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마법사의 도시를 향하여-1
바다를 주름잡는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아소르스 해적들. 그들은 세력을 개편하고 바다를 마음껏 쏘다녔다.
해적들의 대선장에 대한 충성도는 하늘을 찔렀다.
최근에 카스테냐를 대대적으로 약탈하여 해군력 1위 국가를 무릎 꿇렸다는 쾌감! 그것도 모자라 카스테냐에게서 얻은 전열함들을 모조리 부하 해적들에게 나누어준 대선장의 통큰 행보까지! 이제는 그 누구도 대선장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이리저리 갈라진 채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해적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대선장이라는 인물에 의해 완전히 합쳐져 세력화가 되었고 이백 척에 달하는 니아트리브 전열함으로 인해 전력 역시 크게 상승했다.
원래 아소르스 제도는 명목상으로는 카스테냐의 영토다. 다만 해적이 너무 들끓어 통치를 포기하고 이름뿐인 소유권만 가지고 있을 뿐.
때문에 어떠한 국가의 일부 영토를 (무단)점거하여 독자적으로 통치하게 된 대선장은 엄연히 ‘군벌’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원래라면 각국에 위협적인 해적이 나타나면 다국적군이 합동작전을 펼쳤겠으나, 현재는 카스테냐 왕위 계승 전쟁으로 한창 시끄러운 상황. ‘고작’ 해적 때문에 ‘중대한 문제’인 왕위 계승 문제를 뒷전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견제의 공백 속에 아소르스 해적 세력은 유로파와 대서양을 차단하고 상선을 약탈하며 더욱 성장세를 이어갔다.
카스테냐가 해적에게 거꾸러진 대사건 이후 두 달이 지났다.
어떤 멍청이가 대선장에게 전열함을 받자마자 대선장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배와 함께 꼬르륵 잠겼다는 사소한 사건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소르스 해적은 평화롭게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최근에는 아예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고 카스테냐 대신 통행세를 걷는 행태까지 보였다. 지브롤터를 무력으로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멀쩡히 카스테냐에서 파견된 관리와 주둔군이 있었지만 해적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브롤터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제 2의 해적소굴로 만들어 갔다.
카스테냐는 이걸 그냥 두고만 봤을까?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재정비가 끝난 해군을 움직여 아소르스 제도를 토벌하려 했으나, 출정 당일 카디스를 찾아온 그 유명한 아소르스의 대선장은 신개념 무력시위를 선보였다.
릴람파고 해전에서의 그 거대한 붉은 번개의 뱀을 불러내 카스테냐 함선들의 돛대를 싹 다 부러뜨린 것이다. 죽은 이는 없었기에 엄연히 공격이 아닌 시위였다.
그러면서 ‘불시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 구호를 한답시고 돛대 수리비로 1만 리브르를 던져주었다. 대선장의 의도는 확실히 전달되었다.
‘내가 당한 굴욕, 아직 덜 갚았다.’
대선장의 뒤끝은 길었다. 앞으로도 카스테냐는 그에게 휘둘려야 하리라.
***
동부국의 심장 빈.
하급 귀족 관료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서류를 검토하고 전쟁 예산을 편성하는 바쁜 일상이 한창이었다. 복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하인과 관료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이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는 이가 하나 있었다.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 마리아였다.
매끄러운 백금발을 찰랑이며 푸른 눈으로 여기 기웃 저리 기웃거리고 다니는 것이 이제 갓 성인이 된 열일곱의 소녀다운 행동이었다. 물론 왕녀로서의 품행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지만 다른 형제자매와는 달리 유순하고 여제의 이쁨을 받는 막내딸이란 것 덕분에 딱히 큰 흠은 아니었다.
뒤를 따라다니는 하인 하나 없이 왕궁 복도를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요리조리 왔다갔다하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아이였지만, 그 맑은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는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차가웠다.
소녀는 바삐 돌아다니는 이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며 복도의 인기척이 뜸해지자 슬그머니 어느 방 안으로 향했다.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이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집무실로 보이는 이곳을 마리아는 성큼성큼 들어가 서늘한 눈으로 서류들을 마주보았다.
이 수많은 종이들은 군대와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군대 편성에 쓸 예산안을 비롯하여 어느 곳에서, 누구의 사병 및 용병들을 모집할 것인지 지시하는 대략적인 기획안 등이었다.
그런 서류들을 살짝 뒤적이는 척하면서 눈동자가 잉크자국 위를 쓱 훑는 것이 명백한 염탐이었다. 서류들을 슬쩍슬쩍 보던 소녀의 눈은 어떤 서류 위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빈 남쪽의 대도시 그랏츠에서 병력을 충원하여 빈으로 올려보내겠단 계획안이었다.
‘그랏츠의 부대를 빈 왕실 호위사단과 바꿔치기해 뒤로 빼내 에크나르프를 압박할 셈이야. 2선급 부대를 끌고 갔다가 졌으니 정예부대를 보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지. 비어버린 그랏츠 쪽은 용병을 더 모집해 엘가리로 보낼 셈인가? 아니면 기만작전에 능한 리페테 백작을 몰래 끌어와 허수아비 부대로 세워놓을지도 모르겠어.’
