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금화 1만 리브르-6
니아트리브와 카스테냐 간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소식이 유로파를 강타했다.
카스테냐의 해안 전체가 해적들에게 공격당한 것이다.
단순한 해적의 습격 수준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철저하게,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그건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재물이 털리고, 시가지가 불타고, 저항하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특히나 귀족 저택을 비롯해 값비싼 물건이 있는 곳은 빠짐없이 약탈당해 상류층의 자존심은 미천한 해적들의 총탄에 구멍이 뚫렸다.
거기에서 그쳤다면 차라리 다행이었겠으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니아트리브와의 해전에서 나포한 2백 척 조금 못 되는 수의 선박을 모조리 빼앗겨 버린 것이다!
니아트리브와의 전쟁에서 카스테냐가 나포한 배는 많았다. 릴람파고 해전에서 소년이 돛대를 박살내 나포할 수 있었던 백여 척과, 그 이전에 니아트리브의 작전이 실패하며 카스테냐 해군에게 나포된 80여 척이었다.
그 많은 배들을 모두 한곳에 몰아넣어 수리할 수는 없었으니, 여러 항구에 나누어서 수리하고 있었는데 그걸 모두 해적들에게 나포당하는 역사에 남을 희대의 대사건이 벌어져 버렸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피해에 카스테냐는 길길이 날뛰었다.
바다의 패권을 잡은 국가가 고작 해적 따위에게 털렸다는 자존심 문제는 둘째 치고, 이백 척의 전열함을 건조하는 데 드는 돈과 시간은 숫자 따위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걸 눈 뜨고 빼앗겼다는 것은 누구도 참지 못하리라.
“당장, 당장 저 아소르스 해적 놈들을 모두 토벌하라!”
하지만 무슨 수로?
니아트리브와의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선박은 꽤나 많아 아직 다 수리를 마치지 못해 고작 절반만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고작 절반의 해군력으로 하나로 뭉친 해적 떼를 상대한다는 건 그냥 죽으란 얘기였다. 체급은 우월하겠으나, 해적은 훨씬 숫자가 많다. 니아트리브 같은 물마법사가 있지 않는 이상은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니아트리브도 고려해야 했다. 아무리 해군력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아직 정예부대인 제 1함대가 건재했으므로. 남아 있는 해군력이 해적을 상대하느라 소비되면 결국 니아트리브만 좋은 일 해주는 거다.
더 분통 터지는 것은 그 습격을 주도한 대선장이라는 해적의 행태였다.
그는 습격 당일, 간 크게도 카스테냐 해군의 중심부인 카디스를 직접 찾아와 새로 부임한 제독에게 편지와 주머니 하나를 던지고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배를 타고 바로 떠난 것도 아니고 카디스의 고급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식사까지 한껏 즐기고 돌아갔단다.
그건 조롱이었다.
나 혼자 와도 너희들은 내게 손대지 못한다는 정치적 의미임을, 귀족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속 터지는 일인데, 편지는 한술 더 떴다. 대선장이 왕실에 보내라고 전달한 편지 내용을 축약하자면 이러했다.
<내가 카스테냐를 도와 싸운 것에 대한 가치는 금화 1만 리브르다. 해적으로서 참으로 거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거금일진대, 영명하신 국왕 폐하께 어찌 이 거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포상은 반납하겠다. 대신 그 신뢰의 조건으로 카스테냐에게 해주었던 걸 다시 가져가겠다.>
대선장이 편지와 같이 놓은 가죽 주머니는 마드리드 왕궁에서 받은 1만 리브르가 담긴 주머니였다.
편지 내용을 해석하면 참으로 많은 조롱이 들어가 있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필체와 미사여구 역시 완벽한 귀족이라 귀족들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야 했다.
대선장이 남긴 편지는 왕실로 전달되어 국왕을 실신하게 만들었으며, 카스테냐 주재 타국 대사들을 통해 사건의 뒷사정이 각국으로 퍼져 나가게 만들었다. 강대국이 상대적 약자를 홀대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대사건은 그들에겐 좋은 얘깃거리에 불과했다.
이야기가 퍼지는 데엔 카스테냐 해군도 한몫했다.
갑작스런 알레한드로 제독의 축출로 인해 카스테냐 해군은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니아트리브로부터 카스테냐를 지키고 국가의 자존심을 세운 영웅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쫓겨나가듯 퇴임했다. 그 이유가 평민 출신이라 버림받았단 건 말단 수병까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귀족 출신인 장교들조차도 ‘이건 아니다’면서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이유로 공신을 갈아치운다면 누가 앞서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려 하겠는가?
그런 해임 건도 있겠다, 장교들이고 수병이고 대선장이 카스테냐에게 받은 부당한 대우에 관한 소문을 부지런히 여기저기 퍼날랐다.
해적들은 얌전히 돈 될 것만 가지고 간 게 아니었다. 대선장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리듯, 방화도 뒤따라 카스테냐의 수십 개 해안 도시가 싸그리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멀쩡한 건 습격이 없던 군항 카디스와 지브롤터 해협 너머 지중해 안쪽의 항구뿐.
