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마법사의 도시를 향하여-2
갑작스레 바다의 군벌로 성장한 아소르스 제도의 해적들은 대선장이자 마법사왕이 기거하고 있는 테르세이라 섬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약탈품의 일정량을 바치거나 정보를 수집해 돌아가거나 별도의 ‘진상품’을 통해 돈을 하사받기 위하여 테르세이라 섬은 해적선이 늘 들락거렸다.
테르세이라 섬은 마법임이 분명한 안개로 밤낮없이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해적들은 카스테냐 어로 안개라는 의미인 니에블라(Niebla)를 붙여 니에블라 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 테르세이라 섬에 낯선 선박 한 척이 나타났다.
한 척의 평범해 보이는 배였는데, 해적 소굴 한복판인데도 해적을 의미하는 검은 깃발이나 검은 돛을 달고 있지 않았다. 대신 수정이 달린 지팡이를 바람을 형상화한 곡선이 휘감고 있는 특이한 그림을 큼직하게 그려 놓았다.
마법사 연맹을 의미하는 그림이었다.
배는 테르세이라 섬을 감싼 안개 근처에서 멈춰 있었다. 배에 타고 온 마법사들이 모여 저 짙은 잿빛 안개를 살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과연 소문대로 안개가 짙은데.”
“저게 대선장의 권역이란 말이지? 섬 하나를 덮을 정도라니. 정말 강대한 마법사인 모양이야.”
이 배에 탄 마법사들의 대장격인 마법사 슈라이크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안개를 노려보았다. 그 옆에서 부관 필립이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진 망원경으로 안개를 관찰하며 말했다.
“이야, 정말 신기하네요. 마력이 전혀 안 느껴져요. 저 정도의 넓이를 모두 덮는 광역 마법이면 정말 장난 아니게 힘이 들어갈 텐데.”
“그러게나 말이다. 확실히 대마법사급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열여덟이라지?”
“한 삼사십쯤 되면 초월자가 되지 않겠냐는 얘기도 돌던데요?”
“초월자가 뭐 간단히 되는 줄 알아? 초월자 양반들은 천 살 넘게 먹은 사람이 대부분이야. 다르게 말하면 그 시기 이후로는 초월자급 대마법사가 없단 얘기지.”
“참..... 그 시절에는 정말 인재 수가 남달랐나 봐요.”
“다른 시대의 인재를 끌어다 쓰기라도 했나. 하여튼 대선장한테 말을 전달할 방법은 없나?”
“없어요 없어. 마력이 느껴져서 그 가닥을 잡아야 뭐 용건을 전달하건 왔다고 알리건 하는데 아예 느껴지질 않으니 방법이 없어요.”
무작정 안개를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다. 저런 형태의 권역은 잘못 들어갔다간 안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강제로 뚫고 들어가면 권역의 주인을 침공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사신으로 왔으니 그런 선택지는 불가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해적선이 없죠? 좀 물어볼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이상해. 벌써 이틀째인데 대선장이 있다는 섬 주변에 배가 보이질 않는다니. 분명 해적이 사방팔방에서 노략질을 하고 다니는데 보고도 안 하고 수익도 안 바친다는 건 말이 안 돼.”
“주기적으로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 그냥 시기를 잘못 잡은 거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다른 섬에 정박하고 싶진 않은데.”
해적이 드글드글한 그 틈바구니에 닻조차 내리고 싶지 않은 게 마법사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신선식품이 다 떨어져서 맛이 최악이라는 수병의 비상식량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한 상황이다. 섬에 정박이라도 해서 뭘 좀 보급해야 하는데, 해적과 마주칠 바에야 차라리 혀를 버리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마법사들은 해적과 섞이고 싶지 않아했다.
“근데, 대선장이 정말 사령술사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커.”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 엘리자가 전투기록을 공개한 이후, 사령술사에 대한 경계심은 한층 높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아소르스 제도에서 대선장의 제자라는 녀석이 대선장이 된 것도 모자라 바다의 군벌이 되어버린 탓에 마법사 연맹은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는 스승의 마법을 배우는 법이니까.
전대 대선장의 특징은 사령술과 저주 마법, 원소 마법을 쓰고, 정말 기이하게도 마법에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단 것이었다.
그런데 대선장의 제자 역시 강력한 원소 마법을 썼다. 거기에 그 강력한 마법에서 한 줌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릴람파고 해전에 참전했던 마법사들의 여러 증언이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지사. 때문에 이렇게 사신이 파견된 것이다.
마법으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저 넓은 영역에서 마력 한 가닥 느껴지지 않는다는 특징 때문에 배에 탄 마법사들의 의심은 증폭되고 있었다.
