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104화 (105/128)

104화

마법사의 도시를 향하여-3

세우타의 고급 음식점, 세우타의 파도.

식탁을 몇 개씩 붙인 큼직한 상 위에 옛 방식으로 가득 내온 요리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소년은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처럼 푹 퍼진 얼굴(소년 기준)로 음식의 맛을 만끽하고 있었다. 옆에는 벌써 빈 접시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종업원들은 주기적으로 빈 접시를 회수하랴 음식 옮기랴 바삐 움직였다.

대체 내장이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이미 상을 꽉 채울 정도의 분량의 음식이 소년의 뱃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소년의 포크질은 멈추지 않았다. 식사 한 번을 수 시간 동안 즐길 정도로 천천히 먹어서 그런 걸까?

얌전하다 못해 경건하게 보일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먹던 소년에게 요리사가 다가왔다.

“저, 대선장님, 잠시 말씀 드릴 것이......”

“말해.”

“죄송하지만 식재료가 부족합니다.”

고기라던가 하는 기본적인 식재료 자체는 많이 남았으나, 향신료나 일부 음식에 들어가는 독특한 재료가 다 떨어져 지금까지 나온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음식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었다.

“식재료가 없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만 내와도 돼.”

“예, 알겠습니다!”

세우타의 파도의 요리사는 반색했지만 이내 설거지가 남았다는 사실에 피로에 찌든 얼굴로 변했다. 종업원들도 기진맥진이라 결국 그도 손을 거들어야 하리라.

‘돈은 많이 벌어 좋은데 너무 힘들어!’

해적치고는 강탈이 아니라 순순히 제값을 내고 음식을 사먹어 좋긴 한데 먹을 때마다 이렇게 재료가 떨어질 때까지 먹어대니 대선장이 올 때마다 허리가 휘어질 것 같았다. 뭐 세우타에 자리 잡은 다른 음식점이라도 별반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요즘 세우타의 음식점들은 대선장이 전세를 냈다고 할 정도로 대선장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귀족의 직속 요리사가 아닌 요리사들은 대부분 귀족 가문 및 왕실에 소속된 요리사였다가 은퇴한 이들이거나 그들의 제자였다. 이 음식점의 요리사 역시 카스테냐의 한 귀족가문에서 은퇴한 요리사라 나이 때문에 체력이 후달렸다.

자신도 남들처럼 제자라도 키워야 하나 고민하며 요리사는 다시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주군,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데 조금이라도 만나보시죠?”

석상처럼 시립해 있던 브란트가 넌지시 물었다.

소년은 호위계약 건은 해적 중에 머리 좋은 녀석들로 상대하게 했고, 사략선단 영입제의 역시 자신과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고 부하를 통해 전달하는 식으로 남을 직접 만나길 꺼려했다.

브란트의 말은 간접적으로만 있기보단 직접 만나 대화도 나누고 하면서 인맥을 쌓는 게 어떠냐는 의미였다. 소년의 신분이 해적에 불과한 만큼 서로 이용하는 선에서 그치겠지만 인맥이 많으면 아무래도 좋은 법이다.

“뭐하러? 별 영양가도 없을 텐데.”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만나봤자 사무적인 관계로 이어지고 끝날 인맥. 언제 어느 나라로 들어갈지 모르는데 괜히 관계를 맺어 문제가 생길 일은 만들지 말자는 지론이었다.

“귀족 작위를 달라하니 죄다 물어보고 오겠다면서 갔다가 다시 오지도 않더만.”

소년의 제의가 여러 나라에서 거절당한 것도 그 폐쇄성에 한몫했다. ‘귀족 자리라도 하나 주시오’라고 제의한 나라마다 소식이 없었다.

소문을 듣자하니 정계의 귀족들이 소년 영입을 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년이 너무 커 버린 바람에 영입을 위해선 그만큼의 권리를 더 줘야 하는데, 자기 기득권을 나누고 싶지 않은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탓이었다. 심지어 이탈리 반도의 조막만한 도시국가조차도 그런다니 할 말 다 한 셈이다.

‘적어도 에크나르프는 받아줄 줄 알았더니.’

알레한드로 제독의 예상과는 달리, 에크나르프마저 작위 요구에 ‘고려해보겠다’는 대답을 보냈다.

안 준단 얘기다.

