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120화 (121/128)

120화

검증과 인정-10

아소르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

“야 임마! 거기 주군 드릴려는 식재료 쌓아논 데야! 꺼져! 꺼졋!”

“크웨우으우!”

누군가의 호통과 뭔가 억울한 괴성이 섞여 들려왔다.

투구를 흉갑에 고정해 놓는 요상하게 생긴 사슬을 덜렁거리며, 오르네리가 트롤 스프링밀의 등짝을 짝짝 때렸다.

스프링밀은 투덜거리며 불평하는 만취객처럼 얼굴을 꾸물거리며 식재료 창고에서 물러났다.

“아휴, 쟤는 진짜 가면 갈수록...... 딴 데 있으니까 거기로 가 거기로!”

“쿠켁!”

‘치사하다!’라고 항의하듯 큰 소리를 한 번 지른 스프링밀이 크고 무거운 덩치를 쿵쿵 옮기며 다른 쪽 창고로 향했다. 그 큼직한 등판을 보며 오르네리가 괜히 돌멩이를 찼다. 그러고선 먹을 거에 환장한 트롤에게 뚫려버린 식재료 창고를 보며 절규했다.

“하이고! 최고급 고래 고기가아악!”

큼직한 고래 고기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고래를 발견하고 추적하는 건 년 단위가 걸릴 정도로 힘들고 고래를 감당하기 위해 큰 배로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 게 포경이다. 당연히 가격도 비싸다. 그렇게 힘들게 구해온 고래가!

“야 이놈아! 차라리 다랑어를 건들 것이지!! 아이고 환장하겠네!”

오르네리가 머리를 감싸쥐며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물갈퀴도 생긴 놈이 수영은 못해가지고 진짜 아오!”

오르네리의 짜증은 애꿎은 유령선원에게 향했다.

“야, 다음부터 포경할 때 차라리 저놈 대동시켜. 힘은 좋으니까 어떻게든 써먹겠지!”

“어, 뭐. 예......”

저번에 한 번 그랬다가 갑판 절반이 꺼졌는데.

스프링밀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포가에 실어 드르륵 굴리면 되는 대포와는 달리 두 발로 쿵쿵거리며 걸어야 하니 갑판에 훨씬 무리가 갔다. 그 상황에서 무거운 고래까지 끌어올리려니 갑판이 남아날 리가 없다.

한편, 트롤이 이동한 다른 쪽 식재료 창고에서는 윌리엄과 트롤이 한판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이눔 시키! 여긴 못 들어와!”

“꿰우에에으에!”

마치 ‘아니 이쪽으로 오랬어!’라고 항의하는 듯한 억울한 고함에 윌리엄이 꽥꽥 소리질렀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쪽은 전략물자 창고다. 소년의 진짜 군대인 유령과 시체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지만, 그 밑의 수많은 해적들은 먹어야 산다.

소년은 유로파의 국가들이 아소르스 제도를 적대할 것에 대비하여 많은 양의 건조식량을 마련해 두라 시켰고, 그게 윌리엄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이 창고였다.

“아씨 대선장님이 시킨거야! 대선장님이! 여긴 건드리지 말랬어!”

“으에으......”

“배고프면 니가 직접 잡아! 아니면 그만큼 뭐 도움을 주던가! 안 그래도 니 식탐 때문에 훈련도 거르고 고기 잡아주는데 미안하지도 않냐!”

배 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옮긴다던가 그런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애초에 테르세이라 섬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폐쇄된 곳. 일거리는 적었고 스프링밀은 게을렀다.

“으에우에으......”

오늘도 배고픈 스프링밀은 몸 이곳저곳에 난 비늘을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

점성술사 조합에서의 회의를 구경하고 온 늦은 밤.

소년은 온몸에서 벌꿀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총괄 부서의 귀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질긴 노인네들일세.’

소년이 술을 마셔도 마셔도 전혀 취하는 기색이 없자, 스칸디아 룬 마법사 부족장과 드루이드 우두머리는 경쟁적으로 부어라 마셔라를 시작했다. 둘의 덩치만큼 주량은 엄청났고, 결국 식당의 술통이 바닥을 드러내야 했다. 두 덩치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은 채 바닥에 엎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같은 식당에 있던 드루이드와 룬 마법사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독보적으로 큰 두 덩치를 옮김으로써 광란의 술파티는 겨우 끝날 수 있었다.

‘근데 왜 난 안 취하지?’

두 점성술사 집단의 질린 눈빛은 그 말술 둘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소년에게도 향했다.

킁킁하며 옷에 배인 음식과 술 냄새를 맡아보고는 입을 가린 채 하 하고 입김을 불어 봤지만 소년에게서는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별일이네.’

