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검증과 인정-12
브란트는 소년이 회식을 하던 도중,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여기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 작위 추천에 대해서 얘기할 게 있네. 잠시 자네 주군은 빼고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약속시간도 늦은 시각이고 생각 같아서는 소년을 대동하고 싶었지만 브란트를 부른 의도는 그를 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슨 일로 이 밤늦게까지 절 부르신 겁니까.”
브란트의 목소리엔 은근히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작위 얘기를 하려면 작위를 받을 당사자를 대동해야 하거늘, 소년은 빼고 브란트만 부른 걸 보면 꿍꿍이속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트란실바니아 사람들이 하얗다던데. 정말로 새하얀 걸.’
소문으로만 들었지 트란실바니아 사람은 오늘 처음 보았다. 점성술사 회의에서도 그렇고, 소문대로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분칠을 한 것처럼 하얬다.
탁자 건너편에 앉은 세 인물 중 가운데에 있는 이는 점성술사 조합에서 봤던 대사제라는 인물이었다. 단순한 한낱 점성술사라면 각 점성술 종파의 우두머리만 모인 그 자리에 있진 않았겠지. 그는 연초가 담긴 파이프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한참 동안을 브란트를 바라보다가 선뜻 입을 열었다.
“대선장이 내게 말했네. 악마를 죽인 적이 있다던데.”
“믿지 말지는 자유지만, 아무튼 그런 적은 있습니다.”
“본 적 있나?”
“제가 없을 때 잡으신 거라 저는 모릅니다.”
“......”
실내에서 투구를 쓴 채 눈만 간신히 보이는 브란트를, 트란실바니아에서 온 대사제는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과연 대사제는 무슨 의도로 그를 부른 것일까.
“이렇게 부른 이상, 숨길 것도 없겠지. 자네는 트란실바니아가 엘프 대침공 때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들어본 적 있나?”
“소문으론 들어본 적 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방식으로 엘프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요.”
“그 방식이 악마와의 계약인 건 아나?”
“처음 듣습니다.”
사실 들었다. 점성술사들의 회의가 열리고 있던 그 자리에는 소년 말고도 브란트 역시 참석했다. 점성술사 조합장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소년과 얘기했지만 기사인 브란트가 못 들었을 리가. 하지만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브란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당시 엘프의 잔혹한 짓거리에 맞서기 위해 악마를 소환하고 힘을 얻었네. 그 힘으로 엘프를 이끌던 용을 죽이고 엘프 군대를 우리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지. 자네는 우리가 악마와의 접점이 있음에도 왜 마법사 연맹의 틀 안에 있을 수 있는지 아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래. 우리는 그 악마를 죽였네.”
대사제는 악마를 죽였다는 대단한 업적을 말하면서도 착잡한지 연초의 연기를 후하고 내뱉었다.
“그 대가는 너무 컸지만 말이지.”
“......”
악마에게 힘을 얻은 대가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들. 그 세월이 한 번에 얼굴에 투영되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엘프를 몰아낸 트란실바니아 인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뺏기지 않기 위하여 악마를 함정에 빠뜨려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악마는 악마. 죽어가던 악마는 마지막까지 곱게 가지 않았다.
“악마는 죽기 직전 발악을 했다. 우리 모두에게 저주를 내렸어.”
-너희들은 결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피를 갈구하는 이성이 사라진 괴물이 되리라!
그래서 악마의 힘을 얻은 트란실바니아의 백성들은 이성을 잃고 날뛰면서 서로를 물어뜯고 살육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며 해결방법을 찾으려 든 이들이 있었다.
“내가 그중 하나였지. 카톨릭의 탄압 속에 잊혀 가던 토속 주술로 그 난관을 타개할 방법을 발견했어.”
그 주술은 광란에 빠진 이들에게 깃든 저주를 한데 모으는 방식이었다.
“그 저주의 그릇이 된 이는...... 당시의 공왕이셨네.”
악마를 소환하는 것, 엘프를 격퇴시킨 것, 악마를 암살하자는 계획까지. 그 모두를 이끌어 온 당시 트란실바니아의 지배자, 용살자이자 공왕이 마지막까지 희생을 자처했다. 그 희생으로 인해 모두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저주가 사라졌음에도 이후 트란실바니아에서는 사람이 피를 빨아먹으며 난동을 부리는 괴물로 변해 이따금씩 출몰하곤 했던 것이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모든 저주를 품은 옛 공왕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트란실바니아 전역에 퍼진 저주를 모으긴 했지만 주술의 한계로 인해 모두 담지는 못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었다. 공왕은 그저 그릇. 공왕이 죽는 순간 저주는 다시금 트란실바니아 전역을 뒤덮으리라.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옛 공왕께선 지하에 갇혀 계시지.”
“그걸 제 주군께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대사제는 피식하고 헛웃음과 쓴웃음이 결합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주군은 가히 악마의 속삭임에 버금간다고 비유할 수 있네. 악마가 마지막 발악을 하지 않았느냐 묻더니만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더군. 우리는 그 진위여부를 위해서 자네와 먼저 독대를 한 걸세. 자네 반응을 대충 보아하니 악마를 죽였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하이. 자네가 연기를 잘한다면야 또 모르겠지만.”
대사제가 회색 연기를 짙게 뿜었다.
“마법사 연맹은 모순적이네. 진보적인 면과 보수적이다 못해 폐쇄적인 기질을 모두 갖고 있지.”
“......”
“연맹의 주요 인물들이 죄다 모인 걸 보면 대선장이 뭔가 중요한 거래를 내세운 듯한데, 성사되진 못할 거야.”
