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116화 (117/128)

116화

검증과 인정-6

[성전 정기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성전. 별의 계시를 받아 신대륙으로 향한 교황청의 병력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거룩한 싸움에 대한 보고였다. 얼마나 많은 ‘멸망의 징조’를 없앴는지, 사상자는 얼마나 되는지, 현지 소식은 어떤지에 대한 것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고?”

[예. 그래서 혼란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힘들어졌습니다.]

“멸망의 징조들은 얼마나 치웠지?”

[각국 식민지가 진출한 개척지 근방은 모두 지웠습니다.]

“그 말은 모두 지우지 못했다?”

[개척된 곳을 제외한다면 너무 나무가 우거진 밀림이고 괴물도 심심찮게 나와 더 이상의 교황청 군대의 진입이 어렵습니다. 이미 놈들이 지리적 우세를 점한 터라 아군 피해도 만만찮고요. 애초에 탐험가들도 지도를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한 상태입니다.]

험한 신대륙의 밀림은 수십 년 동안 많은 모험가들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짐승이나 원주민만 있다면 모를까, 깊숙한 곳에는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소용없는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이 많다고 소문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이만 철수하고 정세가 안정적일 때 다시 파견하도록 하겠네. 아, 그나저나 신대륙에 대한 명칭은 제대로 정해졌나? 발견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저 큰 땅에 아직 제대로 된 이름도 없다니 원.”

[신대륙을 누가 처음 발견했는지 지금껏 싸우고 있어서 아직도 가칭으로만 부릅니다. 아무래도 발견자에 따라서 영토가 나눠지기 때문에 치열한 모양입니다. 그것도 이젠 끝이지만요.]

“반란 때문에?”

[예. 카스테냐가 몰락하는 바람에 카스테냐 식민지가 먼저 들고 일어났다가 이에 고무된 타국 식민지 역시 독립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대선장이 카스테냐를 몰락시킨 결과는 저 멀리 떨어진 신대륙에 격변을 일으켰다.

수천km 떨어진 신대륙에서의 일을 보고받는 사제의 눈에는 노골적으로 짜증이 어렸다. 왕위 계승 전쟁은 족히 몇 년, 질질 끈다 싶으면 십 년은 훅 지나가는 긴 전쟁이다.

그 동안 멸망의 징조를 가만 놔둬야 할지도 모른다니 원.......

“후우, 이 또한 신의 뜻이겠지. 모두 복귀하도록 해. 혹시 반란에 피해본 건 없나?”

[그건 없습니다. 애초에 모두 카톨릭 신도니까요.]

신대륙의 반란은 원주민이 들고일어난 게 아니었다. 흰 얼굴이 흰 얼굴을 상대로 일으킨 것이었다. 반란군의 공격 대상은 대서양 너머 유로파의 본국에서 보낸 병력이지, 교황청의 군대가 아니었다.

“알겠다. 풍랑에 안 휩쓸리게 조심하고, 실수로 북대서양으로 안 빠지게 조심하게나.”

[예, 알겠습니다.]

유리판에 투영되던 흐릿한 잔상까지 완전히 사라지자 사제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숄을 확 끌어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그 바람에 뒷목이 쓸려 빨개졌다.

‘대체 왜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별의 계시를 받고 멸망을 막으려 하는 이 숭고한 행위가 어째서 방해받아야 한단 말인가!

‘옛날이었다면 문제없었을 텐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교황의 군대라면 넙죽 엎드려 간이고 쓸개고 죄다 빼 줄 것이며 교황청의 임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반란일자마저 늦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성한 군대에게 제값을 받고 물건을 파는 것도 모자라 반란으로 방해까지 해?

이게 다 타락해버린 놈들 때문이라며 사제는 속으로 종교를 저버리고 돈에 물들어버린 유로파 인들을 욕했다. 어째서 신의 뜻을 받드는 이들을, 우리들을 방해한단 말이냐!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계획은 기필코 성공해야 한다.’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옛날의 지하 감옥을 연상케 하는 검은 돌로 이뤄진 석실이었다.

괴물과 인간의 일부였을 신체부위들이 흰 천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배가 훤히 갈라진 고깃덩이가 여기저기 매달려 재료를 제공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사방에 깨끗한 유리로 만든 실험도구들이 번들거리며 불빛을 반사했으며 대체 무슨 액체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담긴 수많은 병들이 와인저장고처럼 쌓여 있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을 신앙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말을 듣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치워버려야 해.’

고위 사제는 섬뜩한 광경 한복판에서 광신에 찬 눈으로 다짐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욕심 없이, 오로지 신앙만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군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의 뜻을 설파하는데만 쓰일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

하얗고 정결하기만 한 카톨릭의 심장부인 교황청에 이런 끔찍한 곳이 있다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오랫동안 쌓아올린 부는 검은 오욕의 역사 위에 흰 천을 씌워 가리기에 충분했다.

