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금화 1만 리브르-4
모자에 고인 물을 쏵 쏟아냈다. 그 물은 마차 바닥에 꿇어앉은 세빌 백작의 머리 위에 그대로 쏟아졌다.
백작은 굴욕이니 뭐니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동안 눈치와 언변으로 사교계를 장악한 그이며 본질적으로 소인배라 강자에게 약하다. 당연히 소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그 섬뜩한 눈빛에 그의 무릎은 다소곳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는 게 너무 많아.”
소년은 그렇게 운을 띄웠다.
세상은 너무 복잡했다. 귀족이니 돈이니 예절이니 뭐니, 알아야 하는 건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에 도달하기까지 거쳐야 될 것도 너무 많았다.
그 턱과 문을 넘고 열어 겨우 길이 열리나 했는데, 그 영명하시다는 국왕 폐하께서 친히 문을 도로 닫아주셨다. 그 문고리를 같이 밀며 깔깔댄 장본인인 백작에게 소년의 분노 가득한 차가운 눈길이 움직였다.
“야. 내가 많이 화가 났어.”
분위기가 진중해서 그런지 길거리 불량배 같은 말투에도 브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니? 내가 상 받는 게 뭐가 문제였을까? 뭐가 불만이었어? 솔직히 다 얘기해.”
“그, 그것이......”
“아, 거짓말 섞으면 네 목을 잘라서 살린 다음에 물어볼 거야. 내 스승이 사령술사란 건 알지? 모르면 이제부터 알면 되고. 죽어서 다 말할래, 살아서 다 말할래?”
“사, 사, 살아서 말하겠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겪는 소인배는 모든 걸 내뱉기 시작했다.
카스테냐는 이슬람에게 반도 절반이 장악당해 그 땅을 수복하기 전까지 에크나르프와 지방 귀족에게 손을 벌려댔던 과거가 있었다. 그런 역사적 특성 때문에 지방 귀족의 세가 커 통일을 이룩한 이후에도 대대로 중앙과 지방이 반목하는 구도였다.
그런데 이번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빌미가 생겼다.
에크나르프와 한 몸이 되면 농산물 수입 등에 있어서 손해를 보게 되는 지방귀족들이 에크나르프와의 통합을 반대하는 편에 선 것이다. 그 결과 왕실이 지원하는 중앙 귀족들이 이때다 하고 지방 귀족들을 대거 때려잡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쟁의 승리로 인해 카스테냐 정계는 통합되었고 제해권을 위협하던 니아트리브도 당분간은 재기 불가가 되었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고 내부의 큰 문제도 사라진다면 그 다음으로 따라오는 것은 자잘한 요구사항을 성취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득이 된다면 뭐든 이용하는 게 정치가들이라지만, 고귀한 핏줄이라는 자존심은 심리의 저변에 늘 존재하며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곤 했다. 그래서 평민 출신인 알레한드로 후작이 자신들과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불만스러워했다.
그래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평민 출신 알레한드로 후작을 좌천시키고, 감히 해적이 자신들과 같은 지위를 누리겠다는 요청도 묵살하기로 했다.
자신의 주장대로 귀족과 왕이 따른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럴 예정이었던 것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 다지기 위해 모두가 좋아할 말을 한 것에 불과하다며 세빌 백작은 자비를 구걸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곁들인 그 아첨 때문에 이렇게 소년의 표적이 되는 결말을 맞았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고 악의도 없었다며 처량하게 비는 백작.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은 점점 싸늘해져만 갔다.
“그래서 반대하시셨다? 응?”
“예예, 예에 그렇습니다아아.......”
“그래. 어쩔 수 없다? 뭐 잘 알겠어. 그건 그렇고, 내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대체 말도 제대로 못한다는 니아트리브가 무슨 뜻이지?”
딱히 자신의 출신 국가를 욕한다고 짜증을 내는 건 아니었다. 소년에게 국적은 어차피 무의미한 것.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니아트리브를 어떻게 쓰는지 아시잖습니까아..,,..?”
세빌 백작이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그러자 소년에게 머릿속으로 명령을 받은 브란트가 백작의 등 뒤에서 입을 막고 오른쪽 손등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으읍? 으으으읍!”
소년의 손짓에 브란트의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허공에 떠오른 검은 그대로 백작의 오른쪽 새끼손가락 위로 떨어졌다.
“끄으으으읍!”
“내가 원하는 건 즉답이지 어물거리는 게 아니야.”
“끄으으! 으브븝!”
“알았지?”
“푸하! 아, 아아, 알겠습니다아아으아......!”
손을 움켜잡고 옷으로 지혈하는 세빌 백작의 눈은 원독을 품고 있었다. 소년은 눈도 도려낼까 했지만 한 번 더 맘에 안 들면 그러자고 생각했다.
“말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눈치 보지 말고.”
사람의 손가락을 생으로 하나 날렸음에도, 소년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마차 내부의 장식을 구경하며 말했다.
***
말도 제대로 못하는 니아트리브 놈들.
