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99화 (100/128)

99화

금화 1만 리브르-5

릴람파고 해전이라 불리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큼직한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카스테냐는 바다의 패권은 아직도 자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만방에 알렸다.

에크나르프는 반색했고, 다른 대륙 세력은 사색이 되었으며, 니아트리브는 질색하며 그래 패권 너 가져라 하며 전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야만 했다.

절반을 넘는 해군 전력이 사라진 니아트리브는 에크나르프의 심정을 느끼며 결국 카스테냐에게 보상금을 물어주기로 하고 평화조약을 맺었다. 다만 에크나르프의 왕위 계승 인정은 하지 않아 에크나르프와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에크나르프는 기세등등했다. 바다는 자신의 동맹인 카스테냐의 것이 되었다. 제해권을 잡은 것은 에크나르프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 강력한 억지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결말을 맺기 전까지 방심은 금물. 운명은 늘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

카스테냐의 최대 군항 카디스.

지난 니아트리브와의 전쟁에서 부서진 배들을 수리하느라 뚝딱거리는 소리가 온종일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항구를 향해, 한 척의 낡고 조그만 갤리온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항구를 메운 전열함들보다 작아 꼬마처럼 보이는 배는 선수상 부분이 도끼로 찍어 떼낸 것처럼 만신창이라 꽤나 인상적이었다. 배 위에는 당당히 검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해골 그림 같은 건 없었지만 보통 바다에서 검은 깃발이 의미하는 건 해적이다.

해적선이란 걸 알리면서 느긋하게 부두에 정박하는 배. 경계병의 보고로 인해 수병 몇이 머스킷을 들고 부두에 마중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머스킷을 감히 겨눌 수 없었다.

“대, 대선장이다!”

니아트리브와 함께 맞서 싸운 대선장을 모르는 이는 카스테냐 해군에 없었다.

전투 승리 후, 카스테냐 수병들의 거나한 잔치가 벌어졌다. 대승 중 대승이었으니 장교고 수병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뒤섞여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당연히 알레한드로 제독도 수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같이 자리에 앉아 잔치를 즐겼다. 그 잔치에서 알레한드로 제독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니아트리브 수병과 닮은 복장의 대선장의 모습은 숱한 수병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새 제독이 오셨다죠? 축하하러 왔습니다.”

그 말을 믿는 이는 없었다. 해적이 뭐가 좋다고 해군을 축하하러 오겠는가.

무릇 해적들을 제 밑으로 깔고 앉은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사적이었다. 빳빳하게 잘 다린 옷은 색깔 때문에 니아트리브 수병을 생각나게 했지만 단정한 의복에 예의바른 말투라 적이라는 느낌보다는 귀족을 앞에 둔 것 같이 머리부터 숙이고 싶은 느낌이었다.

수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년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 집에라도 온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해군 본부 건물로 향했다. 배에서 내린 건 소년 혼자였지만 아무도 소년을 막지 않았다. 대선장이 마법사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

“해, 해적이 무,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

새로 부임한 태생 귀족 출신의 해군 제독은 덜덜 떨면서도 위엄 있게 보이려 애썼다. 물론 덜덜 떤다는 것 자체부터 가망은 없었다.

“당연히 축하드리러 왔지요. 같이 싸운 전우로서 새 제독이 부임한다던데 축하의 말 한 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아 말입니다.”

“저, 전우라니, 카스테냐는 해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적이 없다!”

니아트리브와의 전쟁이 끝나고, 카스테냐는 아소르스의 해적과 손잡았단 것은 조용히 묻고 싶어 했다. 강대국으로써의 체면이 있지 않은가.

“뭐 그러고 싶으시다면야 존중하겠습니다. 어쨌건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독.”

소년은 알레한드로 제독을 만날 때마다 눈을 깔고 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

소년은 해군 제독을 바라보며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제독은 그 시선을 마주치는 동시에 서늘한 손길이 뒷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과 이유 없는 공포심에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야 했다. 저 기묘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보기에 새 제독의 강단은 좋지 못했다.

다른 장교들 역시 소년이 살짝씩 눈동자를 돌려 자신을 볼 때마다 봄날에 어울리지 않는 한기를 느껴야 했다.

“왜 그러십니까, 죄라도 지은 것처럼.”

조그만 체구에 앳된 얼굴에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까지.

누구나 ‘애는 저리 가라’하면서 무시할 특징들이었지만, 누구도 소년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마법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소년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 자체가 마치 물속에서 튀어나온 크라켄의 다리처럼 장교들과 제독의 심장을 칭칭 휘어감고 있는것만 같았다.

표정의 변화는 없으나 딱 봐도 ‘나 화가 났습니다’하는 상황이라 모두가 침묵했다.

마드리드 왕궁에서 있었던 1만 리브르짜리 푸대접은 귀족인 그들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여, 여, 여기엔, 왜, 왜 온 것이냐......!”

제독의 말은 성대에서부터 기어 올라오기 힘들었는지 주인처럼 기진맥진하여 덜덜 떨었다.

“뭐가 그리 무서우십니까? 나 원, 그래가지고 험한 수병들 휘어잡겠습니까. 정말 축하라니까요. 다만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부, 부탁이라니. 해적과는 협력하지 않, 읍!”

소년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자 덜컹 하면서 의자가 움직여 서 있던 제독의 오금을 차 그 위에 앉혔다. 제독의 몸떨림이 더 심해졌다.

“간단합니다. 그저 이걸 왕궁에 전달해주면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해적이라지만 같이 포연을 뒤집어쓴 전우인데 설마 거절하진 않으시겠지요?”

