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검증과 인정-3
“미안하네.”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 붉은 수염의 마법사. 한 줌의 주저도 없었다. 정말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켜 이득을 계산했거나 아니면 이 행동을 표하는 데는 잴 것도 없단 얘기다.
“정말 미안하네. 사실 검증은 끝났네. 자네는 악마에게 혼을 판 이가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안심할 수가 없었어. 우리는 자네 스승이 강력한 사령술사였으니 자네 역시 사령술사라 생각했네. 그래서 우리는 자네가 사령술사라고 상정을 하고 이처럼 압박을 가한 거야. 연맹에게 있어서 사령술과 악마는 큰 위협이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네. 자네를 죄인 취급한 것은 진심으로 사과함세.”
오 이런. 이러면 좀 꼬이는데.
‘......나 사령술사 맞는데.’
오만하고 천한 해적에게도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연맹에서 사령술과 악마는 정말 큰 문제로 다뤄지고 있단 얘기다. 이렇게까지 큰 문제취급 된다면 비록 악마와 계약하진 않았으나 사령술은 영영 쓰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봤자 의심부터 할 테니까.
“해방 결사단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령술사의 단체일세. 지금까지 꼬리만 끊고 달아난 적이 수도 없이 많아. 조그만 실마리라도 알아내 뿌리 뽑아야 할 필요가 있어. 자네의 사소한 정보 하나도 우리에겐 중요하다네.”
“......”
“다시 한 번 사과하겠네. 정말 미안하네. 원한다면 물질적으로 배상을 해줄 수도 있다네.”
“으음. 뭐 그러시다면야. 그 사과, 받아들이겠수다.”
얼떨떨한 상황에 소년의 말투도 조금 누그러졌다.
물질적 배상이라는 단어를 먼저 내뱉을 정도라니.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상대를 짓밟으려 들면 오히려 상황이 꼬여버린다. 압박도 적당히 해야 하는 법이다.
살벌한 분위기를 만든 건 어디까지나 소년이 저들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것. 상대방의 저의를 확인했으니 이제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럼 묻겠네. 자네와 싸운 카스테냐의 귀족이 혹 죽지 않는 이를 데리고 다니지 않던가?”
“아. 그렇더만요. 죽지 않는 기사를 다섯이나 데리고 다니던데.”
“그리고 그 안은?”
“갑옷 밑에는 뼈밖에 없었습죠.”
소년이 전리품으로 챙긴 죽지 않는 기이한 기사들의 갑옷 안에는 앙상한 백골뿐이었다. 그 어떤 살점과 피도 없이 그저 뼈만이 갑옷을 지탱하고 있던 것이다. 소년처럼 시체로 되살렸다 살점이 다 썩어 없어진 건지, 아니면 뼈만 깔끔하게 되살린 건지는 몰랐다.
-맙소사. 설마하니 카스테냐까지 손을 뻗고 있었을 줄이야.
-귀족에게까지 선이 닿아 있다니, 놈들의 세력이......
-그동안 유로파 동부에서만 날뛰는 줄 알았더니만.
붉은 수염 마법사의 탄식과 동시에 그들의 불안한 소근거림이 꼬물거렸다.
뭔가 중요한 문제에 발을 담근 것 같은데. 소년은 좀 더 파보기로 했다.
“놈들이 그렇게나 큰 문제라도 되오?”
“그렇다네. 놈들은 악마를 숭배하는 사악한 의식에 사람들을 바친다네. 외진 곳에 사는 이들이 통째로 실종된 적이 무수히 많아. 검은 역병 때와 같은 파국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을 저지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고 사명일세.”
“검은 역병...... 수백 년 전 전염병이 크게 돈 게 사령술사들의 짓이란 말이오?”
“일반적인 역사책의 내용은 많이 각색되었지. 아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려가 앉아서 차분히 얘기하도록 하세. 아까 내가 보였던 무례는 다시 한 번 사과하지. 그만큼 우리도 절박해서 말이야.”
소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이 최적의 때일지 모른다.’
마법사들이 나가려 하자, 소년은 손을 휘둘러 문이 열리지 못하도록 막았다.
“무슨 짓인가?”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이 하나 있는데.”
