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126화 (127/128)

126화

합법 사령술사-3

초월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기에 모두가 우러러보며 또한 두려워하는 이들이다. 수백 살은 먹은 이들이 즐비하며 천 년을 넘게 산 이들도 많았다.

이들에 대한 인식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을 초월한 마법의 종주’

자질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대마법사 수준이 아닌 이상은 고만고만한 수많은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초월자들은 다수의 마법 부문을 완전히 대성하거나 한 부문을 극한까지 파고드는 것을 넘어, 아예 기존 한계를 벗어난 이들이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허나 초월자들은 모두 속세를 떠나 숨어 있고 과거 기록들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초월자들이 얼마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들은 소름끼칠 만큼 강력한 무력을 지닌 이들이란 것.

하지만 초월자들은 군림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 숨어 두문불출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곳이 도시 한복판이건 시베리아 같은 오지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 초월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있었다.

성(Saint) 조르주.

에크나르프의 파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자신의 학파 마탑에 기거해 가장 ‘드러나는’ 초월자였다.

자신의 학파를 가지고 있어 그 제자들이 조르주의 가르침을 주기적으로 받고, 가뭄에 콩나듯 학회를 열어 마법을 시연하기도 했다. 그의 거처는 왕실의 전령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정작 그 자신은 마탑에서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돌려보내거나 발길도 닿지 않는 험지에 처박혀 사는 다른 초월자들에 비한다면 접근성이 몹시 좋았다.

이는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그 존재를 알리는 일이며 덩달아 자주 회자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조르주에겐 여러 칭호가 붙었고 지금까지도 알려지고 있었다.

유로파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이자, 가장 높은 마탑에 기거하는 이, 교황청에서 성자의 칭호를 받은 초월자이며, 에크나르프의 명예 대공, 에크나르프를 넘어 유로파에서 가장 강한 권위를 가진 학파를 창설하고 지금도 이끄는 학파장 등등.

모든 마법사들이 경의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목례했다.

“반응이 예술이네. 나한테는 손가락질이나 하더니 다 알아보시네 그지?”

바바 야가가 피식 웃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새로이 등장한 초월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끼어든 거지? 아니, 처음부터였나?

“조르주 오라비, 뭐가 켕기셔서 숨어서 회의에 참석하셨을까?”

“난 너처럼 막무가내가 아니거든. 옛날에 내 손으로 멸망시킨 사령술이 다시 튀어나왔다니 안 참석하고 배기겠나.”

조르주가 씁쓸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그가 교황청에서 성자 칭호를 받은 이유가 검은 역병 때 초월자들의 참전을 이끌어 낸 공을 세워서였다. 다시 말해 사령술을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버린 데 크게 거들었단 말이다.

“오라비 생각은 어때? 이 의제, 우리가 넘겨받는 데 문제 있어?”

“사흘 동안 쭉 본 바에는, 네 말이 맞다. 너희들은 계속해서 제자리만 맴돌며 시간낭비나 할 가능성이 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좋지 않다는 격언도 다 잊고선 말이지. 이런 간단한 사안 하나에 사흘씩이나 집어먹다니. 너무 정치에 매몰됐어.”

“......”

마법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의 말에 모두의 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연맹의 규칙에 따르면, 모든 간부가 모인 대회의에서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최선의 수를 선택하게 될 것 같지 않은 경우엔, 초월자에게 판단을 대신하게 할 수 있다. 단, 초월자는 세 명 이상이 참석해야 한다.”

모든 간부가 모일 정도의 중대한 안건이 없던 지 꽤 되었기에 거의 사법(死法) 취급인 규칙이었다.

“오라비도 눈치 빨라. 한 명 데려오고 말이야.”

마법사들이 모두 움찔했다. 초월자가 한 명 더 있다고? 저 로브를 뒤집어쓴 소속을 밝히지 않은 인물들 중 하나이리라. 그들도 은근슬쩍 한두 걸음씩 떨어져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데려왔지. 어쩐지 회의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라서 말이야.”

“흥, 내가 올 것도 알고 있었지?”

“사령술에 가장 우호적이던 게 너밖에 더 있냐.”

“자 이제 규칙대로, 세 명 모였어. 불만 있니? 꼬마야?”

규칙대로라면 이 다음 순서는 여기 모인 마법사들의 투표에 의하여 초월자들에게 ‘이토록 결정이 힘든 문제를 대신 처리해주시옵소서!’하듯 사안을 넘겨야 했지만, 굳이 그런 과정은 필요 없었다.

이미 말로 흠씬 두들겨 맞은 상황에서 안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투표 결과는 보나마나 찬성이 될 것이다.

이 의제는 이제 그들을 떠나갔다.

“사령술이 다시 생겨났다는 소식이 나온 지 꽤 된 이 시점에서 다른 녀석들이 여기 안 왔단 얘기는 하나밖에 없지. 걔들이 못 들었을 린 없으니까, 다른 초월자는 개입할 의사가 없단 얘기니 따로 투표 같은 거 할 필요 없이 바로 인계하면 되겠네. 그지?”

다른 초월자의 개입 가능성마저 원천 차단하는 바바 야가.

