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검증과 인정-1
베른의 한 고급 음식점.
이 음식점은 이슬람 쪽 마법사들을 위해 이슬람식으로 도축 및 가공한 식재료로 요리를 하는 곳이었다. 수북하게 차려진 요리의 산의 한복판에 무슬림과는 거리가 있는 복장을 한 인물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좋은 사람이구나!’
괜히 오면서 의심하고 경계하고 한 것이 다 미안할 정도였다. 홧김에 준비하고 있던 탈모 저주 방사 계획은 머릿속에서 그대로 지워버렸다.
유로파의 음식들과는 상당히 다른 이슬람권의 독특한 풍미의 음식에 파묻힌 채 소년은 반쯤 헤롱거리며 맛을 탐닉했다.
‘이렇게나 극진한 대접을 해주다니! 아, 내가 저주 말고 축복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당장 해주는 건데!’
베른에 도착한 지 닷새. 소년은 접대 부서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매 끼니를 베른에 산재해 있는 음식점에서 때웠다. 아니, 때운다는 수준이 아니라 참으로 푸짐하게, 끼니마다 몇 시간씩, 보는 사람이 다리가 다 저릴 정도로 오랫동안 식사를 즐겼다.
[헥헥헥!]
검둥이도 난데없이 덩달아 포식을 했고 말이다.
‘......미치겠군. 돈이 얼마나 든 거지?’
그런 대선장 일행을 보는 접대 부서 직원들의 표정은 질려 있었다.
만나는 이들이 대부분 귀족이라 접대 부서의 활동비는 정말 많았는데, 매 끼니를 초호화 음식점에서 포식을 하는 소년 때문에 주머니에 거미줄이 쳐질 지경이 되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오늘은 라인 연맹의 프아이서 쪽 음식점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건 평소에도 귀빈을 맞이할 때마다 늘 하는 일이긴 한데......
“야, 몇 굴덴이나 남았냐?”
“3만 굴덴 한 주머니밖에 안 남았어.”
베른이 물가가 비싼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0만 굴덴이 수십 분의 일로 쪼그라들 줄이야. 직원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돈을 더 달라고 신청을 해야 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돈 문제니 예산 관리하는 직원들의 눈매는 매서워질 수밖에 없었다.
횡령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직장 생활에 회의감이 들게 만들었다.
“진짜 눈치는 좋아가지고 진짜 비싸고 맛있는 집만 귀신같이 골라 들어가네.”
“좀 싼 데로 가려면 눈치 채고 딴 데로 간다고 말하는 거 보면 정말 얄미워!”
“내 애는 저렇게 안 키워야지.”
한쪽에 모여 투덜거리는 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의 마법사 연맹에 대한 우호도는 한창 고점을 찍고 있었다.
‘오길 잘했어!’
여러 국가와 민족의 마법사들이 죄다 몰리는 마법사 연맹이라 음식점은 많고도 많았다. 거기에 더해, 여러 나라 요리사들이 몰려들어 있어 그들끼리의 교류가 일어나고 그 결과는 이른바 퓨전 음식의 등장으로 이어졌기에 소년의 혀가 즐길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해적이고 자시고 육지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면 바다에 한 발자국도 안 나갈 자신이 들 정도로 베른은 천국이었다.
다만 아쉬운 거라면 유로파와 이슬람 쪽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 술탄국 너머 힌디나 그 너머의 동방 엘프 제국의 음식은 없었다. 너무 멀어서 그쪽 사람이 오기도 힘들고 식재료비가 너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뭐 그런 종류의 아쉬움이 좀 있긴 해도 지금까지 먹어온 것과 다른 풍미의 음식이 많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귀족이 다 뭐냐. 이게 귀족이지!’
귀족이 되기 위한 것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인 만큼, 작위를 향한 마음이 흐려질 정도였다. 물론 음식의 산에 파묻혀 있다 보니 생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지금은 특별한 경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도 이런 대접을 받고 싶으면 작위가 필요하다. 단단한 반석이 마련되어야 그 위에 기둥도 올리고 지붕도 올리고 할 수 있는 법이다.