“우리를 공격한 게 푸대접 때문이라고?”
“폐하께서 그 해적에게 귀족 작위라도 줬으면 이렇게 다 불탈 일은 없었어!”
해적의 습격을 받은 지역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왕실모독적인 말을 입에 담길 주저하지 않았다. 해군력 1위 국가인 만큼 항구를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게 박살나 버리니 민심은 자연스럽게 흉흉해졌다.
해적이 먹을 걸 죄다 가져가 버렸으니 못살겠다 하고 해적으로 돌변해 아소르스 제도로 향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많은 식량을 가져가 버린 아소르스 제도에는 먹을 게 있을 테니까.
대선장은 그리하여 카스테냐와 그 왕실의 체면에 단단히 먹칠을 해버리는 것도 모자라 먹물 항아리를 머리에 씌워 버린 셈이 되었다.
모두가 카스테냐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자업자득이었다.
아소르스 제도의 해적들을 모조리 휘하에 거둔 우두머리를 푸대접하고도 해적들의 보복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니!
그야말로 근시안적이다 못해 눈이 먼 행동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카스테냐 얘기만 계속 떠들었고 정계에서는 역사책에 이 기록을 크게 써넣으라며 낄낄거렸다.
앞으로 카스테냐는 족히 수십 년은 이 일로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런데 카스테냐의 삽질은 단순히 비웃음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니아트리브에게서 나포한 전열함이 모조리 해적의 손으로 넘어감에 따라, 이제 아소르스 제도는 진정한 의미의 마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선장이라는 구심점이 생긴 그 순간부터 아소르스 해적들은 명실상부하게 하나의 세력이었다.
바다 한가운데 나타난 강력한 군사집단은 바다의 패권에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나라에게 위협이었는데, 이번 일로 정말로 카스테냐를 꺾어버리고 패권을 잡아버렸으니......
왕위 계승 전쟁 때문에 아직 거기까지는 직접적인 접선을 할 여유가 없었으나, 각국이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에크나르프임에도 수도는 평화롭기만 했다. 전선에서 수많은 이들이 납탄에 죽어 나가고 어떤 고통에 절여져 폐인이 돼가는 것인지는 알 바 없다는 듯 상류층은 사치를 부리고 하류층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빴다.
그 에크나르프 한복판에, 귀가 다른 이보다 뾰족한 이가 존재했다.
혼혈 엘프.
엘프보다는 짧지만 인간보다는 뾰족한 귀를 가진 이들. 유로파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세운 엘프 유목 민족이 유로파에 남긴 깊은 상흔의 증거였다.
유로파에는 딱 두 지역에 이런 엘프의 흔적을 가진 이들이 산다.
하나는 동부 유로파이자 시베리아와 맞닿은 루스 지방. 나머지 하나는 발칸반도였다.
루스 지방은 대략 4백년 전에 유목 엘프 제국에 점령당하는 바람에 엘프가 대거 몰려들어 혼혈이 발생했다.
발칸반도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전, 무려 고대의 ‘위대한 제국’이 건재했던 1천여 년 전에 유로파로 흘러들어온 이들의 잔재였다.
천여 년 전.
이슬람이란 종교가 생기기도 전이며, 지금은 전 유로파의 국교인 카톨릭이 일부 지역에 창궐하는 이교도 취급을 받는 시대였다.
그때 현재의 루스 지방의 한참 동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진군한 유목 민족이 있었다.
그 이름은 ‘엘프족’.
현재 유로파 인들이 ‘엘프’라 부르는, 귀 긴 이들을 가리키는 호칭의 시초가 된 이들이었다.
유로파의 인간과 아시아의 엘프가 처음으로 서로의 손끝을 맞닿는 기념비적 사건이었으나, 그 기념비는 대차게 인간의 머리통을 후드려 패는 것으로 시작했다.
원래 그 자리에 살던 바바리아 인을 내쫓아 ‘위대한 제국’으로 민족 대이동을 시킨 원인이며, 바바리아 인을 쫓아낸 자리에 ‘엘프 제국’이라며 눌러앉아 ‘위대한 제국’을 틈만 나면 두드려 대 결국은 두 개로 쪼개지게 만들었다.
유로파의 시련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위대한 제국이 이름만 남기고 둘로 쪼개지며 무너짐으로써, 유로파는 퇴보했다.
힘 있는 이들은 각자 세력을 만들며 서로 싸워 댔으며 야만족이 사방을 들쑤시며 평균 문명을 후퇴시켰다. 위대한 제국이 세워놓은 문명은 한낱 돌더미가 되었다.
그 혼란을 틈타 세를 키운 카톨릭이 유로파를 지배하며 오로지 종교만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게 만들어 이른바 ‘암흑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 고대의 ‘엘프 제국’의 잔재가 바로 현재 발칸반도 여기저기에 낱알처럼 흩뿌려진 엘프들과 중부 유로파의 엘가리 왕국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엘프’란 명칭은 크나큰 욕으로 쓰였으며 발칸 반도에 자리한 엘프들의 처지도 좋지 못했다.