***

마법사의 도시 베른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사람들이 몰리며 이것저것 구매하면서 경제가 돌아가고, 자기 할 일을 찾아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가득한 도시. 가끔 무모한 실험으로 인해 사고도 일어나고 마구간에서 사건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는 경우지만 그 정도는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일에 불과했다. 물론 마냥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어서, 추가적으로 보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예산이 털려버린 접대 부서 직원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기도 했다.

평소와도 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로, 마차들이 달렸다.

급하다는 의미가 달린 깃발을 단 마차였다. 그 깃발 앞에서는 누가 타고 있건 옆으로 비켜 길을 틔워 줘야 했다. 덜그럭거리는 요란한 말발굽과 마차바퀴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런 마차가 한두 대가 아니라 무려 다섯 대가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저 마차들은 한 학파에서 고매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타는 마차였다.

“뭐지?”

마차들 위에 세워진 깃발은 보통 전령을 의미하는 기수가 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령은 마차를 타지 않는다.

“보통 저런 걸 안 매다는데 무슨 일이 있나?”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며 이례적인 상황에 모두들 궁금해했다. 듣는 귀가 좀 있는 이들은 암암리에 퍼진 소문의 진상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며 흥미로워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 이들은 얼굴을 잔뜩 굳힌 채, 오늘 있을 ‘회의’의 결과를 노심초사 기다렸다.

***

총괄 지부 건물의 가장 큰 첨탑 바로 밑에 자리한 대회의장.

쿠당탕!

큼직한 문이 거칠게 열리고 마법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고위 마법사들이었다. 회의실에는 그들 말고도 유명한 마법사들이 한가득이었다.

앉아 있던 이나 방금 들어온 이나 하나같이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들의 주의는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붉은 수염이 인상적인 고위 마법사, 우크란 출신의 예르게니 구세프.

그 옆으로는 연맹의 정보 부서장이 정보 부서 소속이자 첩보 부서 소속인 슈라이크와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부터 나온 은밀한 정보가 정보 부서를 통해 다른 고위 마법사들을 이곳으로 이끈 것이다.

방금 문을 박차고 들어온 마법사 무리 중 성격 급한 이가 성큼성큼 둘의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인가?”

“마음은 알겠지만 모두 모이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올 때마다 말하자니 입이 아픕니다.”

이 말도 몇 번이나 한 말이었다.

“그런 급박한 정보에도 이렇게 태연한 것도 신기하군그래.”

“자세한 얘기는 회의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세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성급한 마법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나 구세프나 똑같은 부서장의 지위라 더 따져 물을 수도 없고 말마따나 사람이 올 때마다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모두가 모였을 때 한 번에 설명하는 게 나았다.

한 학파를 이끄는 동시에 마법사 연맹의 부서 하나를 맡고 있는 인물을 따라 같이 들어온 학파 인물들이 우르르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같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그러므로 기밀에도 어느 정도 접근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 뒤로도 정오가 될 때까지 마법사들이 마구 회의장으로 들이닥쳤다.

개중엔 조용히 착석하는 이들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성급한 이들도 있었다. 구세프는 그저 짤막하게 말하곤 다시 입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 정오가 되었다.

끼릭거리며 대회의장의 문이 굳게 닫혔다.

빠진 이는 없었다. 마법사 연맹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이 큼직한 공간 안에 모두 모여 있었다. 심지어 평소에는 몸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내부 조직까지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한쪽에 몰려 있었다.

복장도 외모도 천차만별이었다. 개성에 따라, 맡은 임무에 따라, 학파의 특성에 따라 갈라지며 파벌을 이룬 마법사들. 이들이 가진 힘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이들이 모두 한 곳을 향해 두 눈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는 이들이 이곳에 모이게 만든 인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구세프와 슈라이크, 그리고 연맹의 정보 부서장.

이렇게 많은 이가 대회의장에 모이는 일은 드물다. 구세프를 비롯해 여기 모인 이들 역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적을 보는 건 사실상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맡은 모든 업무를 내팽개치고 참석한 이 자리. 과연 이 자리가 어떤 자리길래 이런 것일까?

정보 부서장이 악마 대응 부서장인 구세프를 향해 속삭였다. 이제 시작해도 된다고.

회의는 안건을 제시한 이가 주관하는 것. 그러니 사령술 및 악마 대응 부서장이 주관할 문제였다.

“모두들 제 연락을 듣고 다 모여주셨군요.”

그렇게 운을 떼자마자 성급한 몇몇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당연하지! 어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궁금해서 안 올 리가 있나!”

“일생일대의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기회인데 어찌 안 오고 배기겠나!”

노인과 학자풍의 중년 마법사였다.

노인은 무려 연맹의 부회장 자리를 맡은 사람. 중년 마법사는 악마학 및 사령술 연구 쪽에서 유명한 연구가였다.

“큼, 조용히 해주십시오. 아직 말 안 끝난 것 같던데.”

정보 부서장이 핀잔을 주었다. 노인이 커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말은 헛소리라 하지만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저 주책맞은 노인네. 말이랑 생각이 정 반대라니깐.

좌중이 조용해지자 구세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께 귀띔해드렸듯,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은, 순수한 사령술이 발견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