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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112화 (113/128)

112화

검증과 인정-2

어차피 마법사에게 문짝은 의미가 없을 텐데. 왜 문을 막았을까. 문에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한 잠금장치로 잠궜단 얘기다. 소년이 함부로 마법을 못 쓸 거라 생각한 걸까?

[브란트. 문 좀 열어 봐.]

[안 열립니다. 부술까요?]

[......일단 기다려 봐. 놈들이 내 성격을 시험하는 걸 수도 있어.]

마법사들의 의도에 순순히 따라주는 것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화를 내는 건 여러모로 독이다.

일단 참아주기로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날뛰는 건 뒷일을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나 할 일이니까. 소년은 감정에 쉽게 휩쓸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저번 카스테냐 공격 건도 재산적 보복에 집중했지 무의미한 학살은 하지 않았다. 화는 났지만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은 소년에 대한 경계심만 높여줄 뿐이라 결국 손해로 돌아오니까. 카디스 항에서의 무력시위 역시 사망자가 없는 ‘시위’에 그쳤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년은 정치가의 길에 한 발짝 내디딘 셈이다. 감정대로 움직이며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움직이며 명분을 칼날 삼아 휘두를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

잠시 조용히 있던 소년은 만일 장막 너머에 마법사들이 있다면 관심을 끌만한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내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좋게 생각해 봐도 뭔가 기분이 나빠. 난데없이 악마니 뭐니 하면서 한 달 안에 오라고 협박한 것도 그렇고, 이렇게 초대해 놓고 가만히 두고 가두기까지? 너무 모욕적이야. 너어무. 그래서 슬슬 행동을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쇼?”

뒷골목 시정잡배조차도 이렇게 경망스럽진 않을 것이다. 나 기분 상했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면서 당장이라도 가래침을 뱉을 것만 같은 행태.

......

역시 장막 너머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인 법.

“좋아. 그렇다 이거지?”

소년은 허리띠에 걸쳐진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냈다.

“거, 악마의 힘이니 뭐니 검증하러 오신 분이 있다면 아실 테지만, 이 총에는 악마의 힘이 담겨 있수다. 어떻게 얻었냐 하면 카스테냐 귀족에게서 얻은 전리품이야. 근데 그 귀족한테서 내가 신기한 말을 들었단 말이지? 이 총이 말이야, 무려 마법을 파훼할 수 있다 하더라고? 그래서 이왕 여기 온 거 한번 시험을 해볼 예정이거든.”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은 곧바로 정면으로 권총을 겨누었다.

“맞기 싫으면 비켜.”

콰앙!

악마의 저주가 한껏 담긴 납탄이 푸른 연기를 가르고 발사되었다. 일렁이는 회색 장막에 납탄이 박히자 액체 같던 표면이 유리처럼 쩍하고 갈라졌다. 납탄은 박힌 그 자리에서 증발해 사라졌지만 장막에 생긴 거미줄 같은 금은 그대로였다.

콰앙!

콰앙!

콰앙!

쨍그랑!

네 번째 총탄 만에 방 안을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산산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이곳은 일종의 취조실이었다. 악마의 힘을 가지고 있는 위험인물을 막기 위해 쳐놓은 강력한 장막이었는데, 그게 깨져버렸다. 세빌 백작이 쏜 총탄이 소년의 마법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가로막힌 것에 비해서 전혀 다른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 많이들 계시는구만. 왜 대답을 안 하셨소?”

장막 너머에는 다양한 표정을 한 마법사들 십여 명이 있었다. 검증을 준비하고 있었건, 검증이 끝나고 저들끼리 회의를 했건 소년에게는 하등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당사자를 방치했다는 것이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있느냐?”

소년을 향해 말한 이는 붉은 수염을 가진 마법사뿐. 다른 이들은 유리처럼 이리저리 흩어진 채 서서히 증발해가는 장막의 잔해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럼 진작 누가 있다고 얘기를 하시지. 애초에 가만히 두지 않았다면 이러지도 않았을 거 아뇨?”

소년의 말에 시선이 집중되고 모든 마법사의 눈에 ‘이런 천박한 놈!’이란 경멸의 빛이 깃들었다. 아. 딱 한 명을 제외하고.

‘무슬림인가?’

갈색 피부에 덥수룩한 수염. 마치 늑대 떼의 우두머리 디야브와 같은 행색이었다. 그는 기분 나빠하는 표정 대신 기이한 열망이 담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

그 무슬림이 말했다. 능숙한 에크나르프 어였다. 베른이 자리한 스위체에선 에크나르프 어 아니면 라인 연맹의 바바리아 어가 공용어였다.

“그 악마의 힘이 담긴 무기, 누구에게서 얻었나.”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지?”

“그 물건의 출처를 밝혀서 그걸 만든 이들을 잡기 위해서다.”

“쟈한. 네 역할은 검증이다. 이 이상 나서지 마라.”

붉은 수염의 나이든 마법사가 쟈한이라 불린 이를 막아섰다.

“나서지 말라고요? 지금 놈들을 잡기 위한 실마리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넘기란 겁니까?”

“쟈하드 알무드. 자네 역할은 여기까지일세. 나머지는 우리가 심문할 테니......”

“시임문?”

소년이 대화를 자르고 들어왔다. 심문? 좋은 트집이 생겼다.

“심문이라니. 아니 내가 죄인도 아닌데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오?”

“시끄럽다. 네가 끼어들 사안이 아니다.”

