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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119화 (120/128)

119화

검증과 인정-9

“그러니까, 자꾸 별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말하시지 마시지요. 여기는 별을 비판하는 장소가 아니라니까요?”

“아니, 뭐 난 사실을 얘기하는 것뿐일세.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별 표정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게 마치 소년과 판박이였다. 안색이 창백한 점성술사였다.

‘점성술사면서 별을 비판한다라. 신기한 사람이네.’

“예전부터 지적하는 바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자꾸 공적인 상황에 꺼내지 않는 게 좋을 듯하네. 우리들의 회의는 어디까지나 정보 교류의 장일세.”

“정보에는 과거의 역사도 포함되네. 지상의 일을 방관하는 별의 행태를 잊지 말자는 의도도 살짝은 섞여 있지.”

“말을 말아야지...... 어쨌건 다시 원 주제로 돌아가면......”

그때, 소년에게 한 사람이 슬쩍 다가왔다.

점성술사 회의의 참석자지만 한 발짝 뒤로 빠져 방관자에 가깝던 점성술사 조합장이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대선장.”

빙글빙글 웃으며 접근하는 조합장의 웃음은 숨긴 의도 한 점 없이 맑았다. 소년은 말없이 목례로 웃음을 받았다.

“해적이 점성술에 관심이 있다니 의외긴 하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에서 길을 잃으면 별을 보고 길을 찾아야 하는 것도 있고, 바다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미신처럼 별에 의존하기도 하니까요. 당장 카톨릭이 별을 섬기기도 하고요.”

“......”

“하하, 과묵하신 분이군요. 그저 대화를 따라가시고 계신가 해서 혹시 모르는 게 있으면 도와주려고 말을 붙였습니다. 점성술사들은 다른 마법 부문과는 달리 정치나 권력에서 다소 멀어져 있으니 경계 않으셔도 됩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부외 참석자가 있으면 원래 설명해주는 것이 조합장의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대선장님, 뭐 궁금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저기 안색이 하얀 사람이 누굽니까?”

“트란실바니아라고, 발칸반도 북쪽에 있는 공국에서 온 분입니다. 토착 종교의 대사제를 맡고 계시죠. 공국이 동부국의 속국이니 따지고 보면 동부국 소속이고요.”

‘동부국이라.’

소년은 기억을 더듬었다.

‘내게 사신을 보낸 국가들 중 동부국은 없었어.’

강대국 약소국 할 것 없이 많은 나라에서 사신을 보냈지만 동부국, 정식명칭 동부의 위대한 제국의 사신이란 직함을 달고 찾아온 이는 없었다. 홀대에 빈정상해서 가버린 이들도 적어두라 했으니 빠졌을 리는 없다.

‘강대국 치고 바다에 관심이 없을 리는 없고. 이번 전쟁 때문인가?’

어쩌면 카스테냐 왕위 계승 전쟁에 급급하다는 걸지도 모른다.

소년은 동부국을 잘 모른다. 접점이 있었을 때라고는 보르도에서 동부국의 왕가인 엘츠아 가문의 마차를 봤던 것과 지하 암시장에서 어떤 여자애와 짧게 만났던 것뿐.

‘강대국이라면 내가 있을 곳으론 적합하겠지만......’

그만큼 기득권의 텃세도 심하겠지. 해군이 모조리 가라앉은 에크나르프조차도 그런 마당에.

“아까 회의할 때 좀 들었는데, 유독 저 사람은 별에게 적대적인 모양이던데요.”

“그럴 수밖에 없죠. 엘프 침공으로 국가가 죄다 결딴났었거든요. 별에게 그토록 기도를 했어도 국토가 모조리 유린당했으니, 별을 믿지 못할 만도 하지요.”

“엘프 침공이라면, 4백년 전 칸국을 얘기하는 겁니까?”

“예. 천 년도 전의 엘프 제국 말고, 4백년 전에 나타났다가 2백년 만에 사라진 칸국, 이른바 엘프 대제국 혹은 칸 제국이라 불리는 그 나라 맞습니다.”

