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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105화 (106/128)

105화

마법사의 도시를 향하여-4

“그런데 궁금해서 말인데, 아까 말하다 말았잖소? 만약에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사령술사라면, 어떻게 되오?”

그런 전례가 없어 곧바로 대답하진 못했지만, 보통 의견이 갈리는 경우에는 높은 신분의 마법사들이 모여 논의를 거친다는 걸 슈라이크는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엔 마법사 연맹 내의 논의로 결정될 일입니다.”

슈라이크의 눈에서 의심이 짙어졌다. 아까 전부터 왜 자꾸 그런 경우를 말하는 거지? 정말 순수한 호기심일 수도 있으나......

‘악마의 힘을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있기라도 한가.’

대선장에 대한 위험도를 한 단계 격상시킨 그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어쨌건 통보는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한 달 내로 스위체의 베른으로 오십시오. 거기서 악마의 힘이 몸에 깃들었는지 검사를 받으면 됩니다.”

마법사 연맹의 본부는 중립국 스위체의 도시, 베른에 있었다. 아예 베른 자체가 마법사의 도시다. 스위체가 일찌감치 중립국 인정을 받은 이유기도 했다.

“안 가면 어떻게 되오?”

“사령술사라고 간주하고 마법사 연맹 차원에서 당신을 제거할 겁니다.”

“어이쿠, 무서워라.”

책을 읽듯 담담한 말투는 마치 마법사들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점심때인데, 식사라고 하고 가시지 그러시오?”

점심때는 한참 지났다. 오후 네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됐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잘 가시오.”

불편한 심기 가득한 마법사들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인 소년. 마법사들은 홱홱 소리가 나도록 등을 돌리고 몰려나갔다.

브란트가 걱정스레 말했다.

“한 달이면 다소 촉박합니다. 지금 서둘러 출발해야 겨우 도착할 겁니다.”

아소르스 제도에서부터 지브롤터까지만 해도 일주일 안팎이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여기서 당장 출발하는 게 좋다.

에크나르프 남부에 상륙하여 알프스 산맥의 지류까지 넘어야 하는 긴 여정이다. 육지에 도착하고서는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에크나르프 남부에 도착해 알프스 지류를 가로질러 베른 남쪽을 향해 북상하던가, 아니면 알프스를 살짝 돌아 에크나르프를 통해 베른 서쪽으로 가던가.

“둘 다 이삼 주는 걸리는 길입니다. 잘못해서 길을 잃거나 날씨 때문에 길이 끊기기라도 하면 분명히 늦습니다.”

“괜찮아. 충분히 갈 수 있어.”

물론 소년은 그보다 빨리 갈 수 있다.

마법으로 배를 더 빠르게 밀 수 있고, 정 시간이 없다 싶으면 말을 죽이고 되살려 지치지 않게 만들고 달리면 된다. 하다못해 날아가도 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아.’

마법사 연맹과의 시간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까지 안달을 내면서 허겁지겁 가고 싶진 않았다. 뭔가 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쓸데없는 자존심이란 걸까?

[그리고, 악마의 힘을 검사한다고 했잖습니까. 흡수는 다 하신 겁니까?]

그 물음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충분해.]

희망봉의 악마를 흡수한 뒤로 꽤나 시간이 흘렀다. 힘은 대부분 갈무리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내면에서 난동을 부리던 바위가 조용해 흙탕물이 사라진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소년이 브란트를 향해 안대를 살짝 들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암 같이 뚝뚝 흘러내리던 안광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눈동자 색깔이 불길한 핏빛이고 어쩌다 빛을 마주했을 때만 번득이는 것에 불과했다.

“뭐 천천히 가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행동은 반대였다. 소년은 아직 다 먹지 못한 음식을 놔두고 일어났다. 아깝긴 했지만 이미 한 번씩은 다 맛 본적 있는 것들이었다.

“브란트, 애들한테 챙기라고 해. 애들 배 좀 불려 줘야지.”

“알겠습니다.”

‘에크나르프라...... 다시 가보네.’

에크나르프는 고급 음식으로 유명하다. 에크나르프의 음식을 다시 맛볼 수 있단 생각에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천천히 가자고 해놓고선 바로 일어난 이유였다.

한 달 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연맹의 추격을 받게 되리라는 건 이미 뒷전이었다.

‘늦으면 늦는다고 편지라도 보내면 되겠지. 설마 그 정도도 용납 못할 만큼 꽉 막힌 사람들이겠어?’

***

세우타를 떠나는 마법사 연맹의 배. 마법사들은 열을 내면서 대선장에 대한 욕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건방진 인물이오!”

“고작 해적 주제에 저렇게 오만하다니!”

떠들썩한 마법사들의 흥분 섞인 수다를 귓등으로 흘리며, 슈라이크는 대선장이 어떤 인물인지 평가했다. 이 조사단이자 사신단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대선장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귀족들이 오는 식당에서 귀족의 식사를 하고 사략선단 편입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요구하니,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마법사들을 조롱하며 맞이한 걸로 보건대 전형적인 하층민의, 높은 신분에 대한 질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만해. 조그만 권력을 가졌다고 그렇게 방자해지는 걸 볼 때, 그릇이 큰 자는 아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만약’의 경우를 자주 염두에 두는 편이다. 그것은 상상력의 한 갈래이며, 상상력은 마법 발전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게 모두 연기라면?’