소녀의 눈은 마치 노회한 장군처럼 날카로웠다. 체스의 말 하나를 옮겨도 그 뒤 열 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계획안의 허점을 꿰뚫고 앞으로의 전선 변화를 예측했다.
그렇게 서류 더미를 한참 뒤적거리며 머릿속에서 한바탕 거대한 전장을 그리던 얻던 소녀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면서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보았다.
‘대체 이 반지는 왜 끼고 있으라는 건지.’
서류를 뒤적이는데 반지가 자꾸 걸려서 불편했던 것이다.
작년 에크나르프의 보르도에서 구한 반지였다. 자신을 왜 그 멀리까지 데리고 갔는지, 왜 암시장까지 굳이 들여보내야 했는지는 몰랐다. 다만 오로지 이 반지를 끼우기 위해 신분까지 숨기고 데리고 갔단 것은 알았다.
‘어머니도 말을 안 해주시니. 그렇다고 나이에 안 맞게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야심만만한 오라비들 때문에 자신이 나이에 맞지 않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밝힐 수 없는 상황이다. 마리아의 언니들은 어머니처럼 여제가 되겠다며 야심을 드러냈다가 서로 물밑에서 물고 뜯고 난리지 않은가.
‘그런 진흙탕 싸움에 발을 담글 순 없지.’
마리아는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반지와 보르도, 암시장을 회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암시장에서 만났던 이상한 느낌이 드는 소년 역시 떠올랐다.
처음 보는 암시장이 신기해 여기저기 둘러보다 실수로 호위병들과 떨어진 그 상황에서 소녀는 정말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러던 와중 만난 이름 모를 소년은 자신을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그 덕분에 소년의 주인으로 보이는 귀족을 통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이상한 느낌...... 지금도 잊혀지질 않아.’
그 검고 깊은 눈동자를 보며 느낀 기이한 기분. 보통 사람의 눈동자에는 다른 이가 비치곤 하는데 그 소년의 눈에는 그 무엇도 비치지 않았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어둠 같은 눈.
그건 마리아의 기억에 밧줄을 엮은 것처럼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선명히 생각나게 만들었다.
‘대체 그 애는 뭐였을까.’
덜컥
“음? 마리아 공주님. 여기서 또 뭐 하십니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고위 관료로 보이는 귀족이 들어왔다.
“아. 그냥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었어요!”
“하하, 공주님. 여기는 중요한 곳이라 함부로 들어오셔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벌써 몇 번인지 원. 뭐 숨을 곳이 많긴 한데...... 어서 유모에게 가시지요. 여기는 재미없는 종이밖에 없습니다?”
“네, 알았어요!”
하지만 소녀는 앞으로도 여기에 더 자주 들릴 것만 같았다. 수많은 이들이 날뛰고 피를 보는 전장이 저절로 그려지는 전쟁 계획안은, 재미없는 동화나 예절교육보다는 훨씬 재밌었으니까.
***
-죽인다! 죽일 것이다!
-천벌을 받을 것이야!
-저주한다! 죽어서도 저주할 것이다!
“헉!”
눈을 그대로 염료로 쓴 것 같은 순백색의 로브가 숨을 들이키며 머리를 들었다. 로브의 두건 그림자 밑에서 심장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브를 뒤집어쓴 이는 숨을 깊고 천천히 들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풍성한 로브 소매를 들자 절그럭거리는 갑옷이 모닥불에 번들거렸다. 표면에 붉은 색으로 비치는 불빛이 마치 흐르는 피처럼 보여 다시금 소매 밑으로 숨겼다.
찌륵찌륵
유로파와는 수천 km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깊은 밤의 풀벌레 소리는 똑같았다. 유로파와는 전혀 다른 식생의 나무들이 잔뜩 있었지만 고요한 숲 속은 똑같이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꿈에서 깬 로브의 주인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코를 자극하는 생생한 탄내와 불타 뼈만 남아 저주를 내뱉는 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을 가둔 기사들만이 둥그렇게 야숙을 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서서 고개만 푹 숙인 채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빠득
로브의 주인, 성녀는 기사들을 보며 절로 이를 갈았다.
습관처럼 품에서 성상을 꺼내 주먹으로 꽉 쥐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그만 성상은 마치 손 주인을 조롱하듯,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질 정도의 악력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며 좋아했던 옛날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게 뭐가 좋다고, 대체 뭐가 좋은 거라고 그렇게 방방 뛰었는지. 이런 운명이 될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도망쳤을 텐데.
성녀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놈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의 연회를 즐기며 낄낄거리며 지상의 고통을 음미하고 있었다.
썩을 놈들, 위선자, 거짓말쟁이 같으니!
하지만 성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살아있는 철창 속에 갇힌 채 야수처럼 풀어지고 도로 묶이며 그저 무기처럼 휘둘러지는 것뿐.
지금껏 교황청에 반하는 수많은 개혁자들을 베어넘기고, 교회에 반하는 수많은 왕을 암살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힘도 없이 신음하는 약자들마저 학살하는 꼴이라니.
백색의 천 밑으로는 피에 찌들고 상처투성이며 죄를 지은 한낱 저주받은 몸뚱이만이 남았다.
‘누가 나를......’
그녀는 초췌한 안색으로 소망했다. 제발 누가......
‘......죽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