‘오오! 질감 좋은데? 이게 양고기라 했나?’
물론 지금은 근심걱정 다 잊고 밥이나 먹고 있지만. 희번뜩하니 뜬 소년의 눈이 음식들을 훑으며 빛났다.
***
“저 왔습니다 부서장님.”
쾅하고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한 남자. 걸걸한 목소리로 날카로운 눈을 빛내는 그의 얼굴형은 유로파인과는 사뭇 달랐다. 가무잡잡한 갈색 피부에 수북하게 난 검은 수염은 영락없는 무슬림이었다. 하지만 터번을 쓰지 않고 머리카락을 죽 늘어뜨린 면이 일반적인 무슬림과 달랐다.
“왔는가 쟈한.”
마법사 연맹의 비밀조직, 사령술 및 악마 대응 부서의 부서장은 연맹에서 가장 유능한 악마사냥꾼을 반겼다.
저 복수심에 불타는 눈을 보라! 팔을 비롯해 온몸 곳곳에 새긴 대악마(Anti-demon) 마법진을 보라! 어찌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선장인지 뭔지 하는 놈이 검증 대상이라 했습니까?”
악마에 대해 복수심을 품어 악마사냥꾼을 업으로 삼은 쟈하드 알무드가 섬뜩한 눈빛을 발하면서 물었다. 그는 악마 감지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희생하면서 개발한 능력이기도 했기에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강력한 능력이었다.
“맞네. 자네도 정보는 받았으니 알겠지만, 지금 대선장의 스승인 전대 대선장이 위협적인 사령술사였지. 그러니 그 제자 역시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일세.”
“알겠습니다. 씹어 먹을 악마 숭배자 놈들도 몇 번이고 들춰낸 제 눈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출장 중에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네. 사안이 사안인지라......”
“괜찮습니다. 그 와중에 한 놈은 잡아왔으니까요.”
“허, 급박한 상황에서 한 놈을 잡다니 참으로 뛰어나구만 자네!”
유로파 동부의 빽빽한 삼림과 늪지대에 숨어 있던 놈들을 기어코 색출할 줄이야.
“그것도 끄나풀에 불과해서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닙니다.”
“그거만 해도 어딘가. 여기서 조금만 머물게나. 곧 무대를 마련해 주겠네.”
***
시간이 지나 검증의 시간이 되었다.
열흘 동안의 꿈같은 베른 식도락 행보가 끝나니 그 반동으로 탈력감이 소년의 몸을 침습했다. 어째 맛있는 걸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는 깊어지기만 했다.
“으으...... 내일은 아나톨리아 전통 음식점 갈 차례였는데......”
같은 술탄국에 속해 있지만 아나톨리아 쪽은 북에프레카와는 풍토가 다르다고 한다. 케밥인가 뭔가 하는 게 맛있다더라고?
“검증 끝나고 바로 가시면 됩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지요.”
소년을 토닥이는 브란트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좋다고 소년을 태운 검둥이는 베른의 연맹 총괄 부서 건물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선 짐승은 출입 불가라 검둥이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마구간으로 끌려가야 했다.
일행은 총괄 부서의 중앙 첨탑으로 향했다. 다른 첨탑들보다 족히 세 배는 굵은 거대한 탑이었다. 커다란 도시 안에 자리한 작은 도시 수준의 건물이니만큼 뭔가 더 거창한 이름이 붙어야 할 것 같지만 고작 총괄 ‘부서’라니.
이는 전통 때문이었다.
마법사 연맹은 많은 단체의 시작이 그렇듯 조그맣게 시작했다. 각 부서는 열 명도 안 됐을 정도로 조촐했고, 그 부서를 모두 총괄하는 중앙 부서를 총괄 부서라고 불렀다.
