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금화 1만 리브르-7
“-카스테냐는 바람 앞의 등불이며 파도 위의 천조각입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농사일을 하던 알레한드로 제독, 아니 몰락 귀족 알레한드로 후작에게 찾아온 전령은 눈물콧물을 짜내며 그 앞에 바짝 엎드렸다.
하급 귀족인 전령이 귀족 간의 예의도 없이 거지처럼 엎드려 애걸하는 것에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번 해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이십여 개에 달하는 해안 도시 및 마을이 추산도 불가능할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나포한 전열함을 빼앗긴 것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표현 못할 정도의 막심한 국가적 손실이었다.
후작이 몰던 소가 큼지막한 눈을 꿈뻑거리며 옆에서 우물우물 풀을 뜯어먹는 가운데, 전령은 해적의 습격이 온 바닷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후작의 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후작의 애국심은 식었고, 이제는 불 꺼진 벽난로의 장작처럼 늙어가는 노인일 따름이었다.
‘그런 뜻이었나......’
후작은 ‘간곡히 복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하고 울먹이는 전령의 등판을 내려다보며 마드리드에서의 논공행상 직후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
쫄딱 젖은 채 마구간에 있던 자신의 마차를 찾은 알레한드로 제독은 대선장을 태우기 위해 왕궁 입구로 향했다. 꼬마 대선장과 검은 기사는 처량하게 계속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제독은 마차 문짝을 열고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왕궁 구조를 잘 몰라서 좀 늦었어. 얼른 타게나.”
하지만 대선장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시지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그 말에 대선장이 얼굴을 굳혔다. 푸대접을 받은 마법사가 할 일이 남았다 말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무모한 짓이네.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걸 셈인가? 누구도 자네를 옹호하지 않을걸세.”
“후작님이 생각하는 게 아니니 걱정은 마시지요.”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자네 말을 믿겠나?”
대선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모자에 고인 빗물이 넘쳐 챙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제독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게. 차라리 에크나르프로 가는 게 어떤가? 대마법사에게 해군이 모두 가라앉은 마당이라 해군 전력이면서 마법사이기까지 한 자네를 크게 써줄 걸세. 거기라면 정말 급박해서 자네에게도 귀족 작위를 줄 거야. 그 다음에 카스테냐에 면박을 주건 말건 하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정말로 아직 남은 볼일이 있긴 합니다. 국왕께 무슨 해코지를 한다거나 그럴 생각이 아닙니다.”
“후, 뭔데 그런가?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면 내 기다려 줌세. 저 멀리 카디스까지 걸어가고 싶진 않잖은가.”
“후작께서 상관하실 게 아닙니다. 걱정 말고 먼저 내려가시지요.”
“걱정을 어떻게 안할 수가 있겠나. 왕궁에 화약더미를 놓고 가는 기분인데.”
“......”
대선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계속해서 눈을 내리깐 채 고개만을 들어 후작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 걱정은, 나라를 위한 겁니까 아니면 절 위한 겁니까?”
“......둘 다일세. 자네가 카스테냐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이고, 자네가 무모하게 달려들어서 명을 깎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아서 그러네.”
그 말에 대선장은 잠시 조용히 비를 맞았다. 살짝 옆으로 고개를 꺾는 것이 생각에라도 잠긴 걸까.
“신기하네요. 저와 상관도 없는 누군가가 절 걱정한다는 게. 안 그래 브란트?”
“저야 주군이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이 느껴집니다만.”
“그건 너무 나갔는데.”
살짝 농담을 주고받는 대선장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다. 표정도 입꼬리도 변화가 없는데 목소리만은 농담을 들은 사람 특유의 웃음기 섞인 살짝 들뜬 것이었다.
“후작님. 제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안심시키려고 설득하는 건 처음입니다. 후작님이 있건 말건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형식적이지만 같이 싸워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마드리드로 올라오면서 친해져서 그런 걸까요? 사실 저도 왜 이러는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빈민가 바깥으로 나온 게 그렇게 얼마 안 되었거든요.”
“......”