“안되겠다. 여기서 죽치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어. 내키진 않지만 해적들에게 접근해서 정보를 얻어 보자.”
그리하여 테르세이라 섬과 가장 가까운 상조르즈 섬에 도착한 마법사 연맹의 배. 마법사들은 더러운 것이 옮기라도 할 것 같은지 배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대장 슈라이크가 직접 발품을 팔아야만 했다.
“저게 뭔 배여? 첨보는 문장인디.”
“아따, 배 한번 큼직하구먼.”
“흥, 대선장께서 주신 전열함보단 작아.”
낯선 배가 정박하자 은근슬쩍 몰려든 해적들은 로브를 쓴 슈라이크가 널빤지를 밟고 내려오자 더 소란스러워졌다.
“허미, 저거 마법사 아녀?”
“로브 뒤집어쓰고 다닌다는 양반들은 죄다 마법사라드만.”
“이보쇼! 댁 마법사요?”
“그렇다.”
오오!
해적들이 대답에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로써는 ‘유식한 사람’인 마법사를 보는 게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마법이라는 말에는 덜덜 떨면서 마법사라는 말에는 동경의 눈빛이라니.
“대선장을 만나러 왔는데 안개가 짙어 들어갈 수가 없다. 누구 어떻게 들어가는지 아는 사람 있나?”
“아이고메, 헛수고들 하셨어잉!”
“헛수고?”
“거, 건너편 섬이 안보일 정도로 짙지 않았소?”
슈라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믄 마법사왕께선 지금 섬에 없는겨. 저어기 지브롤터로 밥무러 가셨수.”
“식사를, 하러 갔다고?”
대선장의 식도락가 기질은 이미 해적 사이에서 유명했다.
카스테냐를 약탈할 때 대선장은 해안 도시의 식재료와 요리사를 특히 ‘정중히’ 모셔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리고 상조르즈 섬에 모여 모셔온 요리사들로 성대한 연회를 열게끔 시켰다. 연회가 끝난 다음에는 요리사들을 도로 카디스 항에 데려다주었다.
이를 보고 눈치 빠른 몇몇 해적이 육지를 약탈하면서 식재료와 요리사를 데려다 주자 대선장은 그들에게 큰 돈을 포상으로 내렸다. 대선장에게 음식을 만들어준 요리사 역시 돈을 두둑하게 받고 무사히 돌아갔다.
그 소문이 퍼지자 인근 해안 지역에서 ‘살려면 요리를 배워야 한다!’하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해적들도 두둑한 포상을 기대하며 여관이나 음식점의 경우는 약탈하지 않고 식재료와 요리사만 데려갔다가 보수와 함께 다시 잘 데려다 주는 관습이 생겼다.
“......그러니까 지브롤터로 갔다?”
“그라믄요. 그 머시기, 세우타(Ceuta)였나? 그쪽으로 자주 가신다는디. 한번 가면 며칠 계신다니께 그냥 글로 가는 게 좋을거유. 내 듣기로는 이삼일 전쯤에 출발하셨다드만?”
아소르스 제도에서 지브롤터까지는 평균적으로 일주일 정도 걸린다. 지금 서둘러 출발한다면 길이 엇갈리는 사단은 피할 수 있으리라.
‘카스테냐령인 지브롤터를 아주 제 집처럼 드나든다던데 사실이었나.’
슈라이크는 그 간도 큰 대선장을 향해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서둘러 배에 올랐다.
***
지브롤터 지방에 자리한 항구도시 세우타.
세우타는 지브롤터를 지나가는 선박들이 보급을 위해 잠깐씩 들르면서 형성된 도시였다. 지중해 안쪽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꼭 이곳을 거쳐야 했기에 카스테냐는 통행세를 거두면서 쏠쏠한 수입을 거두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현재 지브롤터를 지배하는 자는 카스테냐가 아니었다.
국가도 아닌 무려 해적 군벌이 지브롤터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카스테냐가 지브롤터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각종 시설이라던가 군대 등은 그대로 둔 채 해적이 점거하여 통행세만 쏙 빼내는 방식이었다.
그런 세우타의 한쪽에서는 고급스런 옷차림을 한 인물 여럿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세우타의 파도’라고 새겨진 간판이 매달린 음식점이 있었다.
이들이 줄지어서 먹어야 할 정도로 맛집인 것일까?
“다음!”
줄은 음식점 입구가 아니라 정확히는 그 옆에 놓인 탁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흠흠, 메디체 가문에서 온 가신이외다. 대선장을 뵐 수 있을지......?”
