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검증과 인정-4
유로파 어딘가.
탁자에서 책을 읽고 있던 이는 새까맣고 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촛불을 갖다 대도 로브 안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뒤집어쓴 것이 앞은 보이는지 의문인 차림새였다.
덜컥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로브를 쓴 이는 방 안으로 들어온 이를 보고 로브의 소맷자락을 길게 늘이면서 책을 덮었다.
막 들어온 이도 마찬가지로 로브를 푹 눌러쓴 이였다.
“무슨 일이지?”
상대방에게서 여기 찾아온 용건을 듣자, 검은 로브 밑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카스테냐의 세빌 백작이 마차 사고로 죽어?”
“예. 그렇다 합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대지께서도 무심하시지!
적그리스도 후보를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 주는 건 또 얼마나 힘든 일인데!
적그리스도 후보들은 ‘악인’이라고 불릴 법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 그 태생이 어떻건 성장 환경이 어떻건 상관없이 폭력과 피를 선호한다.
그게 겉으로 드러나는지 아닌지는 별개라서 누가 후보인지 찾기도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것처럼 힘들고, 그 이후에 그들의 살심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구설수 없도록 조정하는 것도 힘들다. 대부분 악행을 저지르다 들키거나 제 살심을 못 이기고 날뛰다 몰락하거나 죽는다.
그런 면에서 세빌 백작은 꽤나 괜찮은 인물이었다.
소인배라 편협하지만 그래서인지 잔머리는 잘 굴려 처세술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그래서 구설수 하나 없이 악마가 내려준 능력을 잘 활용하여 카스테냐 정계를 손아귀에 넣었는데......
‘하아, 어찌 이토록 허무하게 간단 말이냐.’
십 년이 넘는 투자의 결과가 파산이라니!
“저,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석연치 않다고?”
하수인이 전해준 정보들은 확실히 수상한 냄새가 풍겼다.
우선 마차 하나만 떨어진 게 아니라 그 주변 호위병들까지 모두 다 같이 떨어졌단 것, 또 절벽에서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호위병들의 시체들이 모두 하나같이 목이 부러져 있단 것, 그리고 세빌 백작 역시 마차 안에서 목이 부러진 채 발견되었단 것과 손가락이 잘려 있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세빌 백작에게 붙여 두었던 해골 기사들의 실종까지.
“......이건 본보기인가?”
납치해 실종처리하는 것도 있고 낙마를 유도하거나 그냥 마차만 밀어버려도 될 것을, 대놓고 그런 흔적을 남긴다?
“카스테냐 정계에서도 세빌 백작이 암살당한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용의자는?”
“대선장입니다.”
“대선장? 아. 그래 최근에 카스테냐를 거꾸러뜨린 해적 우두머리라 소문이 자자하던데. 마법사왕이라고도 불린다지?”
“세빌 백작이 죽은 날이 대선장이 마드리드에서 포상을 받은 날입니다.”
“그 포상이 박했겠지?”
“예. 고작 1만 리브르만 줬다고 합니다.”
“1만 리브르라......”
유로파 귀족 사회에서 모욕적인 의미를 담은 1만 리브르. 마법사를 적으로 돌린 멍청한 카스테냐 이야기는 후미진 곳을 제외하곤 이미 전 유로파에서 유명했다.
로브의 두건 그림자 밑에서 서늘한 눈이 빛났다.
“대선장과 접선할 방도를 찾아라. 베른 근처에 있는 녀석 보내봐.”
“혹시 보복하실 생각이십니까?”
“보복? 아니. 그 반대다.”
앉아 있던 검은 로브의 인물이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곤 물러갔다. 방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대선장. 미심쩍은 게 한둘이 아니야.’
이전에 해방 결사단에서는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가 죽인 강력한 사령술사, 전대 대선장을 되살리기 위해 악마들과 접선하여 영혼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온 사령술사의 영혼은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렇다면 죽은 척 했단 얘기다. 그럴 경우엔 전대 대선장의 실력은 훨씬 상향조정해야만 해!’
그 강력한 번개 폭풍과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단 얘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단 방증이다.
‘전대 대선장이 살아있다면, 그 제자에게 아직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거나...... 아니면 지금 대선장이 그 본인일 수도 있어.’
10년의 투자는 날아갔지만 더 큰 투자처와 접선할 기회가 생겼다.
***
취조실에서 나온 소년과 붉은 수염의 마법사의 사이는 제법 훈훈했다. 아니, 사령술 및 악마 대응 부서장의 일방적인 추파에 가까웠다.
“무례는 다시 한 번 사과하겠네. 내가 맡은 부서 애들도 그렇고 악마 얘기만 나오면 눈이 뒤집혀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살다 보면 급해서 앞이 잘 안 보일 때도 있는 법이지요.”
“그렇지. 하지만 마법사로서는 지양해야 하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나도 심신을 좀 더 수양해야겠지만 말이야. 하도 일거리가 많다 보니까 요새 신경이 민감해서 추태를 보였네.”
몇 번이고 사과하는 사령술 및 악마 대응 부서의 부서장, 예르게니 구세프의 붉은 수염이 멋쩍은 웃음에 흔들렸다.
소년은 구세프의 빨간 수염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구세프를 면밀히 분석했다.