니아트리브와 같이 싸운 건 알레한드로 제독이지 새 제독이 아니다. 하지만 얼른 이 무서운 인물을 내보내고 싶었던 제독은 트램블 트리(사시나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년은 곱게 접은 편지봉투 한 장과 큼직한 가죽 주머니를 제독의 책상에 내려놓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풀어헤친 푸른 외투가 안쪽의 흰 셔츠를 드러내며 펄럭였다.

같은 시각.

카스테냐의 해안이 동시다발적으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

“싹 다 털어라!”

“우하하하! 카스테냐도 별것 아니구만!”

카스테냐의 모든 해안 거점들이 해적들에게 동시에 약탈당하고 있었다.

무역항이건 작은 어촌이건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해적의 목표가 되었다. 심지어 군항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두는 수십 척의 해적선들에게 맥없이 점령되었다.

해적들은 창고를 털고, 상점을 털고, 식당을 털었다. 그것도 모자라 불까지 질렀다.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 셈인지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그들을 토벌하러 올 군대가 무섭지 않단 말인가?

와장창 거리는 깨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간간이 들려오는 쇳소리와 총소리가 귀를 마구 두드렸다. 무언가 타는 냄새와 자욱한 연기가 사람 사는 곳을 뒤덮었다.

뭐든지 약탈하고 다닐 것 같은 해적이란 이미지와는 달리, 해적은 의외로 해안가를 습격하지 않는 편이었다.

생각해 보라.

배의 크기는 한정적이다. 실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다. 또 털고 있는 도시에 귀한 물품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며 안다고 해도 그걸 수비대를 상대하면서 어느 세월에 다 챙겨 올 것이냐 말이다.

그럴 바에는 배 안에 있는 한정적인 적만 상대하면 되며 고부가가치 물품이 있을 확률이 더 높은 배를 터는 게 더 낫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 약탈하던 옛날이나 해안을 터는 거지. 요즘은 안 그런다.

비슷한 예로 식량이나 목재를 운반하는 상선은 물건의 부피만 컸지 가격은 상대적으로 얼마 나가지 않아 해적선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적었다. 물론 같은 해적에게 팔 목적으로 그런 배만 터는 해적도 존재한다.

그런데 육지를 약탈하지 않는다는 건 해적의 수가 적었을 때 얘기고.

수많은 해적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합쳐서 집단으로 공격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조그만 소도시의 수비대만으로는 절대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된다. 대도시라 한들 그만큼 더 많은 해적이 몰려들면 그만이다.

사람이 수백이 되고 수천이 되면 그게 곧 군대다.

예전에 없던, 사략함대와는 차원이 다른, ‘해적의 군대’가 일제히 카스테냐를 들이쳤다.

“저쪽! 저쪽에 조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여기가 번화가여! 여기만 싹 다 털으면 돼!”

그리고 그 선두에는 놀랍게도 그곳을 고향으로 둔 이들이 있었다.

아소르스 제도는 카스테냐와 가깝기 때문에 당연히 카스테냐 출신 해적들이 많았다. 해당 도시나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지위를 가진 해적들은 귀중품이 어디 있는지 죄다 꿰고 있었다.

“여긴 우리 가족 집이니까 실수로 불 안 지르게 조심해!”

“자네들 얼른 나오게나! 내 긴히 할 말이 있어!”

“아부이 어무이! 얼렁 나오쇼! 마을 밖으로 나가 계셔! 아 이유는 묻지 마시고!”

당연히 가족이나 지인은 습격 전에 급히 대피한 지 오래.

해적들 중에는 섬이 아니라 육지에 멀쩡한 가정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포로를 바로 선원으로 임명하여 해군이 해적이 되고 해적이 해군이 되는 직종변경이 잦은 이 시대 바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걱정 마시라니까요, 얼른 짐 싸고 움직이십쇼! 저항하지 않으면 해치진 않으니까!”

그 말대로 해적들은 저항하는 이만 해치지 도망가거나 벌벌 떨면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들의 표적은 말 그대로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각종 상점의 귀중품은 물론이고, 식량, 포목, 목재,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까지 모조리 가져갔다. 짐을 실을 배가 많다보니 부피 큰 것도 죄다 챙길 수 있던 것이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있어도 수적으로 밀려 쓸려나갔다.

군항? 수비대? 와르르 몰려 온 이들에게 지레 겁먹고 도망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면 해치진 않겠다! 대선장의 이름을 걸고!’하는 말에 항복했다. 대선장이란 이름은 릴람파고 해전으로 인해 나름 유명해진 지 오래였다.

이런 대규모 습격은 이전에는 없던 공격방식이었다.

서로를 그렇게 못 믿고 뒤통수 조심하느라 집단 행동에 소극적이던 해적들이 이러한 대규모의 공격이라니!

“여긴 네 고향이야! 제정신이냐!”

“아이씨, 나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녀 아부지! 그래도 목숨이란 재산은 보장해 주잖어! 아니면 그냥 나 따라 오던가!”

길잡이가 된 해적들은 입맛이 썼다. 그들이라고 자기 고향을 불태우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가족이나 지인은 미리 떠나라고 언질도 줬지 않은가.

‘대선장님이 지금 화가 많이 나셨는데 어떻게 말을 안 듣겠어!’

‘마법사왕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물고기밥이다......!’

한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집결한 해적들이 집단행동을 한다면 이유는 하나다.

우두머리가 명령했기 때문이다.

“야! 배! 배는 꼭 챙기랬어!”

“저 돛대만 싹 부러진 거 말이지? 알았어!”

“허이고, 왜 갑자기 애들보고 돛대를 만들어놓으라 하나 했더니만 이거 때문이었고만!”

“이야, 니아트리브 전열함이라하더니만 겁나 튼튼하게 생겼네그려!”

당연하겠지만, 도시에 있는 걸 모두 터는 과정에서 카스테냐 해군이 나포한 배의 주인이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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