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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117화 (118/128)

117화

검증과 인정-7

“여러분들께 귀띔해드렸듯,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은, 순수한 사령술이 발견되었습니다.”

순수한 사령술. 검은 역병 이전의,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은 사령술이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금 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걸 익히고 있는 이가 누굴 가리키는 지는 모두들 알고 있다.

아소르스 제도를 처음으로 통합시킨 1대 대선장의 제자인 2대 대선장.

“연락드린 당일, 그 ‘당사자’는 저희 사령술 및 악마 대응 부서에서 가장 악마의 힘 감지력이 뛰어난 쟈하드 알무드의 검증을 마쳤습니다. 그 결과는...... 악마의 힘은 없다입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금지되어왔던 것에 대해 태도를 달리할 때가 온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니 모두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은 사령술이 있다면, 악마 숭배자 격퇴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느냐며 제의해왔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알 거라 믿습니다.”

그건 거래였다.

인정해준다면 한 손 보태겠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환영이나, 연맹은 한 사람에 의해 휘둘러지지 않는 단체이니 이렇게 모두의 고견을 구하기 위하여 불렀습니다. 하여 이 자리에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난 반대요.”

구세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발언했다.

허름한 물 빠진 갈색 로브를 깊이 쓴 채, 턱끝의 짧은 수염만 간신히 내보이고 있는 인물이었다. 연맹의 첩보 부서장이라는 의미의 문장을 가슴팍에 붙이고 있는 그는 목소리를 변조시킨 채였다. 어쩌면 저 드러난 턱 부분도 위장한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자에 대해 많은 걸 모르오. 실력만 해도 그렇소. 그 ‘당사자’의 실력은 대략 소문으로는 알고 있겠지만, 우리 부서의 입장에서는 소문보다 상향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대마법사급이라고는 하던데. 그보다 더하단 말입니까?”

누군가의 의문에 첩보 부서장이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사자의 실력은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마냥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오. 어쩌면 지금껏 보인 실력도 일부를 숨겼거나 아니면 과장시켰을 수도 있소이다. 연맹의 첩보망조차도 당사자에 대한 유의미한 정보는 별로 찾아내지 못했소.”

그러면서 정보 부서장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이, ‘당신이 아는 것처럼 말이지’라고 얘기하는 듯했다.

첩보 부서가 다양한 수단(어쩌면 떳떳하지 못한)으로 얻은 여러 정보를 취합하여 적당히 거르고 정리하는 게 정보 부서의 역할이다. 사실상 첩보 부서의 얼굴이자 하위조직인 정보 부서이니만큼 특급 기밀을 제외하곤 첩보 부서가 아는 건 정보 부서 역시 안다.

정보 부서장이 말을 받았다.

“첩보 부서장님의 말이 맞습니다. 알려진 당사자의 정보는 그렇게 유의미한 게 별로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대부분 뜬소문 아니면 목격담이지요. 그와 어깨를 맞대고 싸우던 카스테냐 해군 수뇌부에서도 당사자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는 별로 얻지 못했습니다. 회의도 참석 안하고 기껏해야 승전 파티에나 좀 참석한 정도라서......”

정확히 얘기하자면, 드러난 정보는 많았으나 쓸만한 게 별로 없었다.

대선장에 대한 모든 정보들은 베른에서 있었던 일이나 카스테냐 해군 본부의 장교들에게 들은 것 등 신빙성 있는 출처에서 나온 일부를 제외한다면 죄다 소문을 그러모은 단편적인 정보 쪼가리에 불과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연맹이 아소르스 제도와 해적들 사이에 상주하는 정보원을 끼워 넣고 있던 게 아니니까. 어쨌거나 정보에 하자가 있는 건 분명했다. 해적들의 허풍이 첨가된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 심하게 부풀리거나 앞뒤를 잘라버린 소문일 수도 있다.

당장 과거조차도 불분명하다.

한때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정보로 볼 때 빈민가 출생일 가능성이 높고, 가문 모를 검은 기사가 따르는 걸 볼 때 몰락 귀족 혹은 사생아일 가능성이 높으며 자연스러운 귀족적인 언사 등은 검은 기사가 그걸 가르쳤을 것이란 추측이 우세했다.

죄다 ‘아닐 수도 있는’ 추론에 불과했다.

더구나 대선장은 성격조차도 스스로 오만함의 장막을 걷고 진짜 성격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인물이다. 그래서 정보의 신뢰도는 더 하향조정해야 했다. 대선장이 거짓 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으니까.

전대 대선장 역시 정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마법사 엘리자와의 전투 기록에서 보인 사령술의 위력 말고 그 이전의 행보는 깜깜했다. 니아트리브에서 수상한 행각이 들켜 사건을 일으켰고 에크나르프에서 큰 참사를 일으킨 것으로 추측(에크나르프는 끝까지 사령술이 개입되지 않은 단순 해적 습격이라 우기고 있었다.)되는 걸 제외하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처럼 알려진 게 없는 상황입니다. 만일 그게 모두 대선장이 의도하여 자신의 정보를 차단한 것이라면, 어쩌면 악마의 힘조차 숨길 수 있는 방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그는 악마숭배자와의 접점도 있습니다.”

대선장이 주장한 카스테냐 귀족을 죽이고 악마의 힘이 깃든 총을 빼앗았다는 말은 반만 믿었다. 그게 다 거짓말이고 대선장이 악마 숭배자 편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최악의 경우엔 악마 숭배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숨기는 법을 찾아냈을 수도 있다. 놈들이라고 놀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저 역시, 사령술을 인정하는 걸 공포하는 데는 신중하자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완전 반대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는 모두 추측입니다. 정말로 단순한 목적일 수도 있기는 합니다. 자신의 힘을 인정받는 것 말이지요.”