해군이 박살났어도 소년을 거절할 만큼 귀족들의 자존심은 높았다. 소년은 맛좋은 음식이 많은 에크나르프 소속이 되기를 은근 원했기에 실망이 컸다.

‘나는 이런 음식으로 만족 못해. 고위 귀족이 먹는 진귀한 것, 왕족이 먹는 희귀한 것, 죄다 먹을 수 있어야 해.’

지금 먹고 있는 고급 음식도 맛있기는 하다. 하지만 소년은 최대한 많이, 다양한 것을 맛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사방팔방 쏘다녀도 누구도 방해하지 못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강력한 국가를 등에 업고 자신 역시 실권을 가져야 한다.

“듣자하니 술탄국에서부터 희귀한 향신료들이 많이 온다던데.”

“설마 술탄국을 약탈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쓸데없이 적을 더 만들면 곤란합니다.”

브란트가 우려하자 소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추가 설명을 했다. 지중해를 건너 할증이 붙기 전에 본토에서 아예 조금이라도 싸게 향신료를 직접 사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즉, 해적이 주도하는 향신료 무역 루트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이빨 빠진 사자도 발톱은 있으니 가까운 적을 둘 이상 만들 순 없는 법이지. 그 이빨 빠진 사자가 발톱을 내밀기 전에 되도록이면 빨리 후원 세력을 가지면 좋겠는데......”

고민하면서도 달그락거리며 부지런히 식기를 움직이는 소년.

그때 소년의 손가락 움직임을 멈추는 소식이 들어왔다.

“대선장님! 지금 밖에 마법사 연맹에서 왔다는 마법사들이 왔습니다!”

“......브란트, 들킨 건 아니겠지?”

마법사라는 말에 식도락을 즐기던 기쁨이 싹 내려갔다. 아소르스의 대선장 자리에 다시 복귀한 이후로는, 사령술사라는 걸 들킬까봐 죽은 자들은 전혀 대동하지 않았다. 바다의 진주 호의 선원도 모두 산 자로 바꾼 지 오래다.

소년의 경계심 가득한 싸늘한 눈동자가 닫힌 문 너머를 쏘아보았다.

“제가 알기론 주군께서 실수한 일은 없습니다. 단지 의심 때문이겠지요.”

유일하게 대동한 망자는 브란트뿐인데, 힘을 더 불어넣어 정말로 산 사람처럼 보이도록 해놓았다. 거짓이긴 하지만 지금도 심장박동이 가슴팍에서 요동치고 숨 쉬는 것처럼 어깨가 이따금씩 들썩였다.

“하긴, 사방팔방 마법 쓰고는 다녔으니까 언젠간 마법사가 올 거라고 예상은 했어.”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 몰라서 그렇지. 유로파가 전쟁 중이라 바닷일에는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다. 들어오라 해.”

***

식당 안으로 일단의 마법사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가득 쌓인 음식을 쳐다보고, 그 사이에 파묻히다시피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짐짓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이거 원 참. 귀족이신 마법사 나으리들께서 체통 없이 우르르 들어오시다니. 큰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선두의 마법사, 슈라이크의 시선이 소년을 슥 훑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법사 연맹에서 2급 마법사의 지위를 맡고 있습니다.”

“안녕들 하시오. 무슨 일로 고오귀한 마법사들께서 이런 미천한 해적놈을 찾아주셨는지 모르겠구려.”

소년의 어투는 부루퉁했다.

유로파의 보편적인 예법에서는 자신의 지위를 먼저 강조하고, 초면에 자신의 이름을 선뜻 얘기하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상급자가 하급자를 향해서는 이름을 먼저 밝히지 않고 하급자가 물어본 다음에야 알려준다. 제 3자에게 상급자와 하급자가 같이 이름 소개를 할 경우는 상급자가 주도적으로 하급자의 이름을 알려줄 권리를 갖는다.

이는 신분에 따라 상대방의 이름을 알 필요가 달라진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년은 갑자기 몰려와 식사시간을 방해한 것도 있거니와, 그런 예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이 있는 주제에, 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행세하다니.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소년의 소소한 질시였다. 자신의 특징 일부를 남이 뺏어가는 느낌이었다.

‘소문대로 어리군.’

슈라이크는 눈동자를 움직여 소년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여리여리한 외모, 작은 체구, 앳된 목소리. 옷은 단정하고 깨끗하지만......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말투도 천박해.’