그나저나 브란트는 어딜 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두 주당과의 식사 도중 웬일인지 갈 데가 있다고 하면서 사라지더니만. 알아서 오겠지.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옷걸이에 외투를 걸고 흰 셔츠 차림으로 팔을 걷었다. 방 한쪽에는 요상한 그릇 같은 게 있었는데 그 바로 위쪽에는 ‘수도꼭지’라는 요상한 이름의 쇠붙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끝에서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는 것처럼 물이 나오자 얼마나 놀랐던지.

‘역시 마법사의 도시인가.’

생각해 보니 마법사들은 많은 곳에 침투하여 영향을 미쳤다. 소년이 책에서 본 내용들만 봐도 마법사들로 인해 발생한 변화는 무수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식사 전에 하는 ‘의식’을 전파한 것도 마법사였다.

식사 전에 꼭 손을 씻는 의식을 통해 경건함을 살리고 깨끗한 몸으로 남을 마주하란 의미를 가진 의식이었다.

이 밖에도 정결하고 깨끗하게 몸을 관리하는 것이 역병의 악마가 싫어하는 일이라던가, 물에 뭔가 있으면 가라앉히고 끓여 먹여야 물에 깃든 마귀를 뜨겁게 해 쫓을 수 있다던가, 남을 향해 기침을 하면 부정이 탄다던가 하는 자잘하고 많은 행동들을 의식과 미신을 통해 전파하고는 했다.

몇몇은 쓸데없는 걸 자꾸 만든다고 불평했지만 그 의식과 미신을 통해 일상이 개선되자 마법사들이 주창한 많은 규칙들은 널리 퍼져나갔다.

소년은 수도꼭지 옆에 놓인 이 생소한 둥근 물체, 비누에 물을 묻혀 손에 비비고는 물에 도로 씻었다. 손이 뽀득거리는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소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비누 옆에는 길쭉한 통과 곽이 있었는데, 소년은 통에서 털 달린 막대를 꺼내 그 옆의 곽에서 가루를 살짝 묻혀 입에 집어넣어 치아와 비볐다.

씁쓸한 가루의 맛이 혀를 자극했지만 이것도 귀족이 다 하는 거라니까......

물로 입을 헹구고 다 쓴 막대는 방에 비치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가루의 쓴맛이 가신 다음의 뒷맛이 은근히 청량해 텁텁한 입 안이 청소되는 느낌이라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후에 해야 하는 귀족의 몸가짐과 어울리는 의식’을 끝마친 소년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임에도 마법사의 도시 베른은 잠들지 않았다. 하얀색의 가로등 불빛이 행군하는 군대처럼 줄줄이 이어진 거리는 린던의 ‘잘 사는 것들의 거리’보다도 밝았다. 하얀 빛덩어리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로 보아 사람들이 늦게까지도 돌아다니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발달한 도시의 한복판에 있게 된 소년은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여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상승을 이뤘는가를 음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년의 눈동자가 싸늘해지며 야경을 훑었다.

‘뭐 그리 깨끗한 방법으로만 쌓아 올린 도시는 아니지만.’

소년은 술자리에서 두 높은 지위의 점성술사에게 마법 통신구에 대한 이상한 점을 넌지시 꺼냈다. 왜 마법 통신구가 개발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개선점 없이 여전히 깨지는 소모품이냐고 말이다.

그 말에 드루이드 우두머리가 쓰게 웃었다.

-상술이란다.

덧붙인 설명은 따로 없었다. 마치 그런 말을 하는 건 금기라는 듯이.

소년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마법사들이 만드는 물품은 수가 적고 소모품이라 비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비싼 게 아니라 비싸야만 하는 것이었다.

‘비효율적인 마력 부여 방식을 통해 일부러 소모품으로 만들어놓고 그걸 비싸게 팔아먹는다라.’

소년의 가정은 확장되어, 혹시 마법사들이 이보다 훨씬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풀어놓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멀리 있는 이들과 통신이 가능한 유용한 도구만 해도 그런데, 다른 물건들이라고 오죽할까. 당장 이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만 해도 돈 많고 유능한 마법사들의 입장에선 그리 난이도가 있어 보이는 기술은 아닌 듯한데.

마법사들이 기술과 발명품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부를 불리는 데 쓰는 것에 딱히 불만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무언가를 애써 발견하고 개발했다면 그걸 어떻게 쓸지는 개발자의 몫이니까. 다만 떳떳하지 않은 행태란 걸 알면서 숨기려고 노력하는 꼴이 웃길 뿐이었다.

‘그럼 이 악마 냄새도 일부러 가만 놔두는 건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도 느낀 거지만, 어디선가 계속해서 실타래처럼 얇은 악마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 농도를 보건대 강하거나 여럿 몰려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소년은 이 악마 냄새의 진원지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당장 달려가 쳐죽이고 난리를 피울까? 아니면 몇 사람 꾀어서 같이 데리고 가야 할까? 어쩌면 연맹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악마와 뒷구멍으로 몰래 손잡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냥 냅둘까?’