소년의 눈은 세우타에서 자신을 대면한 마법사 슈라이크를 향하고 있었다.
“이보게, 저 자에게 무례라도 범했는가?”
“사신으로 갔을 때 조금 강압적으로 얘기하긴 했습니다만. 만약 불쾌했다면 사과드립니다 대선장. 사령술사라고 의심하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 사과를 받겠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 말에 슈라이크는 로브 안쪽으로 차가운 손이 쑥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오만한 성격은 연기였나!’
소년의 말투가 손바닥 뒤집듯 전혀 다르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아까 같이 오만한 말투가 아니었다. 정계의 귀족이나 보일 법한 극도로 절제된 예의바름과 그 특유의 억양이 그 짧은 문장에 모두 담겨 있었다. 어찌나 빳빳한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오랜 정보 및 첩보 경험으로 인해 슈라이크는 갑작스럽게 말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가진 의미를 안다. 더 숨길 이유가 없단 것이다.
‘진짜 성격을 내보이겠단 이유는......’
그 이유는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당신. 그때 제가 하나 물어봤지요.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사령술이 있냐고.”
물론 있긴 있었다. 하지만 검은 역병 이후로 모든 사령술 방식은 실전되었다. 모든 마법사들과 심지어 초월자들마저 나서서 전 세계의 모든 문건을 뒤져가면서 혹시 숨겨진 사령술 서적이 있나 없나 검증했을 정도였다.
설마, 설마! 슈라이크는 눈을 떨며 바짝 마른 입술로 겨우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하시긴 했지요.”
“마법사 연맹에 이왕 온 거, 그 대답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어떤 의미로 묻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냥 ‘호기심’입니다.”
마법사들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문을 막고 난데없이 그 호기심을 공개적으로 물어본다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인 마법사들의 생각은 모두 하나로 귀결되었다.
‘대선장은, 사령술사인가?’
아무런 표정이 없는 대선장 탓에 분위기는 더 냉각되었다. 한겨울 같은 한기가 방 안을 맴도는 듯 모두의 피부에 소소한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 당장 들을 수 있을까요?”
대선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살결 위로 떨어지는 얼음물 같았다.
마법사들만이 긴장한 게 아니었다. 소년 역시 속으로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소년은 과감하게 나가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신중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방금 소년의 선택은 단순한 충동에 의한 게 아니었다. 오만한 말투와 도발이 의도적인 것이었듯, 이 질문 역시 허투루 발언한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물밑에서만 맴돌지 말고 수면 위로 뛰어올라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사령술이 이렇게나 마법사들에게 중대한 문제라면......
‘거래가 가능할 수도 있다.’
‘악마의 힘을 빌리지 않은 사령술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소년의 힘이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이 될 것이다.
‘뭐라고 답할 거냐.’
그저 궁금증이란 단어로 포장하고 있긴 했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이 왜 그런 물음을 하는지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소년의 사령술이 인정받는다면 좋은 일이고,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탈출구는 있다. 소년의 입으로 ‘나 사령술사입니다’한 게 아니니 문제없다. 경계야 생기겠지만 그거야 어차피 사령술을 안 쓰면 될 일이다. 소년이 사령술밖에 못 쓴다면야 문제겠다만, 그게 아니니까.
붉은 수염의 마법사가 말했다.
“내가 말해도 되겠나. 우리는 마법사 연맹의 사령술 및 악마 대응 부서이며 나는 그 부서장을 맡고 있다네.”
그들이 악마란 말에 특히 민감했던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그러시지요.”
“만일 그런 마법이 있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문제없다 생각하네. 물론 도덕적인 선을 지키는 이라는 가정 하에서 말이지.”
“그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아까 전의 해적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정중한 모습에 마법사들이 그 괴리감을 견디지 못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건방진 해적이라는 첫인상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속어가 섞인 니아트리브 어가 귀족적인 에크나르프 어로 바뀌니, 마치 요란한 소리를 내던 꽹과리에서 난데없이 진중한 첼로의 선율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사령술은 실전된 지 오래일세. 거기에 악마와의 계약도 아니라면, 그 사령술은 해당 술사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거나 선천 마력일 테니까 말이야. 노력과 태생에 죄를 매길 수는 없는 법이네.”