서로의 어긋난 첫인상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저희가 대선장을 찾아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령술을 익히고 계십니까?”

“그게 당신네들이랑 무슨 상관이오?”

“사령술은 악마와 계약한 이들만이 쓸 수 있습니다. 악마는 세상의 해악이니, 사령술 또한 마땅히 사라져야 할 힘이지요.”

‘흠, 결사단인가 하는 녀석들은 역시 악마 숭배자가 맞는 건가.’

소년은 카스테냐의 귀족이 호위로 데리고 다니던 죽지 않는 기사들을 떠올렸다.

사령술이 악마와 연관되어 있다라...... 사탄도 그렇고 희망봉의 악마도 그렇고, 악마와 사령술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증거들이 나오자 소년은 내심 씁쓸했다. 악마와 계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령술을 쓰는 탓에 마치 악마와 동급으로 취급당하는 기분이었다.

“처음 본 사이에 면전에서 악마라는 불길한 단어를 꺼내다니, 마법사 양반들은 예의도 모르시오?”

“......”

“허참. 그러니까, 악마에게서 얻은 힘이니 사령술은 안 된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악마에게서 유래되지 않은 사령술은?”

슈라이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 게 있을 수 있나? 사령술은 오래 전에 뿌리 뽑혀 사라졌다. 지금도 곳곳을 감시하는 마법사 연맹의 눈이 사령술의 등장을 수백 년 동안 감시하고 있다. 그 역사 동안 그런 경우는 한 건도 없다.

“그 말은 대선장께서 사령술을 익히고 있다고 알아들으면 됩니까?”

“무슨 말뜻을 그렇게 과장되게 해석하시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오. 악마에게서 배운 사령술이 있다면 아닌 사령술도 있단 얘기 아니겠소?”

소년은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다시 포크를 들어 접시의 고기를 조심스레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법사들에게 자랑하듯 고기를 천천히 씹어 삼킨 소년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사령술을 익히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증명하면 되오?”

참으로 거만한 대귀족 같은 언행에 슈라이크가 짜증을 애써 삼키고 답했다.

“......마법사 연맹으로 와서 검사를 받으면 됩니다.”

“검사? 흐음...... 왠지 신뢰가 안 가는데.”

“신뢰라니요?”

“연맹에서 내게 누명을 씌울지도 모를 일 아니오?”

“연맹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허어, 똑똑하신 마법사라 알 거라 생각했는데. 난 해적이고 무려 국가와 원한을 졌소. 그 나라가 연맹에 부탁해서 저 해적 좀 처리해주세요, 하고 부탁했을지도 모르잖소?”

“지금 연맹을 뭐라고 생각하는......”

“그야 당연히 마법사들의 모임이지. 마법사들의 ‘이익’을 위한. 내 말이 틀리오?”

“마법사들의 이익을 위한 건 맞지만 그런 짓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초월자 분들께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일반인에게 마법은 공포의 대상이다. 마법을 부리는 이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막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함부로 그럴 순 없다. 개개인이라면 모를까, 연맹 자체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초월자라는 절대적인 감시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인세를 떠난 이들이라지만 연맹은 그들이 구축하고 손봐온 단체. 그 손길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선례도 몇 번이나 있었고.

“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당신네들이 내 처지라면 예예 믿겠습니다, 하겠소이까?”

“연맹의 명예를 걸고, 결코 누명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입을 다물면 명예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

소년의 계속되는 시비조에 슈라이크의 심기가 좋지 않아졌다.

“무슬림이건 해적이건 산적이건 마법사 연맹에서는 그저 마법사. 외부 신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흠......’

저렇게까지 역설하는 걸 보면 누명이 씌워질 가능성은 적다고 보면 되는 걸까?

소년도 그동안 마법사 연맹에 관한 건 많이 조사해 왔다. 아무렴 마법사들이 자신을 적대할지도 모르는데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해적의 정보통이라 한계는 있지만 돈의 힘은 늘 한계를 넘어 해답을 찾아내곤 한다.

어느 정도는 믿을 만해지자 소년의 호기심이 확장되었다.

잠시 말이 없던 소년이 선뜻 말했다.

“그런데 궁금해서 말인데, 아까 말하다 말았잖소? 만약에 악마와 계약하지 않은 사령술사라면, 어떻게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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