“그래서 이런 생소한 경험은 참 신기합니다. 경험은 좋건 나쁘건 다양할수록 좋은 법이지요. 그런 고마움의 의미에서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대선장이 외투 안쪽에서 선뜻 원통 하나를 꺼냈다. 보통 해도를 돌돌 말아 보관하는 데 쓰는 통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가지런히 여미어져 있던 단추가 모두 풀려 외투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희망봉 건너 힌디까지 가는 항로가 기록된 해도입니다.”
“그건 쓸모가 없는 것일세. 희망봉 근방 해역에 늘 폭풍우가 치고 있다는 걸 모르는가?”
뱃길이 끊긴 지 자그마치 백 년이다. 지형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라 뱃길이 사라지기 전에 만들어졌을 저 해도는 쓸모가 없다.
“이젠 아닐 겁니다. 정확히는, 이 해도 앞에서는 말이지요.”
제독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가 있다고 한들 폭풍우를 뚫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바다를 누벼야 하는 제독에게 땅을 준다...... 물러나란 얘기 아닙니까?”
“......”
제독은 대답 대신 쓴웃음으로 답했다.
“이 해도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희망봉에 있는 폭풍우를 걷어내는 마법이지요.”
“그렇게 좋은 거라면 자네가 쓰지 않고?”
“말했잖습니까. 선물이라고. 저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겪는 경험의 중요도 역시 다른 사람과는 기준이 다르며 고마움에 대한 기준도 다릅니다. 제독께서는 제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셨으니, 응당 그 대가를 드려야지요. 지고하고 영명하신 국왕 폐하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대선장의 뼈 있는 말에 제독은 말이 없었다.
“보나마나 어디 척박한 데로 가실 텐데, 거기에만 있지 말고 장사나 한번 해보시지요. 제독이 땅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
“해적이 불안하시면 제 휘하 해적이 있으니까 호위비만 넉넉히 주시면 붙여드리지요. 후불도 되고 같이 싸운 정이 있으니 외상도 가능합니다.”
제독은 조용히 눈을 깜박이며 대선장의 말을 경청했다.
참 기이한 일이었다.
해적이 해군에게 제안하는 것도 그렇지만, 제독이 집중하는 건 따로 있었다.
저 친구, 만날 때마다 조금씩 억양이나 말투가 바뀌면서 마치 오랫동안 귀족 지위를 누리던 이들처럼 변하고 있었다.
마법사를 대동한 자리에서 처음 대화를 했을 때는 기어들어가는, 주눅든 목소리였다. 귀족 특유의 어투는 완벽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외모에 걸맞게 어린아이가 어른 앞에서 어색하게 웅얼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좋아지더니 지금은 아예 완숙한 귀족의 경지에 다다랐다. 틈틈이 뭔가를 교육하는 것 같던 저 기사 덕분일까?
올해 열여덟이라는 것과는 달리, 소년에게선 족히 수십 년은 정치계에 몸담은 거물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완전히 자기만의 특색을 개발했다는 것이겠지.
그건 마드리드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 확실히 느꼈다.
남을 내려다보는 것 같으면서도 오만하진 않았고, 가면을 쓴 것 같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화법에, 거기서부터 우러나오는 여유, 확장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한 정치적 의미부여까지.
그렇다고 배배 꼬인 태생 귀족들처럼 너무 돌려 말하지도 않고 적당한 직설 화법도 잘만 구사했다.
‘훌륭한 귀족이군.’
저 오싹한 느낌이 드는 경직된 표정만 고친다면 썩 괜찮을 테지.
아무 답이 없는 제독을 향해 대선장이 착착 걸어오더니 해도가 담긴 원통을 내밀었다. 낡았지만 그만큼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원통에 새겨진 장식도 약 백 년 전에 유행하던 양식이었다.
제독은 자신 앞에 통이 불쑥 내밀어지자 얼떨결에 그걸 잡았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원통을 쥔 채 제독은 멍하니 대선장을 보기만 했다.
“누구에게 호의에서 우러나온 선물을 주는 것도 사실상 처음이군요. 오늘은 여러모로 신기한 날입니다.”
결국 제독은 설득을 포기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왕궁을 쑥밭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이렇게까지 할 정도라면 정말로 큰 사고를 치려 하는 건 아닐 것이란 판단이었다. 나름 개인의 사정이 있으리라.
“너무 큰 사고는 치지 말아주게.”
“당장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는 그럴 생각이고?”