“네 말이 다 맞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느낌으로 조르주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마녀 할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회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마법사들이 삼삼오오 모인 채 회의장을 나서서 흩어졌다. 그들은 각 첨탑에 있는 자신들이 소속된 학파 및 부서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들은 돌아가면서도 계속해서 이건 부당하다니, 어쩌면 잘 된 일이니 하면서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순수한 학문적 논의는 그때야 벌어지기 시작했다. 모두를 억누르고 있던 정치적 부담이 사라지니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마력이 안 느껴지는 마법이라. 완전히 암살자 느낌 아냐?

-떽! 그런 불길한 말을. 마법에 어딜 암살이라는 그런 단어를 붙여대? 부정타게.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잖나. 실제로 이슬람 쪽에 암살자 마법사도 있다더만.

학문적 대화의 중심에는 당연히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희대의 특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니 마력을 쓰는데 왜 안 느껴지는가? 혹시 대선장은 마력이 아닌 다른 힘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자연의 법칙을 어느 정도 따르는 일반적인 마법과는 다른 특징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등등 이야기꽃을 화려하게 피우며 간부들은 비로소 마법사다운 얘기를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 가운데 한 명은 모두가 떠나간 대회의장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첩보 부서장이었다.

텅 비어버린 넓은 회의장에는 세 명의 초월자만 남아 있었다.

첩보 부서장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절대자들을 한동안 무섭게 노려보다가 어디론가로 홀연히 사라졌다.

***

“날 부른다고?”

총괄 부서 건물의 귀빈 숙소를 찾아온 접대 부서의 말에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입고 머리를 정리하고는 안대와 모자를 차례대로 걸쳤다. 마지막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오른팔을 가리는 회색 망토로 헐렁이는 소매를 가렸다.

“회의가 다 끝난 걸까요?”

“모두의 앞에서 결과를 통보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넌 여기 있어. 혹시 모르니까.”

숱한 고위 마법사들 중에 소년이 브란트에게 걸어놓은 사람처럼 보이는 술수를 알아차릴 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대회의장을 나와 흩어지느라, 혹은 토론에 불이 붙어 근처에서 모여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가며 소년은 복도를 걸었다.

대회의장 입구에 있던 구세프가 소년을 반겼다.

“왔는가.”

“예. 사람들이 많던데, 회의가 끝난 겁니까?”

“그렇다네. 우리들의 회의는 끝났지.”

“이제 발표 나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네. 잘 듣게나, 지금 저 안에 초월자들께서 계시네.”

소년은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일개 대마법사를 아득히 뛰어넘은 절대자들이 존재한다는 건 소년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왜 찾아왔지? 설마 나에 대해 눈치를 챈 건가? 등줄기에 힘이 팍 들어가며 몸이 한껏 긴장됐다.

“사안은 연맹의 간부들에서 저분들께로 넘어갔어. 결론은 이미 정해졌지만, 그래도 몇 가지 더 물어볼 가능성이 크네.”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끼이익하는 소리 없이 왕궁 대전 문짝 저리가라 할 정도로 넓고 화려한 대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족히 이백 명은 넓게 앉을 수 있는 분지 형태의 회의장이 보였다.

그 넓은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낮은, 연단이 자리한 곳에 앉은 세 명을 제외하고는.

흰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여인, 흰 머리와 흰 수염에 백색 로브를 입은 노인, 물 빠지고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구부정한 자세의 누군가.

‘초월자라 했지.’

힘을 숨긴 것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사방팔방 마력 냄새를 뿌리고 다니는 다른 마법사와는 달랐다. 덕분에 소년은 마법사의 냄새 대신 청량한 나무향이 감도는 회의장 본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소년은 긴장감에 푹 잠긴 채 마른침을 삼키면서 회의장 내부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다. 가죽부츠의 굽소리가 크게 들렸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도록 건설된 구조 때문이었다.

“어머나, 생각 외로 정말 꼬마네?”

“저래 보여도 대마법사 수준은 된다 하더라고.”

여인이 말 그대로 애를 보는 표정으로 소년에게 손을 흔들었고 노인은 진중한 얼굴로 소년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열여덟살치고는 정말 어려보인다. 안녀엉?”

회의장에 어울리지 않는 절구통과 절굿공이를 뒤에 낀 여인이 히히 웃으며 소년을 반겼다.

여인이 쪼그려 앉아 소년과 눈을 맞추려 하기에 소년은 얼른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시선을 피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선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에이 딱딱해. 무슨 궁궐 귀족처럼......”

“아나스타샤, 지금은 사적인 상황이 아니라 공적인 상황이다.”

“뭐 어때 남들 보는 눈도 없는데. 그징?”

여인이 소년의 모자를 휙 들고는 머리를 휘휘 쓰다듬었다. 완전 애 취급이군. 헝클어진 머리 위로 다시 모자가 내려앉았다. 소년은 비뚤어진 안대와 모자를 고쳐 썼다. 소년은 조금은 안심했다. 분위기가 자신을 압박하는 건 아니었다.

“난 눈도 아니냐?”

“오라비는 남이 아니라 놈이지.”

“뭐?”

투닥거리는 두 남녀를 내버려두고 허름한 남색 로브를 걸친 이가 앞으로 나섰다. 소년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오랜만이다.”

목소리를 듣자, 소년은 기억 저편에 파묻어 두었던 친숙한 누군가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할배?”

“그래 요녀석아.”

웃음기가 섞인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두건이 벗겨지자, 거기엔 니아트리브의 빈민가에서 소년의 유일한 인간 벗이었던 별을 보는 거지 노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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