그렇게 명명된 이름은 연맹이 점점 커져 유로파와 이슬람의 마법사를 모두 총망라하고 거대한 도시를 소유하게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중앙 첨탑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거대한 원기둥형 공동의 벽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고 여러 개의 네모난 판이 벽에 붙은 채 위아래로 스르륵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뭡니까?”
“보시다시피 움직이는 바닥입니다. 설마하니 이 높은 탑을 모두 걸어서 오르내리라고 생각하시진 않으셨지요?”
접대 부서 직원의 말에 브란트는 투구 안으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높은 성의 첨탑이라도 죄다 계단이어서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이 진귀한 마법장치는 오로지 마법사의 도시 베른에만 존재하는 명물이었다. 그만큼 더럽게 비싸고 더럽게 만들기 힘들단 얘기다.
‘정말 별걸 다 보네.’
소년이나 브란트나 기술 수준에 속으로 감탄만 거듭했다.
다른 층에 있던 큼직한 발판이 스르륵 내려왔다. 가장자리에 난간이 둘러져 있어 사고를 방지하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몸이 살짝 눌리는 감각과 함께 디디고 있는 발판이 높디 높은 원통형 구조물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나가면서 벽에 뚫린 여러 층의 복도가 보였는데 철창이 쳐져 있어 감옥 같이도 보였다. 그 안에도 수많은 마법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법사가 정말 많았다.
하긴 유로파 전체의 마법사 대다수를 죄다 모아 놓은 곳이니 많을 수밖에.
꿀꺽
소년은 군침이 넘어갔다. 수많은 마법사를 계속 접하다 보니, 그들이 가진 마력 향기에 마법사의 영혼을 먹고 황홀했던 기분이 계속 상기된 탓이었다. 소년의 입장에서는 이 도시 전체가 마약과도 같은 쾌감을 주는 음식으로 꽉 찬 셈이었다.
‘아니야. 참자 참아.’
소년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영혼의 맛을 보는 야만적인 방식은 그만두자고 마음먹었고 이런 ‘비정상적인’ 특징도 극복하자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래. 이것도 다 인내를 기르는 훈련이다 생각하자.
소년은 지금껏 먹었던 수많은 음식들의 맛을 상기하며 영혼의 맛을 잊으려 애썼다.
“다 도착했습니다.”
덜컹 소리 하나 없이 발판이 부드럽게 멈추었고, 사람 하나 없는 복도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
같은 시각.
총괄 부서 건물 한쪽에는 큼지막한 마구간이 있었다. 다만 마구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고 복잡했다.
왜냐하면 마법사란 이들이 말만 타고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로파 동부 시베리아 방면에서는 순록이나 곰을, 드루이드 계파 인물들은 사슴이나 늑대 등의 야수를 끌고 다녔다. 우크란 지방의 늪지대에선 거대한 도마뱀을 품종 개량해 타고 다녀 부를 과시하기도 했고, 유로파 북부 스칸디아에서는 서리낀 바위로 이뤄진 골렘을 만들어 타고다니기도 했다. 유로파와 북에프레카 지역 말고도 먼 곳에서 공수해온 호랑이 등의 생소한 짐승을 대동하는 마법사도 있는 마당이다.
큼지막한 검둥이를 타고 다니는 대선장이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여기 살다 보면 별의 별 것을 다 보게 되니 말보다 큰 늑대 정도야 오 특이하네 정도의 감상으로 끝날 수밖에.
이처럼 각양각색의 탈것이 몰리는 베른의 마구간은 마구간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크고 견고했다. 맹수 간의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 벽의 강도도 성벽 저리가라 할 정도로 단단했다.