“이제 카디스로 돌아가면, 바로 제독 직위는 반납입니까?”
“그렇겠지.”
“조만간 다시 제독 직위를 내려준다고 사람이 갈 겁니다.”
설마하니 대선장이 왕에게 칼을 들이밀고 알레한드로 후작을 제독으로 복귀시키라고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무언가 큰 문제가 생겨 왕실에서 알레한드로 후작을 재등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는 것’뿐이다.
“......해적을 동원할 셈인가?”
“보시다시피-”
쩔렁. 대선장이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제가 세운 공은 이 돈주머니 하나밖에 되지 않잖습니까? 이깟 푼돈, 저는 없어도 되니 그냥 돌려주렵니다. 대신 제가 해준 것들은 다시 돌려받아야지요.”
따지고 보면 릴람파고 해전에서 나포한 배들은 모두 대선장 덕분에 나포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원래라면 대선장이 그 배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카스테냐에게 넘겼다.
제독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장교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었다. 순간적으로 대선장은 호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귀족 작위를 받는다는 조건 하의 호의라기엔 너무 통이 컸던 것이다.
‘기준이 다르다 했지.’
생각해 보면 대선장에게 그깟 배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배는 건조하는 데 오래 걸리고 싸움으로 나포하는 것도 힘들다. 그러니 가치가 높다.
하지만 대선장은 그 배들을 나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선장에게 배의 가치는 낮다. 큰 배가 아니라 계속해서 낡고 작은 배를 타고 다니는 것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어찌 되었건 귀족 작위는 취소되었고, 푸대접만 받았으니 호의는 다시 돌려받을 때가 되었다.
제독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해군은 되도록이면 적당히 봐주게. 그 친구들이 뭔 죄가 있겠나.”
이전이었다면 제독은 당장 왕궁에 대선장이 획책한 일을 알렸겠으나, 왕궁에 들어갔다 나온 지금의 제독은 이전과 달랐다.
타오르던 열정은 빗물을 맞고 꺼졌다. 그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배신감만이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흐를 뿐이었다.
그는 조국의 이득보단, 자신의 부하들을 챙기기로 했다.
“그러지요.”
드물게 본 적 있던, 대선장의 섬뜩한 미소에 제독은 시선을 돌렸다.
***
“-그러니 제독 직위를 다시 내리겠다는 국왕 폐하의 명이십니다아! 제발 돌아와주십시오!”
제독은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전령을 내려다보았다.
“겨울 동안 패전을 거듭했던 패장이 무슨 낯으로 나라의 녹을 먹겠나. 돌아가게.”
“하, 하지만......”
전령의 말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후작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 소의 뒤편에 매달린 쟁기를 잡았다.
“허이야, 가자.”
움메-
젖소와는 다른 흑색의 긴 뿔을 가진 투우용 검은 소가 얌전히도 움직였다. 투우장에서 투우사 몇 명을 죽이고도 살아남아 은퇴한 늙은 소였다.
그에게 내려진 봉토 주변에 자리 잡고 있던 중앙귀족 한 명이 ‘무적함대를 이끌던 제독을 흠모하고 있었다’며 선물로 보낸 녀석이었다.
말이 선물이지,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네 꼴과 똑같은 늙은 소다!’라며 조롱하는 것이고, 경제적인 의미로는 ‘투우사를 몇 명이고 죽인 명물이라 죽이기도 아깝고 그렇다고 투우사를 또 죽일지도 모르니 이참에 치워버려야겠다’였다.
후작은 자신과 비슷한 신세인 늙은 소를 몰았다.
대선장이 준 원통은 집안 깊숙한 곳에 처박아 놓았다.
그는 더 이상 바다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활한 탓에 염증도 느끼고 있었거니와......
‘세상은 사분오열되어 있던 해적들이 한데 모이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목도했다.’
그 우두머리인 대선장에게는 이제 권력이 쥐어진 거나 다름없다. 그에겐 끊임없는 정치적인 손길과 적대적인 창칼이 날아들겠지. 지금은 유로파의 전쟁 때문에 신경이 다른 데로 쏠려 있지만 그 전쟁만 끝나면 바다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함부로 예측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앞으로 바다는 평화로운 곳이 아니게 될 거야......’
조용히 움츠리고 있던 바다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는 더 이상 바다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