아닐 수도 있다는 핑계를 대며 은근슬쩍 논쟁에서 빠지는 정보 부서장. 정보를 다루는 입장인 만큼 결과적으로는 중립 입장이어야 했다. 그러면서 이상한 눈치로 첩보 부서장을 보았다. 저 양반이 웬일로 중립이 아니지?

“나는 반절만 찬성이오.”

회의실 한켠에서 누군가 말을 내뱉었다. 연맹의 제 3 행정 부서장이었다. 연맹이 큰 만큼 행정 부서는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진 몰라도 악마 숭배자 놈들이 부쩍 날뛰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외다. 그러는 바람에 연맹의 통제를 뚫고 조금씩 소문이 새어나가고 있기도 하오. 저기 아나톨리아 쪽에 출장 나갔다가 들은 건데, 마을이 통째로 실종된다는 소문이 동부 지역에서 돌고 있었소. 술탄국 쪽에서도 막고는 있다지만 그 막고 있는 자들도 사람이니 크게 소문이 번지는 건 시간문제요. 그럴 바에는 당사자를 연맹에 편입시켜서 악마 숭배자를 서둘러 색출하는 데 써야 하오.”

“그렇다고 위험성이 있는 자를 연맹에 들일 수는 없소. 사령술 인정도 시기상조요.”

첩보 부서장의 말에 3행정 부서장이 고개를 저었다.

“바로 들이잔 얘기가 아니오. 사령술을 인정하는 것도 힘든 일이란 것도 알지. 안 그래도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와 사령술사와의 싸움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데 그랬다가는 연맹이 신뢰를 잃을 거요. 내 말은, 그 중간 지점을 찾아보잔 거요. 사령술 공식 인정은 안 되지만, 악마 숭배자와 싸울 때만 쓸 수 있다는 식으로......”

그 말에 누군가가 말했다.

“당사자의 사령술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악마 숭배자와의 싸움에 동원할 생각이오?”

첩보 부서장처럼 로브를 뒤집어쓴 자였다. 목소리 역시 변조되어 있었다. 첩보 부서장처럼 가슴팍에 뭔갈 매달진 않았지만 연맹 하부 비밀 조직 중 하나의 장이거나 간부이리라.

“카스테냐가 대선장에게 푸대접을 했다가 얻어맞은 건 유명하지 않소? 지금 그 얘기가 카스테냐의 짓과 뭐가 다르오? 당사자가 원하는 건 인정이오. 그 말을 꺼낸 자체만으로 연맹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단 의도란 거지. 그런데 그 의도를 짓밟으면서 연맹이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 있는 도구로 삼겠다? 당사자의 반발을 생각은 하고 말하시는 거요?”

“하지만 연맹이 공식적으로 사령술을 인정할 수는 없는 법이오. 만약 그 당사자를 인정해 준다 칩시다. 그 여파는 연맹이 손쓸 수가 없소이다. 생각해 보시오, 손짓만으로 시체를 일으켜 군대를 만들 수 있소 군대를! 전대 대선장이 일으켰다는 의심을 받은 보르도 사태를 생각해 보시오! 단 한 명의 사령술사로 인해 대도시가 무너졌거늘. 어떤 나라가 무서워하지 않겠소? 어떤 나라가 당사자를 손에 넣고 싶어 하지 않겠소?”

제 3 행정 부서장이 찬성한 것은 사령술사를 적 사령술사와의 싸움에 동원한다는 것뿐이지 그 외는 사실상 반대였다.

“맞소이다! 인정은 둘째 치고 그자가 난동을 부릴 수 없도록 족쇄부터 걸어놔야 하오. 그자는 위험성이 확인되지 않은 맹수나 마찬가지요. 이빨과 발톱을 감싸 위험성이 없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소이다.”

“나도 동의하오. 사령술의 공개적 인정은 허용할 수 없소. 한 번 둑에 구멍이 생기면 그걸 도로 메우기란 어려운 법이지.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 종군이 한 번 일어나니까 다른 나라에서도 마구잡이로 종군 허가를 요청하지 않았소? 부랴부랴 규칙을 제정해서 틀어막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사방에서 주장이 쏟아졌다. 대다수는 ‘당사자’를 믿지 못하겠으니 감시하면서 써먹자는 주장이었다.

그들 스스로도 이기적인 주장이라고 인식하고는 있었다. 카스테냐처럼 당사자의 분노가 연맹을 향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당사자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그렇게밖에 주장할 수 없었다.

해적이고 사령술사다. 둘 다 신뢰를 주기 힘든 족속들이다. 그 두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대선장을 믿었다가 뒤에서 칼을 맞으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어진다.

사령술을 인정하는 것도 문제다.

이들 수뇌부는 인정한다 쳐도, 수많은 다른 마법사들은 어떻게 납득시킬 생각인가? 이미 보르도에 있었던 참사와 엘리자의 전투기록은 마법계에 다 퍼진 지 오래라 사령술에 대한 경계는 높고도 높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연맹의 권위가 떨어지는 건 물론이요, 여러 왕실이나 교황청이 개입할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연맹은 산산조각날지도 모른다.

이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시도여서 사령술사와 싸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만 보고 함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보편적으로 마법사는 학문적 호기심에 매달리며 마법과 자연에 대한 탐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회의장에서 떠드는 마법사들의 모습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선장의 힘은 마법학적으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단 것 때문에 충분히 학문적으로 연구 대상이었지만 지금 논의하는 것들은 학문과는 거리가 먼, 모두 정치적인 이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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