유로파에 있던 두 번의 큰 침공을 헷갈릴까봐 친절하게도 구분지어주는 조합장. 소년 역시 역사책을 읽어 봤기에 크게 헷갈리진 않았다.

“유로파 동부의 피해가 많이 컸던 모양입니다.”

“기록으로 다 못 쓸 정도로 피해가 컸답니다. 어찌나 피해가 컸는지 저기 저 어르신처럼, 유로파나 이슬람권이나 엘프 침공이 있던 곳은 종교적 색채가 많이 옅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르신이라니요?”

저 젊은 얼굴에?

“아, 저기 대사제 분은 400살이 넘으셨습니다.”

“......예?”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나? 초월자는 오래 산다고 좀 들었는데. 그럼 저 사람이?

“저분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기엔 좀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좀 긴데......”

“경청하겠습니다.”

조합장이 소년이 고개를 슬쩍 숙이며 말하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말을 쏟아냈다.

4백여년 전, 엘프 침공이 유로파 동부와 이슬람권 동부를 휩쓸고 다녔을 무렵. 계속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유로파에게 한 차례 승전보가 들려왔다.

바로 트란실바니아라는 조그만 지역에서 악명 높은 귀쟁이놈들을 쓰러뜨렸다는 소식이었다.

유로파의 여러 국가는 합동전선을 위해 반색하여 그들을 찾아갔지만,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돌아나와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긴 게 아니었으니까.

“이건 말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긴 하지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어디서 떠들진 말아주시지요.”

“알겠습니다.”

조합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시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지배자가...... 악마와 계약을 했답니다.

“악마요?”

악마 냄새가 안 나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게 변했습니다. 저기 저 분 모습과 비슷하게 하얗고 빨갛게 변한 데다, 긴 수명과 강력한 힘을 얻었답니다.

“대가는요?”

-모릅니다. 왜냐면 전쟁이 끝날 무렵에 계약 당사자가 악마를 죽여버렸거든요.

“......!”

-거의 전설 취급 받긴 하지만, 역사서에 정식으로 기록된 유일한 악마 사살 사례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악마와 연관되었어도 마법사 연맹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좀 꺼리긴 하지만요.

악마를 죽여서 면죄부를 얻었다......?

소년의 눈이 창백한 대사제를 향했다. 대사제는 갑자기 든 오싹한 기분에 마치 찬바람이 분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래서 저분처럼 엘프 침공 그 당시에 살던 사람이 많이 살아 있어서 저렇게 별과 카톨릭에 적대적인 사람이 아직 많습니다. 아예 토착 종교가 새로 생겼다던데요?”

악마를 죽이고 별과 적대적이라.

악마는 별 관심이 없지만 별을 싫어한다는 말에 소년은 동질감이 들었다. 그래, 그 오만하고 이기적인 놈들은 숭배 받을 가치가 없다.

점성술사들의 회의가 끝나고,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트란실바니아 대사제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인가 대선장.”

살짝 창백한 소년과 분칠한 것처럼 새하얀 대사제. 둘 다 표정이 없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조합장께 트란실바니아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사제의 말에 살짝 날이 서 있었다.

“회의 때도 들었지만 별을 많이 싫어하시던 모양이던데, 그게 마음에 들어서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별을 싫어하는 게 마음에 든다라. 진심인지 빌미인지는 몰라도 그대와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다네.”

소년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악마와도 관련이 있다 들었습니다.”

“......남의 비밀을 너무 들추려 하지 마라. 좋을 것 없다.”

“제 말을 들으면 깊이 생각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악마를 죽인 뒤, 그 후유증이 남았겠지요.”

악마는 결코 곱게 죽지 않는다. 여러 문헌에서건 소년이 직접 겪었건, 악마는 저주덩어리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말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가 살짝 방황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진 않고 있지만 소년의 감각은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 대사제의 눈이 아니라 가슴팍을 보고 있기에 표정관리에 덜 신경 쓰는 듯했다.