이 말의 유래는 나름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니아트리브의 정식 명칭, 니아트리브 왕국을 알파벳으로 쓰면 Niatirb Kingdom이다.
그런데 글자를 발음하면 니아‘트리’브가 아니었다. 니아‘티르’브였다.
언어는 발음하기 편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니아트리브 어를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니아트리브가 더 발음하기 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니아티르브였다가 언젠가부터 니아트리브라고 불리는 빈도가 늘어나더니 아예 모두가 오늘날처럼 부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발음이 많이 변하면 당연히 표기법도 바뀌기 마련이다. 알파벳 하나만 바뀌어도 글자 뜻이 바뀌는 유로파 언어권이다. 여러 왕국이 난립하고 각종 권리들이 오가는 유로파라 기록의 중요성은 높고 따라서 언어 변화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기로 인해 해석상 불이익을 받을까봐 왕실 차원에서 단어의 쓰임새나 발음변화를 언어사전 등에 바로바로 반영하곤 했다.
그런데 니아트리브는 그러지 않았다.
발음이 바뀌었어도 정식 문서에선 여전히 니아트리브가 아니라 니아티르브라고 자국을 기록하고 있던 것이다. 다른 단어도 아니고 무려 자신의 나라 이름을 말이다! 섬나라 특유의 보수성인지 아니면 기록하는 이들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멍청한 짓임은 분명했다.
이 잘못된 표기로 인해 나중에 계약 상 꼬투리를 잡혀 어떤 불이익을 당할 줄 알고 그런단 말인가.
그들의 수도의 이름 역시 그랬다. 표기상으로는 런던(London)인데, 니아트리브 사람들은 발음하기 귀찮아서 대충 발음하기로 합의라도 했는지 린던이라 불렀다.
이 밖에도 발음하지 않는 묵음을 쓸데없이 많이 첨가한다던가, 국가 및 수도 이름 말고도 사회적으로 ‘틀린’ 표기법을 쓰는 경우가 니아트리브에서는 종종 출몰했다.
그래서 각국의 상류층들은 니아트리브를 ‘자기들 나라/수도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덜떨어진 것들’이라고 까내리곤 했다. 글과 관련된 모욕이니 문맹률이 높은 하층민이 아니라 상류층들이 자주 쓰게 되었고 말이다.
이런 모욕적인 말이 고착화된 이유는 당시 상황과도 무관하진 않았다.
그 별명이 만들어질 시기 니아트리브는 니아트리브에 정박하는 각국의 무역상들에게서 항해일지를 강제로라도 제출하게 만들었다. 거부하면 군사적으로 강탈하거나 도둑질로 몰래 훔치기까지 했다.
해도가 첨부된 항해일지가 군사적으로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여러 나라의 비난을 받을 일이었다. 하물며 강탈한 일지와 해도를 자신들의 사략선단에 뿌리며 공공연하게 약탈을 지원하기까지 했으니 대륙 국가들에게 미움을 단단히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진상짓에, 역사적으로 대륙에 무슨 일이 있으면 사사건건 간섭하던 얌체짓이 덧붙여져 상류층들에겐 니아트리브를 대할 때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란 멸칭이 단단히 정립되고 말았다.
그 멸칭 이전에도 니아트리브는 섬이라 문명 교류가 상대적으로 느려 ‘가난한 촌구석 섬나라’, ‘어리석은 섬나라 놈들’ 등으로 불리고는 했으니 멸칭 하나 더 생기는 건 큰일도 아니었다.
이 멸칭은 상류층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가짜 귀족을 적발할 때도 유용하여, 사라질 기미도 없이 백 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는 관용구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멸칭에 대한 비사를 들은 소년은 뭔가 억울했다.
‘아니 내가 그러자고 결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
그것도 대륙의 절반 이상에서 그런 멸칭이 확립되었다 하니, 니아트리브 출신이라고 밝히기라도 하면 가는 곳마다 그런 말이 날아올 게 뻔했다.
에크나르프에서 약탈한 많은 도서를 읽어온 소년도 왜 니아트리브 국명과 니아트리브 어에서의 발음이 다른지 의아하긴 했다. 언어마다 발음이 다르니까 이것도 그런 예외적인 경우겠지 싶어서 넘겼는데, 설마하니 ‘잘못된’ 것이었을 줄이야.
‘앞으로 난 니아트리브 사람이 아니다.’
귀로 흘리면 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그런 요상한 이유로 멸칭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궁금증 하나를 해결했으니 그 다음으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이거. 이 악마의 저주가 담긴 총하고, 저 밖의 안 죽는 것들은 어디서 구했니?”
“그, 그것이......”
말을 주저하기가 무섭게 백작의 입이 두꺼운 건틀릿으로 틀어 막히고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갔다.
“끄으으으윽- 제, 제가, 제가 적그리스도(Antichrist) 후보라서 그런 겁니다아악!”
“적그리스도?”
그건 또 뭐야? 소년이 브란트를 보았지만 브란트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저저도 무슨 뜻인지는 모모, 모릅니다. 하하하지만 제 조력자들은 뭔지 알 겁니다!”
