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121화 (122/128)

121화

검증과 인정-11

“대선장입니다. 잠깐 얼굴 좀 보면 좋겠는데.”

“!!?!”

갑자기 찾아와서 대선장이라 주장하는 목소리에 러드콥스키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뭐지? 왜지? 아니 어떻게 알고?

접선 대상이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환영할 일이지만 이는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문에 난 좁은 창을 드륵 열었다. 로브 밑으로 보이는 푸른 외투와 작은 키에 어린 외모, 얼굴의 검은 안대까지. 분명한 대선장의 인상착의였다.

러드콥스키는 대선장임을 확인하고 문을 열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영겁의 세월을 겪은 것처럼 느껴졌다. 반쯤은 홀린 듯, 반쯤은 현 상황 때문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문을 열었지만 열자마자 후회가 몰려들었다.

‘함정이면 어쩌지? 가짜면 어쩌지? 연맹 사람이 위장한 거면 어쩌지?’

하지만 후회는 늘 늦은 법. 대선장은 터벅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지요.”

대선장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앳된 목소리가 한층 더 이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아, 예, 예......”

대선장은 마치 제 집처럼 들어오더니 넉살 좋게 털썩 의자에 앉았다. 러드콥스키 역시 어버버하다가 대선장에게 그대로 말려들며 덩달아 마주앉게 되었다.

대선장, 소년은 외팔로 안대를 만지작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런 가구도 없이 한가운데에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만 덜렁 있는 휑한 집 안. 한쪽에는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꾸려진 짐이 놓여 있었다.

“......”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러드콥스키는 대선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긴장 속에서 샅샅이 살피고 있었고, 대선장은 의자에 앉아놓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러드콥스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그런데 유명하신 대선장께서 어쩐 일로 저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마법사입니다, 하는 티를 내며 말을 꺼낸 러드콥스키. 소년은 그의 몸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악마의 냄새를 한 번 맡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마법사 연맹 한가운데에 악마의 힘을 지닌 사람이 있길래 궁금해서 왔습니다.”

“무슨? 악마라니 그런 불길한 말을, 아니 그럼 제가 간악한 악마의 힘을 가지고 있단 얘깁니까?”

표정변화가 예술이었다.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유명한 인물 앞이니 참겠다는 표정과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동시에 반반씩 떠올리다니. 정말로 억울한 사람 그 자체였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적진 한복판에 침투할 깡이 되지.

“그래요? 여기 왔으면 목적이 있어 왔을 텐데. 아무래도 그쪽은 얘기할 기분이 아닌 듯합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대선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드콥스키 역시 덩달아 일어났다. 그는 태연한 대선장의 행동에 기가 막혔다. 아니 지금 뭐하자는, 아이씨, 본론을 꺼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간을 볼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결백한 사람을 갑자기 악마니 뭐니 하면서. 아무리 대선장이라 한들 아직 연맹에 소속된 이도 아니면서 이런 무례한 짓이라니요!”

“흠. 꽤 강단은 있으시네요. 그럼 다시 얘기를 좀 이어나가 봅시다.”

당장이라도 문 밖으로 나갈 것 같던 대선장이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러드콥스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멈칫거리다가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째 처음부터 끝까지 대선장에게 목줄이 잡혀서 끌려 다니는 기분이었다.

“걱정 마세요, 신고 안 할 테니까. 여기 온 이유는 그냥 호기심입니다. 사람이 모르는 게 있으면 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복잡한 계산하지 말고 그냥 단순히만 생각하시지요.”

“......”

그걸 믿으라고?

러드콥스키는 그래도 경험 있는 첩자답게 표정 관리를 훌륭히 해냈다. 아직까지도 굳거나 하는 표정 없이 갑작스레 무단침입을 당해 황당한 집주인의 표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제 인내심의 한계는 호기심 앞에서는 좀 낮은 편입니다. 제가 신고할 마음이 있었으면 바로 멱살 잡고 끌고 나갔지. 이제 와서 숨기겠답시고 괜히 힘들이지 마시지요.”

그러면서 소년은 손에서 번개를 지직거리며 위협했다.

“......후우. 맞는 말입니다. 정말 신고하려 했으면 집부터 부수고 시작했겠지요.”

결국 러드콥스키는 손을 들고 말았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접선 대상이던 대선장이다. 간보기는 이쯤 하는 게 낫다고 판단되었다.

“그보다 어떻게 찾은 겁니까?”

“악마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모를 리가요.”

“하. 악마 냄새라. 카스테냐의 세빌 백작도 그 코로 제거했습니까?”

“딱히 악마 냄새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게 멋대로 덤비지 뭡니까. 그래서 본보기를 좀 보여 줬더니 제풀에 나가떨어져서 말입니다.”

맙소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만. 러드콥스키는 이마를 싸쥐고 싶어졌다.

마드리드 왕궁에서 대선장이 푸대접을 받는 과정에서 세빌 백작이 하필이면 대선장의 살생부에 기입된 모양이었다.

“일단은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 일과 저희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대선장님의 앞길을 방해하라 사주한 것도 아니고요.”

“그 일을 책망하자는 건 아닙니다. 이미 지난 일인데요.”

