결심했다. 어차피 죽여도 다른 곳에서 태어나 세상을 어지럽게 할 바에는, 차라리 널 키우면서 성정을 교정하기로 말이야. 잘만 한다면 세상을 멸망시킬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가족처럼 널 붙잡고 키울 수는 없었단다. 네 운명은 부정하다고 했지? 운명이라는 건 네게 가해지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아무리 최고의 스승을 붙여 주었더라도 모두 비틀려서 네게 주입되었을 거였지.
그래서 정상적인 교육 방식은 네게 통하지 않을 거란 판단을 했고 그래서 가족의 형태 대신, 지식을 전달해주는 외인으로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로 했어.
네가 어느 정도 커서 혼자 살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나는 널 버려두고 떠났다. 그러면서 네 주위를 맴돌면서 지켜봤지. 그래, 거지로 말이야. 실제로도 거지긴 했지만. 그 판자촌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말고도 외부의 지식을 조금씩 알려주는 창구를 자처해 네가 어떻게든 변하길 기대하면서 말이지.
뭐, 죽은 것들을 되살리면서 결국엔 빈민가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켰을 때도 놀라지는 않았어. 예상한 범주 내였거든. 부정한 운명이 그 정도의 여파를 몰고 다니는 건 놀랄 일도 아니지. 오히려 다행이었어. 도시 하나가 아니라 도시 내부의 빈민가에 국한되었으니까.
어차피 나는 제명당한 상태라 개입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네가 마법사들에게 한방 먹고, 뒷산에서 다쳤을 때 내가 물었지?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네가 흉성을 일단 폭발시켰으니, 이제 넌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단 거였다. 나는 유폐되어서 니아트리브 땅을 못 떠나고. 그래서 네가 린던을 떠나기 전에 나는 네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내 선택이 옳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네 대답은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아나스타샤. 그건 남자끼리의 비밀이야 묻지 마. 조르주, 그렇다고 자네까지 그러면 어떡하나. 둘만의 비밀이야. 남의 사생활을 캐려하나 왜.
거참...... 뭐 말해도 괜찮겠니? 그래. 뭐 소문 듣자 하니 얘기해도 될 것 같긴 했어.
이 녀석이 뭐라고 했냐면,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했어.
참 조촐하지?
빈민가에 살아서 생각의 폭이 제한된 건지, 아니면 나름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가치관인지는 몰랐지만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네 녀석이 식도락가로 유명하다던데, 확실히 그 말은 거짓이 아니더구나. 허허, 네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네 스스로 증명한 셈이지.
나는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그렇게 가혹하고 부정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너도 결국은 그냥 사람이란 거야.
그래. 너도 사람이야. 결코 괴물이나 사악한 악마가 아니야. 너도 그저 욕망에 휩쓸리고, 이익을 따르고, 네 가치관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평범한, 아주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표정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는데, 욕은 아니란다. 똑똑한 너라면 알겠지? 무슨 의미인지. 그래. 그럼 됐다.
지금까지 들었으면 알겠지만, 이 아이는 세상을 멸망시킬 운명을 타고났고, 별의 적의를 샀어. 조르주 네가 봤던 별의 분노도 이 아이를 향한 거였고.
세상은 이 아이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거야. 이번 일도 그렇지. 마법사들이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우리에게 책임이 떠넘겨졌지 않은가.
‘원래’라면 우리는 이 아이를 인정하지 못했을 거야. 사령술에 민감한 자네가 있었으니. 또 이미 어디선가 린던이나 보르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대형 사고를 쳐서 그냥 넘어가지도 못했을 테고. 어쩌면 일찍이 해방 결사단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내 영향이 어디까지 뻗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론 이 녀석의 운명은 제대로 바뀌었다 생각해. 그리고 나는 그걸 계속 이어가고 싶네.
내가 듣기로는 네가 연맹에 은근슬쩍 먼저 제안을 했다 들었다. 네 힘을 인정하는 대신 결사단을 상대하는 데 한손 보태겠다고. 너도 어떻게든 사회에 녹아들고 싶었던 거겠지.
이봐들, 이것만으로 가능성이 보이지 않나? 얼마나 기특하나. 모두와 적이 될 운명을 거스르려 이렇게 노력하는데, 사령술을 좀 쓰면 어떤가. 어떤 국가를 위해 사령술을 쓴다 한들, 선을 넘지 않으려 자체적으로 노력하겠지. 선을 넘어 모두를 적대하게 된다면 결국은 운명에 순응하는 게 되니까 말이야.
누군가는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도 하겠지만, 내가 그동안 이 녀석을 관찰해온 게 있는 만큼, 나는 이 녀석을 믿네.
내 말은 다 끝났어. 이건 네게 하는 충고일 뿐만 아니라 너희 둘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해.
이제 이 아이의 처우를 어떻게 할지 얘기해주게. 나는 찬성일세. 이 아이가 쓰는, 사령술이되 그 옛날 사령술과는 사뭇 다른 부정한 운명의 힘을 합법화시키는 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