연맹이건 악마 숭배자건 간에 자신에게 피해만 입히지 않는다면야. 하지만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마 숭배자가 왜 그리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난리통인지는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사실상 소년이 검증을 받니 뭐니 하면서 귀찮게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악마 숭배자들이 난동을 부려서 그런 거라, 소년은 악마 숭배자들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진 않았다. 괜히 사람 곤란하게 만들고 말이야.

소년은 외투를 다시 입고는 방을 나서려다 발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소년의 시선이 외투가 걸려있던 곳 바로 옆에 걸린 로브로 향했다. 우의로 입으라고 비치해 놓은 매끄러운 로브였다.

소년은 눈에 튀는 푸른 복장 위로 로브를 뒤집어썼다.

소년이 머물고 있는 총괄 부서의 귀빈실은 2층. 1층 홀의 안내 부서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분명 미행이 붙겠지. 점성술사 조합으로 가는 길에서도 시선이 느껴졌는데.

‘그럼 별 수 있나.’

날아서 가야지.

소년은 방의 불을 끄고는 살짝 창문을 열고 몸을 마법으로 띄웠다.

늦은 밤이었지만 총괄 부서의 불은 물론이고 대회의장이 있다는 구역의 불도 환했다. 중요한 회의 같은 경우는 몇 날 며칠 동안도 진행된다니 당장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은 밤하늘 같이 불빛이 알알이 박힌 도시의 상공을 휙 날아 인적 없는 골목길에 내려앉았다. 그 눈앞에는 악마의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집이 있었다.

***

베른의 한 집.

러드콥스키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방 안을 돌아다녔다.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냐.......’

그의 머릿속은 혼란하다 못해 쓰레기장 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이번에 본부로부터 새로 받은 지령은 ‘베른에 온 대선장과 접선하여 우리 편으로 포섭해라!’였다.

포섭하는 방식은 본부로부터의 대본이 있으니 할 만 한데, 접선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그는 바깥으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낮은 물론이고 밤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연맹의 고위 인물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들어 감시가 더 삼엄해졌기 때문이었다.

베른의 경비병들은 그냥 장식이다. 진짜는 사람들 틈에 숨은 경비 마법사들이다. 누가 경비인지를 모르니 나갔다가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접선은 고사하고 생필품도 사러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선장과 접선만 후딱 하고 빨리 빠질 계획으로 들어온 거라, 돈도 식료품도 그리 많이 챙겨오진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몰린 거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버틴 지도 어언 엿새 째. 식료품은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허기 때문에 머리도 잘 굴러가지 않았다.

‘으으, 조직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지만 아사하고 싶지는 않아.....!’

그냥 돈 주고 남에게 시키면 되지 않는가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일단 누가 경비 마법사인지 알 수 없는 마당이고, 그냥 근처 번화가로 가서 사 오면 되는데 시킨다? 딱 봐도 수상쩍은 인물로 낙인찍힐 것이다.

‘갑자기 왜 간부들이 우르르 몰려선! 원래라면 이런 상황까지 몰릴 일은 없는데! 그냥 철수할까? 벌써 며칠 째인데 대선장이 떠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본부에 연락해 일이 죄다 꼬였으니 죄송하다며 철수한다고 연락할까 심히 고민했다.

러드콥스키가 무능해서 실패한 것도 아니고 여러 상황이 안 좋게 겹쳐버렸으니 이해해줄 수는 있으리라.

찍찍

고민하던 그의 눈에 어디서 들어왔는지 쥐가 벽 밑을 쓱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쥐는 발발거리며 기어다니다가 돌연 멈추고는 러드콥스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킁킁거리며 위험을 감지하려 발버둥치는 일반적인 생쥐와는 달리, 그 생쥐는 마치 킁킁거리지도, 꼬리를 들썩이지도 않고 굳은 채 인형 같은 눈알로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름끼치네.’

생쥐는 많이 봤지만 저렇게 요상한 행동을 보이는 쥐는 처음 봐서 은근 무섭게 느껴졌다. 그는 베른에서 사람들이 흔히 입는 평상복 위로 걸친 로브자락을 조이면서 쥐에 대한 신경을 껐다.

한동안 러드콥스키를 응시하던 쥐는 다시 다다닥 기어 다른 쥐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직후.

퉁퉁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러드콥스키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명으로 구입한 이 집에 방문할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마법사들은 폐쇄적이라 모르는 집 문을 막 두드리는 경우도 거의 없다.

‘드, 들켰나!?’

불안한 상상과 함께 마력을 몸 안에서 퍼올린 러드콥스키가 조심스럽게 문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문 바로 앞에 서지 않고 살짝 옆으로 떨어져 벽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지점에 자리 잡았다.

“누구쇼?”

“대선장입니다. 잠깐 얼굴 좀 보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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