소년은 대화가 다 끝난 것처럼 목례하고는 대사제의 옆을 지나치려다가 멈추고는 작게 속삭였다.

-저는 악마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악마의 마지막 발악 역시 흘러 넘겼지요.

“......!”

대사제의 목이 홱 돌아갔다.

-관심 있으시면 연락주십시오.

소년이 뚜벅뚜벅 걸어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엘프 침공 이후 생겨난 트란실바니아 지역 토착 신앙의 대사제는 소년의 짙푸른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

회의실 밖으로 나간 소년은 비슷하게 늙은 두 점성술사, 드루이드 우두머리와 룬 마법사 부족장이 같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 나왔는가. 여기 이분이 자넬 보고 싶어해서 말일세.”

“아 대선장. 만나서 반갑다네.”

드루이드 우두머리와 마찬가지로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거친 스칸디아 사람의 손이 소년의 손을 확확 흔들었다. 덩치와 외모만큼 목소리도 괄괄했다. 무슨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컸다. 그러고 보니까 회의에서도 부족장은 별말을 않았다.

“내 듣기로 지중해에서 유명한 해적이 날뛴다는 소문에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몰라!”

해적질로 먹고 산 적이 있던 스칸디아다. 지금이야 체제가 잡히고 먹고 살만 해지니 해적질은 하지 않지만, 룬 마법사 부족은 드루이드처럼 원시 신앙에서 시작해 발전한 이들이라 과거의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거칠고 싸움 좋아하는 전사의 기질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해적이라, 남자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단어지! 흩날리는 물방울과 세찬 바람에 맞서 철 냄새를 풍기며 삶을 이끌어 나가는 풍운아들이야!”

그렇게 낭만적인 이들은 아닙니다만. 소년은 해적의 구질구질한 생활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가타부타 하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식사나 하지 않겠나?”

먹을 게 귀하던 옛날에는 먹는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대식가가 존경을 받거나 국왕은 대식가여야 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며, 여러 음식을 잔뜩 차려 놓는 옛 방식의 귀족적 상차림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초원이나 사막의 유목민 같이 척박한 환경의 문화권에선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환영의 의미다.

따라서 드루이드나 룬 마법사 부족 같이 옛 방식을 보존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식사란 관계를 맺는 관문이며 중대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기꺼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소년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구세프가 억지로 먹었던 드루이드 식단도 소년에게는 나름의 풍미로 인해 먹을 만했다. 일반적인 농가의 맛없는 수준만 아니라면야.

“좋지! 자네 술 할 줄 아나? 아니지, 모습은 어려도 당당한 성인이고 해적이니 술 정도야 잘 마시겠지. 엘더! 오늘은 스칸디아 전통 식당으로 가지 않겠나?”

“뭐, 나쁠 것 없지.”

스칸디아의 전통적 식단 메뉴는 단순했다. 추운 곳에 향신료가 있을 리가 없으니 재료의 풍미 그대로인 요리법이며 농사가 잘 되지 않는 곳이라 고기의 비율이 높다. 과일과 곡물의 비중이 적긴 해도 드루이드의 입맛에도 맞는 식단이었다.

“그런데 제가 돌아다녀본 바로는 스칸디아 음식점은 못 봤는데요.”

“당연하지! 스칸디아는 간판 같은 건 안 걸어놓거든! 그래서 숨겨진 맛집은 찾기 어렵지!”

‘숨겨진 맛집!’

소년의 눈이 빛났다. 뭔가 식도락가의 본능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자 어서 가세! 내 벌꿀술 잘하는 집을 알거든!”

큼직한 덩치 둘이 조그만 하나를 끼고서 거리를 걸어갔다. 유달리 소년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헥헥헥!]

주인을 따라가면 맛있는 게 많다는 걸 학습한 검둥이의 발걸음도 신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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