‘거짓인가 아닌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강단을 가진 이는 흔치 않다. 자존심이란 건 굽히기 힘든 철심 같은 것이라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걸 안다고 해도 그걸 실제로 행하는 건 힘든 일이다.
‘내게 사과를 한 이유는 어떻게든 나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함이겠지. 그 이유는 악마 잡는데 도움이 된다니까 그런 거겠고. 아까 거세게 나온 것도 원래 성격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악마 문제를 중요시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게 맞는 거 같다.’
영웅도 화를 낼 때가 있는 법이고 살인마도 자비를 베풀 때가 있는 법. 소년은 철저한 분석 끝에 구세프에 대한 경계 정도를 조금 내렸다. 악마 문제를 빼고는 그렇게 꽉 막힌 이는 아닌 것 같았다. 절대로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기대감에 그런 게 아니었다.
또 몇 발자국 걷자 구세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 자네 ‘호기심’에 관한 건 말이지, 일단 조금 시간이 걸릴 예정이네. 연맹 총괄 부서 사람들이 늘 베른에 붙어 있는 게 아니거든. 연락을 해서 불러와야 하는 것도 있고, 또 합의도 좀...... 오래 걸릴 걸세.”
아무렴, 수백 년 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사령술에 대한 문제다. 사령술을 정식으로 인정하려면 그 오랫동안 쌓여온 편견의 지층을 걷어내야 한단 말과 같았다. 더욱이 전대 대선장이 일시적으로 끌어올린 사령술에 대한 공포도 일소시켜야 하고 말이다.
“일개 해적의 ‘호기심’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는 소년. 물론 둘 다 그 대답이 체면치레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구세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정말 이게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완벽하게 예의바르다. 숱하게 봐온 유수한 귀족의 몸가짐과 어투다. 지금까지 보였던 오만한 성격이 다 연기라니. 첫인상과 너무 달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무슨 밀랍을 얼굴에 씌운 것처럼 변하지 않는 표정 역시 거리감을 느끼는 데 한몫했다.
소년은 더 이상 야만적인 해적을 연기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한 번 정체를 드러낸 이상 소문은 쫙 퍼질 테지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성격은 필요 없었다.
‘설마 이중인격 정신병자는 아니겠지.’
둘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슈라이크 역시 질린 눈을 하고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지위에서 일하는 만큼, 앞에서는 예의바르나 뒤에서는 추한 이들을 그는 수없이 봐 왔다. 소년의 태도 변화는 그런 이들 수준으로 컸다.
야만적이고 오만한 해적과 너무나도 예의바른 귀족의 몸가짐의 차이가 워낙 커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은근하니 혐오감마저 느껴지는 표정 없는 얼굴 탓인가?
“그런데, 사령술과 악마 대응 부서는 어쩌다가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요?”
“이 부서는 일단은 비밀 부서일세.”
“아, 그렇습니까. 자제하도록 하죠.”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만 않으면 돼. 악마란 게 알다시피 많이 불길한 단어지 않은가.”
유로파 어디선가 악마와 그 숭배자들이 날뛰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면 모두가 공포에 떨어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 사정이란 게..... 많이 복잡해. 악마랑 악마 숭배자 때려잡는 위험한 부서가 설마하니 돈을 보고 만들어졌겠나.”
“......”
구세프가 말을 줄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창설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악마라 처리해야 한다는 것 말고도 원한관계 있는 이들이 힘을 모아 만들었겠지.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 하니 대응 부서에 지원한 이유야 뻔하다.
“그럼 실례지만 부서장님께선 원래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부서에 들어오기 전에요.”
“......그냥 뭐 평범한 학파에서 일하던 일개 마법사였지. 그저 그런 실력에 그저 그런 봉급을 받고 그저 그런 삶을 살던.”
왜 들어갔냐는 말이 아니라 그전에 뭘 했냐는 물음이라 그런지 기분나빠하거나 하는 기미는 없었다. 구세프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눈빛을 보면서 복도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는 수심이 깃들어 살짝 쳐진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대화는 끊겼다. 소년도 눈치가 없지는 않아 조용히 있었다.
‘괜찮은데?’
소년은 이 구세프란 나이든 마법사가 마음에 들었다.
어떠한 계기로 인해 악마 숭배자 잡는 부서로 몸을 투신했는지는 모른다. 한순간의 분노로 인한 건지 아니면 분명한 복수계획을 세웠는지. 하지만 겁먹고 세상에 순응하는 게 대부분인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구세프는 그런 평범한 이들보다는 나은 강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원한을 가졌단 얘기는 마음에 무언가 상처가 났단 것. 그 쓰라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는 높이 살 만 했다.
‘의지를 가진 이는 존중받아야해.’
자신의 지배를 거역한 마법사와 사령술 앞에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디야브가 떠올랐다. 운명을 거역하겠다는 힘든 의지를 이끌고 온 소년이니만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를 밝게 빛내는 이들이 눈부시게만 보였다.
‘조금은 성심껏 도와줘야지.’
만일 사령술이 순조롭게 인정된다면 말이다.
의지의 불꽃을 존중하고 꺼지지 않게 도와주는 것. 그건 운명 자체를 거부하는 소년의 노력이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도기도 했으니까.
......절대로 밥을 사준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