“통행세는 요 옆에 놓고 호위 계약은 옆줄로 가쇼. 대선장님은 함부로 못 만나는 것도 모르쇼?”
앞에 앉아있던 해적이 남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남자는 민망한지 얼굴이 붉어졌지만 아무 말도 못한 채 돈주머니만 옆에 내려놓고 줄을 빠져나와야 했다.
“자네도인가?”
“아. 왜 안보이나 했더니 여기 있었나.”
메디체 가문에서 온 가신과 잘 아는 사이인 다른 도시 국가 가문의 가신이 허탈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통행세를 내는 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해적과의 계약을 위해 생겨난 줄이 또 있었다.
“자네도 호위 계약 때문에 왔나?”
“맞다네. 갑자기 지브롤터의 주인이 바뀔 줄 누가 알았겠나.”
그들을 따라온 하인들이 마련해 준 의자에 나란히 앉은 채, 그 둘은 점점 쌓여가는 통행세 가득한 주머니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이빨이 좀 부러졌다지만, 그래도 사자는 사자겠지?”
카스테냐가 지브롤터의 지배권을 다시 가지고 오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렇겠지. 다만 언제쯤 이가 다시 자라냐가 문제지 않겠나.”
대선장이 마법사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며, 소문에 따르면 대마법사급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에게서 승리한다는 건 요원해 보였다. 니아트리브가 에크나르프의 해군을 전멸시킨 이후로, 대마법사의 힘이란 건 그저 하늘에 뜬 별처럼 막연한 게 아니라 피부에 와닿는 것으로 바뀌었다.
저번 카스테냐 습격에서는 대선장이 마법을 전혀 쓰지 않았다지만 억지력이라는 게 있다. 당장 니아트리브의 경우가 있지 않은가. 릴람파고 해전에서 승리한 카스테냐가 바로 니아트리브를 향해 전진하지 않고 평화협정서부터 내민 이유였다.
“어서 호위 계약 따가서 저기 북해까지 무역로를 뚫어야 하는데 말이야. 니아트리브 사략선이 워낙 사나워야지.”
“희망봉을 건널 생각은 없고?”
웃음기 섞인 말에 메디치 가문에서 온 가신이 으휴 하면서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
“누구 가문 망하게 할 일 있어? 바닷물 먹고 싶으면 자네나 가게.”
“그래도 조금은 약해졌다 들었는데.”
“백 년 동안 희망봉의 파도에 삼켜진 배가 얼마나 많은데 이 사람아. 그거 때문에 저 돈독 오른 이슬람 놈들만 살판났지. 신대륙의 금덩이 절반이 이슬람 놈들한테 향신료값으로 갔단 얘기도 있다고.”
“이슬람하니까 생각난 건데 대선장이 그 유명한 늑대 떼랑 붙어서도 이겼다지?”
“나도 들었어. 원래라면 북에프레카 동부에서부터 다시 해적들이 기어들어올 텐데 대선장 이름 때문인지 조용해.”
“대선장이 있는 한은 당분간 이슬람 놈들은 조용하겠는걸. 니아트리브보다도 사략선에 의존하는 것들이니. 그럼 이제 대선장을 잡는 국가가 바다 패권을 잡게 되는 건가?”
같은 편으로 잡건, 때려잡건 말이다.
“귀족 작위를 대가로 요구한다던데. 과연 어떤 나라가 들어줄까?”
“작위를 대가로 달란 소문이 퍼져서 요즘은 영입 제의도 안한다던데?”
작위는 민감한 주제다. 작위에는 필히 명예와 권력이 따라다닌다.
자존심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귀족 기득권이 자신들에 손에 쥔 파이를 나눠줘야 할 상황에 가만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국가에 좋은 일이라지만 그게 자신들의 손해로 돌아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물며 천한 해적이다. 고귀한 피라는 철심 같은 자존심은 꺾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니아트리브가 해적에게 작위를 내려주는 것도 수십 년이 넘는 오랜 논쟁 끝에 이뤄진 것이다.
“니아트리브가 그나마 해적을 귀족으로 임명해주는 나라인데, 그쪽은 대마법사가 이미 있으니 아쉬울 거 없겠고. 게다가 니아트리브를 패퇴시킨 게 대선장이니......”
“정말 정치적 출혈을 감수하면서 대선장을 잡을 국가가 있을까?”
“적어도 우린 아니겠지.”
“그러게. 도시국가 귀족 되어봤자 강대국 인정도 못 받을 테니 준다고 해도 대선장이 거절할걸?”
약소국에서 온 두 사람의 씁쓸한 웃음만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