혹자는 베른에서 전쟁이 난다면 총괄 부서의 마구간이 요새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초대형 마구간에 있게 된 검둥이는 주인과 헤어져 풀죽은 것도 잠시, 지금은 그저 태평했다. 무슨 지하감옥처럼 돌로 이뤄진 폐쇄된 공간이었지만 짚이 바닥에 깔려 푹신했다. 다만 난동 방지를 위해 두꺼운 족쇄가 목과 입에 걸려 있어 움직이질 못한다는 게 흠이었다.
말 잘 듣는 똘똘한 검둥이지만 마구간 관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냥 맹수니까.
사람 팔뚝만한 쇠창살 문 너머로 여러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검둥이는 문 바깥으로 보이는 좁은 세상을 한동안 보다가, 쇠사슬 족쇄 때문에 잘 움직이지도 못하니 그대로 쿨쿨 잠들었다.
그러던 와중.
“아니, 무슨 늑대가 이렇게 크단 말인가?”
한 인물이 검둥이의 축사 앞에 멈추었다.
머리에 큼지막한 뿔이 달린 사슴 머리뼈를 뒤집어쓴 인물이었다. 이파리로 치장된 통짜 곰가죽 옷을 입은 이 수염 수북한 노인은 바로 드루이드였다.
‘이렇게나 큰 늑대는 처음 보는군.’
늑대를 아무리 잘 키워봤자 체고가 사람을 넘기 힘들다. 그런데 이 새까만 늑대는 그걸 넘어 건장한 군마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높이보다도 컸다. 그만큼 덩치도 커 어지간한 곰조차 가볍게 압도했다. 늑대가 들어간 축사도 일반적인 사슴보다 한참 큰 순록을 넣는 축사였다.
“오오오!”
노인 뒤를 따라온 다른 드루이드들 역시 큼지막한 늑대를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만져보고 싶다!’
‘꼴린다!’
‘타보고 싶다!’
야수성애자에 가까운 드루이드들의 군침 삼키는 소리와 불타는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둥이는 속 편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
***
소년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바깥과는 달리 방은 다소 삭막했다. 장식은 없었고 오로지 밋밋한 벽뿐. 특이한 것은 방의 한쪽 벽이 마치 물과 연기가 섞인 것처럼 일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시야를 방해하는 마법 장막으로 보였다.
방 한가운데에는 나무로 대충 만든 볼품없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흠.”
소년이 의자에 가 앉으니 희뿌연 장막을 마주보게 되었다. 저 너머에 검증하는 마법사가 있는 걸까?
소년은 팔짱을 껴 자신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눈을 내리깔아 바닥을 본 채로 조용히 있었다.
1분, 5분, 10분......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12분이 지나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방 밖의 기척은 오로지 브란트뿐. 접대 부서 직원이란 자는 어디론가 간 듯했다.
“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요?”
소년의 가느다란 미성이 오만한 말투의 형상으로 내뱉어졌다.
강하게, 오만하게 보여야 한다. 저들을 오판시켜야 한다. 빈민가 폭력배들이 자신을 무섭게 보이도록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설마 거기 너머에 아무도 없는 건 아니지? 그러면 대놓고 날 농락하는 건데. 설마하니 머리 좋으신 마법사분들께서 한낱 해적을 욕보이려 하는 거요? 만약 그런 거면 마법사들이 현명하다는 상식이 깨지는데 말이오. 머리 좋은 인물들께서 고작 자존심 때문에 다섯 살 난 애들보다도 못한 치기를 부린다는 것 아뇨?”
마법사를 한껏 조롱했는데도 장막은 잠잠했고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악마의 힘이니 뭐니, 사실 그런 거 다 핑계고 설마 정말로 다른 나라 사주 받고 날 엿먹이는 거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요. 온 동네방네 다 소문낼 거외다. 사실 마법사들은 남 돈이나 받아가면서 깨끗한 척 하는 소인배라고 말이오.”
......
‘왜 조용하지?’
이쯤 되면 반응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소년이 혹시 하는 생각에 손을 뻗어 문을 열려 했지만 문고리만 덜그럭거리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소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야, 이거 무슨 뜻이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