“노력과 태생이라...... 제 스승님께서는 제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악마와 계약을 한 적이 없으나 세상은 사령술을 그렇게만 알고 있으니, 조만간 죽을지도 모른다고.”
“......”
모두가 침묵했다. 저게 대선장의 스승 얘기인지 아니면 자신의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말한 건지는 대선장만이 알 것이다.
“아 갑자기 감성적이게 되었네요. 어쨌건 제 호기심은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사령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입니다. 호기심을 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호기심은 꼭 제 친구를 불러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런 사령술사가 있다면...... 같은 사령술을 쓰는 결사단을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그 말의 저의를 깨달았다.
‘거래다!’
사령술을, 자신을 인정해 달라! 그 대가로 악마 숭배자 사냥에 한 손 보태겠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호기심이라고 포장하는 걸 보면 상황이 꼬일 경우에 대한 퇴로도 제대로 구축해 놓고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게 아니라는 검증은 이미 끝마쳤다. 장막 너머에서 악마사냥꾼 쟈한은 대선장에게 한 줌 악마의 힘도 느껴지지 않으며 악마의 기운을 가진 무언가를 소지하고 있는 게 다라고 발언했다.
마법사들 중 가장 악마의 힘을 잘 느낄 줄 아는 인물의 발언이니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리고......
‘악마 냄새를 맡을 줄 안다고 했지.’
쟈한은 악마의 힘을 눈으로 보고 느낀다. 그 말은 숨어 있으면 못 느낀단 얘기다. 하지만 냄새는 시야에 구애받지 않는다. 잘만 하면 악마 숭배자들을 색출해내는 수단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이제 마법사들의 선택의 시간이었다.
대선장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마법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사실상 그들은 결정권이 없는 중간 간부들이라 결국은 유일하게 부서장 직책을 가진 붉은 수염 마법사만이 입을 열 수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도 아니고, 악마 숭배자 사냥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 부서는 응당 양팔 벌려 받아들일 걸세.”
“그렇습니까? 사령술에 적대적인 거 치고는 관대하시군요.”
“말했다시피 악마와 관련 없고 악행에 쓰지만 않으면 그만일세. 놈들은 교활해서, 잡으려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 해 어린아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심정이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생각일세. 그런 중요한 사안은 여러 부서장들과의 회의를 거쳐야 해서 당장은 자네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가 없겠군.”
“괜찮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렇다면 용건도 끝났고 이만 내려가지. 나랑 식사나 한 번 하지 않겠는가? 내 좋은 집을 알고 있다네.”
대선장은 식도락가로 알려져 있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간에 인간관계에 기름칠을 좀 해두면 차후 비공식적으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소년과 나란히 걸으면서 부서장은 은밀하게 팔을 뒤로 돌려 마법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서둘러 알려라.
곧, 마법사 연맹의 총괄 부서는 한 차례 폭풍이 불어닥치리라.
***
“쟈한, 어떻게 생각하나?”
슈라이크가 말했다.
“만일 저 자가 우리 편으로 들어온다면야 꽤나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쟈한의 눈은 날카롭게 갈린 칼날처럼 대선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게 다 사실일 경우다.”
“대선장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악마 숭배자와 손을 잡는 데 꼭 악마의 힘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슈라이크는 그 말에 상상을 해 보았다. 대선장이 만약 악마 숭배자의 편이라면?
‘카스테냐 귀족을 죽였다는 건 조사하면 나오는 일이라 거짓말은 아니겠고. 설마하니 결사단이 기존의 패를 버리고 대선장을 영입했다?’
저 총이 빼앗은 게 아니라 단순히 주인이 바뀐 것이라면?
“부서장님은 대선장의 말을 믿고 계신 것 같지만 저분은 너무 무르셔......”
쟈한이 생각하기에 부서장은 물렀다. 무능한 건 아니었다. 그는 유능했지만 너무 맹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자신이 쥔 총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는 확인해야 할 것 아닌가.
“슈라이크, 정보 부서에서 대선장 계속 감시할 건가?”
“당연하지.”
“부탁함세. 나는 아직 대선장을 믿지 못하겠거든.”
‘사실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고 생각하며 슈라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 냄새라......’
쟈한이 의심에 파묻힌 한 가닥 기대심을 숨기며 복도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