“이야, 이거 새로운 지식을 알았어? 어? 이 시대 최고의 지성들만이 모이는 마법사의 도시라더니, 그것도 모조리 허명이었구만 그래. 이 어찌 부패하고 타락한 이란 말인가!”

“지금, 나보고 그런 것이냐?”

쟈한을 막아선 붉은 수염의 늙은 마법사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고 시정잡배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것도 기괴해 눈앞에 두고 싶지 않건만, 모욕까지 해?

“그럼. 내 얼굴이 지금 누굴 향하고 있는데. 이제 보니 눈도 삐셨구만.”

“입 조심해라. 네놈 따위는 한순간에 태워버릴 수도 있으니.”

“어이쿠 무셔워라아~ 똑똑하고 높은 지위의 마법사께서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사람을 태워 죽인다니. 지금껏 그 권력을 휘둘러 죽인 선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을꼬?”

“뭐, 뭐라고?”

“허허, 다른 마법사들은 알까? 자신들의 윗선이 이렇게까지 썩어빠졌을 줄이야. 어휴, 악마 냄새도 당신의 썩은내보단 나을 거요.”

“뭐야? 감히 날 모욕해!”

자신의 수염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마법사.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소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소년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악마란 단어에 반응한 게 분명하다. 좋아, 지금 명분은 내게 있다. 좀 더 세게 나가보자.

“감히? 그거야말로 내가 할 말이지.”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수염의 마법사를 똑바로 마주했다. 섬뜩한 시선이 붉은 수염 마법사의 동공을 뚫고 들어가 망막에 맺혔다. 목에 칼날이 스치는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목으로 손을 가져가는 마법사.

모닥불 위에 물을 붓듯,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시선을 마주하는 그 순간, 모든 감정이 일시적으로 초기화되며 오로지 저 시선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마치 눈앞에 맹수를 마주하여 머리가 정지되는 것처럼.

“손님 대접 잘 해주는 거 보니 괜찮게 끝날까 싶었는데 막상 검증한답시고 데려온 마당에 짐짝처럼 방치하고 죄인 취급까지 한다? 말해 봐. 날 여기 소환한 이유가 뭐냐. 정말 악마의 힘을 검증하러 부른 거냐, 아니면 다른 나라 돈 받고 날 죽이겠다고 거래를 한 거냐?”

“마법사 연맹을 뭘로 보는 거요! 우리는 그런 거래 따위......”

“말로는 뭘 못할까! 말로는 명예니 예의니 존중이니 할 수 있지! 하지만 혀와 몸은 따로라는 걸 몰라?”

다른 마법사의 말을 거칠게 끊어버리며 언성을 높인 소년. 시선이 돌아가자 그 마법사 역시 몸이 딱 멈추며 손을 바르르 떨었다.

“실망이야, 실망. 마법사 연맹이 이렇게나 한심한 꼴이라니. 내 비록 해적이고 미천한 놈이긴 하지만 한껏 당신네들의 규칙을 지킬 의향이 있었거늘.”

“네, 네놈이 규칙을 지키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상관있지. 내가 당신네들의 규칙에 순응하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해적 따위의 도움이래봤자 얼마나 크다고. 자신감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그 해적 따위가 겪은 경험이 당신네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무슨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폄하하다니 참으로 시야가 좁구려. 그래. 이 조그만 도시에 처박힌 채로 네놈들만이 모든 걸 안다는 자만에 파묻혀 살거라. 도시 곳곳에서 악마 냄새나 풍기는 놈들 주제에.”

“잠깐. 악마 냄새라는 걸 맡을 수 있단 말이오?”

쟈한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소년이 속으로 씩 미소지었다. 역시 악마란 단어에 민감하구나.

저들은 모를 것이다. 소년이 말로 모두의 멱살을 끌고 다니고 있음을.

“왜, 관심 있나? 아아, 아까 이 총에 관심이 있다 했지? 내가 아까 말한 대로 카스테냐 귀족에게서 뺏은 게 맞수다. 뭐 해방 결사단인가 뭔가-”

“해방 결사단이라고!”

“-하는 놈들에게서 얻었다던데. 놀라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구만.”

소년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모두가 놀라 펄쩍 뛰었다. 사실 의도적으로 내뱉은 거였다.

악마의 힘이라는 사령술, 그걸 검증하려는 연맹, 악마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반응하는 마법사들. 이것만 봐도 답은 간단히 나온다. 연맹은 악마와 사령술을 꽤나 위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단 얘기였다.

“결사단인지 하는 것들이 악마와 연관된 모양인데. 이걸 어쩌나? 나는 순순히 말하고 싶지 않거든. 너무 빈정이 상했어. 아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쇼. 맘만 먹으면 나는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뒤질 테니까. 그럼 당연히 나만 아는 특급 정보도 영영 사라지는 거야.”

‘자 어떻게 할 거냐?’

이제 판은 다 깔렸다.

상대방이 무슨 반응을 하건 간에 소년의 의도대로 방향이 정해질 판이 말이다. 상대방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거친 방식을 썼긴 하지만 분위기는 소년이 원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소년에게 무작정 적대적이기보다는 고민을 하는 분위기로 말이다.

자, 너희들에게 악마란, 사령술이란 어떤 존재냐. 오만하고 건방진 해적에게 사과하고 손을 잡아야 할 만큼이더냐?

소년의 예상보다도 결사단이란 단어는 저들에게 중요한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붉은 수염 마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하나 묻지.”

“사과부터. 이 방에 들어오고 내가 겪은 모든 일에 관한 사죄를......”

“미안하네.”

그가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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