“조력자라, 네게 뭘 해줬지?”
“......그, 아, 아닙니다! 바로 말할게요! 손가락은 제발! 제발! 으브브아으아아아악!”
백작의 손가락이 또 잘려나가고, 소인배는 눈에 품은 독기마저 흐트러뜨리고 겁먹은 짐승처럼 벌벌 떨며 또 아는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게, 원래는 평범, 해, 했는데......”
카스테냐의 도시 세빌을 지배하는 백작가, 마르티네즈 가문의 차남인 그는 원래는 장남도 있고 해서 가문도 못 물려받을 운명이라 그냥저냥 자기 욕망만 채우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을 바꿀 이들이 그에게 접근했으니......
“자기들을 해방 결사단이라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도 모르는 그들은 자신에게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나라를 손아귀에 넣고 싶지 않은가?’하며 부추겼다. 안 그래도 편협한 소인배 기질에 장남에 대한 질투까지 가지고 있던 백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은밀한 곳에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며 어떠한 의식을 치렀고, 그 결과 백작은 남을 현혹시킬 수 있는 언변의 능력을 얻었다고 한다.
‘이놈에게서 악마의 냄새가 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악마의 의식이라...... 악마를 숭배하는 이들인가?’
보르도 마탑의 도서관에서 약탈한 책 중 금서라고 도장이 찍힌 도서들에서 몇 번 언급된 악마숭배자란 단어가 이들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추측되었다.
“그리고 결사단은 그 권총과 호위기사에, 막대한 돈까지 주었습니다. 저는 그걸 이용해서 제 형과 아버지를, 주, 죽이고 백작이 되었습니다.”
소인배답게 잔머리는 잘 굴려서 백작은 젊은 나이에 백작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고, 사악한 의식을 치르고 얻은 언변으로 카스테냐 정계와 사교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카스테냐를 막후에서 조종하기 위해 세력을 키우는 와중......
“대, 대선장께 이렇게 되었고요.”
소년은 백작의 말을 들으면서 권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등, 손잡이, 방아쇠, 총구까지 매끄럽게 주조된 권총은 제법 볼만 했다. 백작에게 들은 성능도 꽤 나쁘지 않았다. 백작의 말이 끝나자 소년은 피식 웃으며 백작에게 손을 뻗었다.
“커, 커컥! 왜, 왜!”
보이지 않는 손이 백작의 목을 조르자 백작이 허공에 반쯤 떠오른 채 버둥거렸다.
“왜긴 왜야. 나를 화나게 했으니까 그렇지.”
“제, 제발 목숨만은! 그, 칵, 가진 건 다, 바칠 테니까 제, 제발!”
“돈은 필요 없어. 너희가 말했듯이, 내 공은 고작 1만 리브르짜리잖아?”
“!!”
숨이 막혀 희미해지는 정신에도 머리는 좋은 백작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보복이다. 이제 이 마법사의 피의 보복이 이뤄질 거야!
“케엑, 도, 도와드리!”
“됐어.”
우득!
백작의 목뼈가 으스러졌다.
그렇게 카스테냐 정계를 손아귀에 넣은 풍운아는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악마 숭배자로 추측되는 이들이 궁금하긴 했지만, 현재 소년에게는 어디 틀어박혀 있는지 모를 악마 숭배자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자신의 식도락 가득한 미래를 가로막은 카스테냐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감히 나를 농락해?
백작은 죽어서도 꼴이 좋지 못했다. 스륵 빠져나오는 영혼이 소년의 손에 덥석 잡혔다.
콰득!
소년은 직접 입으로 영혼의 맛을 맛보았다. 적그리스도인지 하는 녀석의 영혼은 다른 특별한 게 있는가 하는 궁금증에서였다.
결과는 ‘그냥 일반 영혼과 다를 게 없다’였다. 후추처럼 뭔가 매콤한 맛이 있긴 했는데 유의미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르도에서 사탄 때문에 의도치 않게 영혼을 직접 흡수하는 방법을 알게 된 이후부터 영혼은 입에도 대지 않은 소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영혼 때문에 허기가 들끓었다. 하지만 입맛만 다시며 꾹 참았다. 충동에 휘둘리는 그런 일은 앞으로 절대 없으리라고 다짐했으니까.
소년과 브란트가 마차에서 내렸다. 아직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마드리드 주변은 산지라 수도로 들어오려면 산을 타야 했고, 그런 산들 중엔 절벽을 끼고 있는 곳도 심심찮게 있었다. 마차가 지나고 있던 산길도 때마침 절벽을 끼고 있었다. 소년의 손짓에 따라 시체들이 모는 마차는 시체가 되어버린 세빌 백작을 태운 채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푸히히히힝!
인간의 비명 대신 죄 없는 말의 비명이 메아리쳤고 콰직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뚝 그쳤다.
“가자 브란트. 내 공이 정말로 1만 리브르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바꿔 줘야지.”
소년과 브란트는 말을 타고 굵은 비가 내리는 산길 사이로 사라졌다. 둘의 뒤에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은 기사 다섯이 말 위에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