자신에게 보여준 모든 언행이 원래 성격과는 다른 꾸며낸 것이라면? 가능성은 낮으나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다.

‘어지간한 정계의 귀족들도 전혀 다른 성격을 사교계에서 보여주기 마련이지. 대선장도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마법 실력이나 사령술 사용 유무와는 별개로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언행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들은 더욱 폭넓게 대응을 해야만 하는 위험인물인 법이다. 그런 자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가진 자라면 더더욱.

‘그러면 전대 대선장, 그 사령술사는 어떻게 돼먹은 놈이지?’

열여덟 살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천재를 받아들이다니. 갑자기 나타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령술사가 불세출 수준의 천재를 제자로 받아들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슈라이크는 그런 말도 안 되게 낮은 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전대 대선장이 죽지 않았고 지금의 대선장으로 위장하고 있단 게 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지.’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대마법사가 직접 만든 거대한 소용돌이와 열다섯의 고위 마법사의 힘이 모조리 집적된 대규모 번개폭풍 마법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 있다면 초월자 정도?

지금쯤 그 사령술사의 영혼은 악마에게 붙잡혀 지옥에서 불타고나 있겠지.

‘일단 서둘러서 돌아가자. 그자는 보나마나 한 달 보다 늦게 도착할 거다.’

약속된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하는 건 귀족들의 흔한 관습이다. 상대보다 높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시간약속을 고의로 어기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오만방자한 성격이건, 상대방을 깔보는 성격을 연기했건 간에 대선장은 자신이 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연맹에 보다 늦게 도착할 가능성이 컸다.

‘곧바로 추격이 들어가진 않겠지만......’

마법사들은 대체로 시간을 금쪽처럼 여긴다. 출생이 어떻건, 어떤 교육을 받았건 간에 마법사들은 시간약속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다. 특히 여러 인물들이 모이는 토론회나 발표회 등은 조금이라도 늦으면 징계를 받을 정도다. 지각이 용인되는 경우는 상대방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뿐.

‘좋은 시선은 못 받을 거다.’

***

일주일 뒤.

소년의 낡은 갤리온은 에크나르프 남부의 번잡한 항구,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돈주머니를 그득하게 준비해 온 소년은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부터 찾았다.

그러나......

“뭐? 음식점이 없다고?”

상상도 못한 브란트의 대답을 들은 소년은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아, 내 에크나르프에 대한 환상이......!

“저, 사실 실망하실까봐 얘기를 못 드렸는데......”

정말 미안하단 표정을 지은 브란트의 말로는 원래 식사만 하는 전문 음식점 그것도 고급 음식점이란 것이 흔한 게 아니라고 한다.

보르도는 개방적인 지역 유지의 영향과 귀족들이 많이 몰리는 특산품의 산지라는 배경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요리사를 비롯한 귀족 가문에서나 일하는 직종 사람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경우였다.

카디스나 세우타 같은 경우는 군대 때문이었다. 귀족 출신 장교들이 순환복무를 하면서 개인 요리사를 대동하다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아예 은퇴한 관련 직종 사람들이 개점을 한 경우였다.

이런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직종은 귀족들이 고용하는 전문직 집안에 속해 상류층이 아닌 한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그, 그럴 리가...... 마드리드로 마차타고 가는 와중에 음식점 많았던 건......?”

“그야 카스테냐는 해군강국이고 카디스는 해군 본부니 카디스랑 수도 왔다갔다하는 귀족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나마 있는 음식점은 지역 귀족 집안이 직접 운영하는 거라 지금 귀족이 아닌 저희는......”

브란트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년의 표정이 점점 처참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은 그대로고 오로지 눈과 눈썹만 축 처지는데 어찌나 그렇게 처량해지는지 말을 더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여관은 있지?”

“예. 근데 주군이 원하시는 그런 고급 음식은 당연히......”

“상관없어. 고급 음식이 아니면 어때!”

소년이 고개가 기울어지면서 살짝 흘러내린 모자를 바로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에 브란트가 말했었지? 에크나르프는 식재료가 풍부해서 각 지역마다 전통음식이 다 있다고.”

“예, 그렇지요.”

“다 먹어버리겠어.”

소년은 식도락의 방향을 바꾸었다. 미식은 좋다. 하지만 미식이 아닌 것들 중에서도 분명 소년의 혀를 사로잡을 독특한 맛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소년은 붙잡기로 했다.

말 그대로 꿩 대신 닭. 귀족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다른 쪽이라도 파고들겠다는 생각이었다.

“......”

브란트는 투구 안쪽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평민들이 먹는 건 다 그게 그거인데......

“베른엔 아주 늦게 간다고 연락해야겠어. 가는 길에 있는 에크나르프 지역 다 들리면서 여관 다 들릴 거야. 아니 가정집에라도 들어가서 사먹을 거야.”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르러 가는 듯한 비장한 목소리에 브란트는 투구 위로 이마를 짚어야 했다.

‘딴 때는 참 의젓하신데. 왜 먹을 거 관련될 때만 이렇게 어린애 같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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