소년의 자세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아 탁자를 보면서 입만 열어서 말하고 있었다. 러드콥스키는 뭐 이런 이상한 인간이 다 있나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껏 소년을 마주하여 대화를 나눈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괴리감을 러드콥스키 역시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연기를 한다고 해도 표정에는 어느 정도 거짓이건 진실이건 감정이 조금이나마 반영되기 마련이다. 진실이면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거짓이면 진심으로 포장하기 위해서라도 표정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만들어진다.

상대방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표정을 최대한 없앤다 한들 한계가 있다.

눈가가 씰룩인다거나, 눈썹이 들썩인다거나, 눈동자 움직임이나 손짓은 물론이고, 입꼬리나 턱 주변 혹은 목 부분이 경직되는 등 정말 어지간히 훈련하지 않고서야 무의식적으로라도 움직여지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선장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자연스럽게 표정을 표현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목소리만 따다가 입만 뻐끔뻐끔거리도록 설계된 딱딱한 인형에 집어넣은 느낌이었다.

이는 상대방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대방을 상세히 살피는 훈련을 받은 러드콥스키 같은 첩보원의 입장에서는 기괴함과 불쾌감을 넘어 당장 치워버리고 싶었다.

‘왜 이렇게 이상한 느낌이지.’

상대방이 대선장이라는 강하고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억제하고 있어서 단순히 기분 나쁨 정도로 그친 것이지, 앞에 있는 인물이 자신의 업무와 하등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면 손부터 나가고 봤을 것이다.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겁니까.”

“후우, 대선장님과 접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호, 나와?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윽.’

목소리에 재밌다는 감정이 실리며 의문문이 되자 혐오감이 더 심해졌다. 말에 실린 억양과 감정이 커진 만큼, 변하지 않는 표정과의 괴리감도 커진 것이다. 러드콥스키는 그 이상한 느낌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했다.

“저희는 대선장님께서 사령술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해방 결사단은 사령술사의 집단입니다. 연맹은 사령술을 인정하지 않으니, 저희와 함께하지 않겠냐고 제의할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습니다. 그 검증과정도 이미 마쳤습니다.”

러드콥스키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라고?’

“혹시 검증은 누구에게 받으셨습니까?”

“쟈한이던가 하는 사람에게 받았습니다.”

해방 결사단 내에서 쟈하드 알무드라는 인물은 유명하다. 보기만 하면 악마의 힘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인물로써, 숱하게 해방 결사단의 하부조직을 궤멸시킨 남자였다. 가장 위협적인 감지력을 지닌 인물의 검증을 통과했다는 것은 정말 대선장은 결백하단 얘기였다.

“그렇, 습니까......”

“걱정마시지요. 신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물어볼 게 좀 있으니까요.”

“말씀하시지요.”

러드콥스키는 극심한 탈력감으로 인해 표정이 확 풀어졌다. 목소리에서도 허탈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하지만 소년의 질문에 다시 진지하게 바뀌었다.

“해방 결사단은 뭘 위한 겁니까? 듣자하니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다던가, 사악한 의식으로 사람들을 실종시킨다던가 한다던데.”

반쯤 풀려있던 러드콥스키의 눈빛이 빛나고 얼굴이 진중해졌다.

“정의를 위해서입니다.”

“정의?”

악마와 결탁해 사람을 죽이는 게?

“물론 그 수단이 과격하여 반감은 가지겠지만, 저희들은 그들을 구하는 것이지 의미 없이 죽이는 게 아닙니다. 악마 역시,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릅니다.”

다르다라......

소년이 만난 두 악마는 세간에 떠도는 사악한 존재라는 인식 그대로였는데 그게 아니란다. 하긴 사람도 다 다른데 악마도 다 다를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악마가 이들을 속이는 거던가.

서로 상반된 두 관점을 모두 듣고 선악을 구별 짓는 것. 이는 소년의 흥미를 제대로 끌었다.

소년은 빈민가에서 많은 이들의 갈등을 구경하며 그런 행동에 재미를 붙인 적이 있었다. 작게는 절도 유무에서부터 크게는 살인사건이나 수배자를 누가 먼저 잡았느냐 다투는 폭력조직 간의 말싸움까지.

죽은 짐승을 통해 정보를 수집해 누가 옳고 그른지 대충 아는 상황에서, 아웅다웅하는 걸 관찰하는 건 나름 괜찮은 구경거리였다. 거기서부터 풍기는 각종 감정의 향기도 맡을 겸.

구경하는 대상이 모두 소년보다 약자였기에 그렇게 느낀 것도 있었다. 투견이나 투계, 또는 자신과 상관없는 검투 싸움을 보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자세히 설명해주시지요.”

누가 맞는 말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맞든 누군가는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려 발버둥치는 것일 테니 그건 그것대로 꽤 흥미로운 구경이 될 것이다.

***

한편, 검은 갑옷의 기사 브란트는 베른 외곽의 조그만 집에 있었다.

그가 앉은 탁자 맞은편에는 하얀 얼굴과 붉은 눈을 가진 인물들이 갑옷 너머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브란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이 밤늦게까지 절 부르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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