대사제는 비관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자네들과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 서먹한 관계를 유지할 거라 생각하네. 마법사는 현명하고 이성적이고 막 그런다고는 하지만, 반대로 치졸하고 겁쟁이기도 하거든. 지금 사안도 마찬가지로 저들은 은근슬쩍 넘기려 할 걸세. 걸고 넘어지면 자네 주군과 부딪혀서 피해가 나올까 겁먹고, 그러지 않자니 껄끄러워서 해결책을 강구는 하려들겠지만 결국에는 흐지부지되겠지.”
대사제는 자신도 마법사에 한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 마법사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쪽으로 오게. 트란실바니아가 동부 제국의 속국이라는 건 알겠지.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주면 우리가 대선장을 한껏 밀어주겠네. 엘프에 대항하여 엘가리와 동부국을 지킨 공헌은 아직 유효하거든.”
트란실바니아의 대공은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왕임과 동시에 엘가리에 대한 정치적 권한을 상당수 가지고 있는 엘가리 총독을 겸하고 있다. 즉, 정치적 힘이 매우 크단 의미였다. 과거 엘프 칸국에 대항해 동부의 위대한 제국을 지킨 공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좀 곤란한 문제긴 하지만, 잘 하면 아군이 될 수 있으니 미리 알려주지. 카스테냐 왕위 전쟁이 지금 진행 중인 건 알고 있을 테고, 혹 엘가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도 들었나?”
“예.”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 엘가리에 마법사들이 장난질을 쳐놨단 의혹이 돌고 있어. 그 마법사들이 마법사 연맹인지 아니면 악마 숭배자들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
“지금 트란실바니아가 그 조사권을 맡고 있다. 만일 우리 문제를 해결해주면 그 일에 뛰어들도록 도와주지. 무슨 얘기인지는 이해하리라 믿네.”
정말로 통큰 제안이었다.
조사 권한을 나눠준단 얘기는 그 조사로 인해 발생할 이권도 일부 내어준단 얘기다. 그런데 조사하고 있는 게 나라 하나를 통째로 좌지우지하는 큰 사건이다. 이는 곧 동부국 내에서 큰 정치적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작위는 거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파이가 너무 크군요.”
“하지만 먹음직스럽지. 도전할 만하지 않나?”
“서로에게 신뢰를 쌓기엔 아직 조금 모자랍니다만.”
“서로에 대한 신뢰는 저주 건을 해결하면 넘치도록 쌓일 걸세.”
붉은 눈과 검푸른 눈이 서로 부닥쳤다.
“일단 전달해드리도록 하지요.”
“알겠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리는 카스테냐가 아니란 것은 알아두게. 기득권층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야.”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가시길.”
브란트는 정중히 예를 갖추고 떠나갔다. 세 쌍의 핏빛 시선이 검은 기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대사제님. 너무 크게 주는 것이 아닌지요?”
“대선장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건 나쁘지 않습니다만, 대선장의 정확한 성정을 아직 모릅니다. 자칫 우환이 될까 걱정됩니다.”
양옆의 두 수하가 걱정이 묻어난 말을 꺼냈다. 대사제는 깊이 연기를 들이마시며 폐에 연기를 가득 모았다가 후 하고 뿜어냈다.
“별의 변화는 늘 시대의 변화를 불러왔지. 그게 작건 크건 말이야. 이번엔 그 변화가 분노와 혼란인 만큼, 이 시대는 격변의 시대가 될 걸세. 별의 변화는 대선장의 등장 시기와 놀랍도록 겹쳤어. 다른 요소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결코 대선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억측에 가까운 말이었다. 대사제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어쩌면 별을 싫어한다는 대선장의 말에 동질감을 느껴서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
트란실바니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총괄 지부의 숙소로 향하는 브란트는, 가던 도중 갑작스레 큰 폭발음을 들었다.
‘뭐지?’
화약더미가 폭발하는 듯한 폭음에 밤늦게 돌아다니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도시의 가로등 불빛에 은은하게 비쳐 보이는 시커먼 연기가 건물 너머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브란트는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뛰어갔다. 만일 연맹에 적대적인 이가 일으킨 사건이라면 연맹에게 점수를 딸 기회였다.
폭발의 진원은 한 골목길의 조그만 주택이었다. 거인이 발을 정확히 조준해 내려찍은 것처럼 근처 건물은 멀쩡하고 오로지 한 주택만이 산산이 터져나가 파편을 여기저기 흩뿌린 채 그 안에서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근처에 살고 있던 이들이 창문으로 불안한 시선을 내보이고 있었고 근처에 있던 시민들 몇이 이미 몰려들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막 나와서 상황은 잘 모릅니다.”
“잘은 몰라요. 저도 자다가 나온 거라......”
모인 이들도 영문은 모르는 상황이었다.
“불을 꺼야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화재의 원인이 뭔지 모르니 섣불리 행동해선 안 됩니다, 기사님. 물만 부어서 해결이 안 되는 화재도 있으니까요.”
기름을 다루는 요리로 인한 폭발이거나 불법적으로 몰래 집에서 실험하다 일어난 폭발일 수도 있었으니까.
[브란트 거기 있어?]
브란트의 머릿속으로 소년의 음성이 전달되었다.
[예, 주군. 어디십니까?]
[재밌는 일이 좀 생겨서. 폭발한 집 앞에 있지?]
[예. 바로 앞입니다.]
[잘 들어. 이 집은 악마 숭배자가 있던 집이야.]
[그래서 공격하신 겁니까?]
[사정 들은 다음.]
그 말을 듣자 브란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세 눈치 챘다.
[거래를 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