그래도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시간이 지나며 점점 희석되며 그저 지나간 역사려니 하던 때.
그 고대의 엘프 제국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정도의 거대한 파도가 유로파를 한 차례 때렸다.
바로 푸른 용을 앞세운 또 다른 유목 민족 엘프의 침공이었다.
그들은 과거의 엘프 제국보다도 잔혹하고 철저하게 반항하는 이들을 짓밟았다. 마치 인간의 멸망을 바라는 것처럼, 점령은 뒷전이고 오직 살육과 약탈만을 행했다.
파죽지세로 닥쳐오던 이들이 유로파 연합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지금의 라인 연맹의 프아이서 지방까지 몰려왔을 때, 그들이 갑자기 회군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인간의 역사가 끝장났을 지도 모른다.
그 일로 인하여 유로파에서 엘프의 이미지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발칸반도의 엘프조차도 푸른 용과 함께한 새로운 엘프에게 치를 떨며 ‘우리는 유로파인이지 엘프가 아니다!’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유로파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간 엘프 대제국은 2백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앙금이 사라지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래서 엘프가 사는 동부 유로파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에크나르프에 있는 혼혈 엘프에게 향하는 시선 역시 곱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 혼혈 엘프는 그런 세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였으니까.
‘카스테냐가 해적에게 졌다......?’
엘프 대제국의 속국이었다가 150여 년 전에 독립한 루스 공국의 지배자이자, 지금은 먼 타지에 떨어진 유학생인 표트르 마그나노프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상념에 잠겼다.
유로파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 하나가 해군의 중요성이었다.
루스 공국은 툭하면 얼어버리는 추운 바다와 접하고 있어 해군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루스 공국의 ‘모든 것’을 발전시키고 싶은 표트르에게는 해군 역시 필요했다.
‘해군을, 바다를 가져야 한다.’
물을 통한 물류운송의 중요성은 표트르도 안다. 좁은 강줄기보다는 바다가 더 좋은 운송길이란 것도 안다. 험하고 진창이 가득해 도로 건설이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육상 운송이 최악인 루스 공국이라 더더욱 그렇다.
만일 해상 운송길이 뚫리고 그걸 왕실이 독점할 수 있다면?
‘막대한 경제력을 손아귀에 쥐고 지방 토호들을 누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개혁도 수월해지겠지.’
얼지 않는 바다, 자유롭게 무역 가능한 바다를 가져야 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표트르이니만큼, 저 멀리 지중해에서 들려온 소식은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해군 최강국인 카스테냐를 꺾을 정도의 강한 해적이라.’
표트르는 카스테냐는 가본 적이 없지만 니아트리브의 해군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카스테냐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수백 척에 달하는 늠름하고 위용 있는 니아트리브의 해군 전력이 한수 접고 들어가야 될 정도라니 카스테냐의 해군력은 필시 1위라는 이름에 걸맞으리라.
그런 카스테냐를 거꾸러뜨린 해적 세력은......
‘아무리 니아트리브와의 싸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다 해도 국가와 해적을 비교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해적은 그 세력 차를 이겨냈어. 대선장이란 인물 때문인가.’
해적이 아무리 뛰어나봤자 해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선장이 그 한계 너머로 해적들을 이끈 것일 터.
‘루스 공국이 바다를 가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는 루스 공국과 서쪽을 맞댄 폴란트를 공격해 북해 해안을 점령하는 것.
이는 하책 중 하책이었다.
폴란트-리타냐 대공국은 제법 강국이다. 에크나르프나 동부국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유로파 동부의 패자라고 가슴을 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야심 가득한 라인 연맹의 프아이서조차 폴란트에 기가 눌려 손부터 내밀 정도다.
그런 이들에게 싸움을 걸면 낙후된 루스 공국은 몰락하리라.
둘째로는 남부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남쪽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흑해다. 루스 공국의 남쪽이자 흑해 북쪽 해안 지방인 우크란 지역은 여러 조그만 국가들로 분산된 상태. 그 중 바다와 연결된 국가를 군사적으로 병합하여 흑해와 맞닿게 하면 된다.
하지만 흑해 남쪽은 다름 아닌 이슬람의 땅이었다.
술탄국이 지중해로 나가는 곳에서 통행세를 받아먹을 게 뻔하고 경제적 압박 수단으로 이리저리 휘둘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강한 해군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강대한 술탄국이라지만 해군엔 투자를 덜 했다. 술탄국이 이슬람 해적을 사략선으로 많이 받아들인 이유였다.
‘아소르스 제도의 유로파 해적이 북에프레카 서부의 이슬람 해적을 일소했다 들었다. 대선장의 도움을 받아 상선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면......’
자신의 국가를 어떻게든 발돋움이라도 시켜보려는 군주의 눈이 깊어졌다.
***
“.....그렇단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후작님! 카스테냐는 바람 앞의 등불이며 파도 위의 천조각입니다!”
카스테냐 동쪽의 산골짜기 어딘가. 알레한드로 후작의 앞에는 고급진 옷을 입은 인물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