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금화 1만 리브르-3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기상현상, 비.
비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여 쓰이곤 한다. 비는 구름이 있어야 내리며 구름은 태양을 가려 어둠을 대동하기 때문이었다. 아래로 떨어진다는 특성도 의미부여를 하기엔 좋은 것이라 여러 문학작품에서 비에 부정적인 속성이 부여되곤 한다.
알레한드로 후작은 비가 가진 그 좋지 않은 속성을 그대로 맞이하고 있었다.
왕궁 밖으로 쫓겨나듯 나온 그는 그동안 굵어진 빗줄기를 맞아야 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허망함과 비참함이 뒤섞여 빗물과 함께 수채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마차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있었고 비가 내려 차가워진 한기만이 그의 옷 틈을 파고들 뿐이었다.
수백 척에 달하는 배를 이끌고 바다를 호령하며 다니던 영광은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바래 누런 종이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그가 이룬 업적은 역사책에 잉크 몇 방울로만 남게 되리라.
하지만 그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미래가 아니었다.
‘어찌하여......’
왕궁에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십 년은 족히 더 늙어 노인처럼 보이는 후작이 옆을 돌아보았다. 큼지막한 모자가 그 밑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조그마한 대선장과 그의 뒤를 묵묵히 지키는 충성스런 기사가 보였다.
“미안하게 됐네.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
“......”
‘고작 1만 리브르라니......’
소년의 손엔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묵직하고 절그럭거리는 가죽 주머니가 비를 맞아 진하게 변색되어갔다.
1만 리브르라는 것은 귀족 사회에서 조롱이자 모욕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1만 리브르는 부유한 귀족 기준에서는 푼돈이다. 포상을 고작 1만 리브르만 내린다는 의미는, ‘네 공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느냐?’ 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게나. 마차가 아무래도 마구간으로 간 모양이야.”
물이 고인 돌바닥을 철퍽거리며 후작이 병자처럼 터덜터덜 빗속으로 사라졌다.
후작이 저 멀리 사라지자 소년이 입을 열었다.
“브란트.”
늘 그랬듯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없습니다. 당장은.”
왕의 결정은 지엄하며 왕이 하라면 그리 해야 한다. 그게 이 시대의 법도다.
왕을 죽인다 한들 소년이 귀족 작위를 받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으며, 화가 나 마법을 난사한다 한들 적이 되었으면 되었지 작위는 역시 받지 못한다.
‘힘이 다는 아니라 했지......’
예전에 브란트에게 들었던 말이 이토록 절절하게 와닿는 순간이 올 줄이야.
“뭐 상관없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이라 그런 척 하는 것인지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소년 스스로를 제외한다면 모를 것이다.
“......”
“이렇게 당해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등을 보이는 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고...... 하나 재밌는 걸 찾았거든.”
소년이 모자를 벗어 모자에 고인 물을 쏵 하고 쏟아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눈을 가리던 걸 치우고 다시 모자를 썼다.
“그놈. 악마의 냄새가 나.”
소년의 입은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칼로 얼굴 한가운데를 그은 것 같은 얇고 서늘한 입술 사이에서 혀가 나와 입술을 핥았다.
***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마드리드 왕궁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마치 별들이 무더기로 지상에 내려와 반짝이는 듯했다.
“하하, 그렇단 말이지?”
“여기 포도주 한 잔 더!”
연회란 것은 귀족들의 존재의의나 다름없다. 회의가 끝나고 연회, 경사가 있으면 연회, 안타까운 일이 있어도 연회, 하여튼 무슨 일이 있어 모일 때마다 연회를 열었다. 그것이 모두가 긴장을 풀고 대화를 나누며 풀어질 수 있는 시간이기에.
이번 논공행상 역시 귀족들이 모이는 일. 그게 끝나면 결국엔 잔치를 여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이번 연회는 니아트리브와의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지방 귀족을 몰락시키고 중앙 귀족이 모든 권리를 독차지한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했기에 연회는 평소보다도 화려하고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밤이 깊어지며 비는 더욱 굵어져 온 길이 진흙탕이 되었다. 돌로 포장된 길도 결국엔 흙 위에 만든 것이라 비가 많이 오면 진흙투성이가 되는 건 동일했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내부 통로를 통해 마구간으로 향해 주차된 자신들 가문의 마차를 타고 하나둘씩 왕궁을 나섰다.
개중에는 최근 카스테냐 사교계를 한손에 그러쥔 세빌 백작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크으, 좋구나. 어서 출발해라!”
기분 좋게 취한 백작을 태운 마차가 드륵거리며 진창을 밟으며 굴러갔다.
‘이제 내 세상이다.’
카스테냐는 이번에 지방 귀족을 모두 거꾸러뜨려 정치적 통일을 이룩했다. 중앙귀족들은 그의 화려한 언변에 홀랑 넘어가 자신을 모두 신뢰하고 받쳐주는 상황. 이 정도의 정치적 위세라면 공작을 넘어 국왕을 조종할 수준의 막후의 조언자가 되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은 일이리라.
앞으로의 화려한 미래를 상상하며 앉아 있던 백작은 돌연 마차가 멈추며 덜컹거리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 버렸다. 그의 본질은 소인배. 기분 좋은 이 느낌을 깨버린 상황에 열이 올랐다.
“무슨 일이냐!”
마차의 창문을 열자 비오는 날씨의 찬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창밖을 내다본 그의 얼굴이 비웃음을 띠며 일그러졌다.
“이게 누구신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니아트리브의 대단하신 선장 나으리 아니신가? 어쩐 일로 이 몸을 찾아왔는지?”
대선장이자 아소르스의 마법사왕이라는 과분한 호칭으로 불리는 소년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단정히 차려입었던 왕궁 대전에서와는 달리, 외투의 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채 푹 젖은 생쥐 꼴이었다.
‘이런 무모한 놈을 봤나!’
여유로운 얼굴과는 달리, 세빌 백작은 등골이 싸해지며 술기운이 확 깼다. 대선장은 마법사다. 설마하니 굴욕을 당한 당일에 습격을 하러 찾아온 것인가? 국가를 적으로 돌리는 무모한 짓임을 알 텐데!
‘하지만 괜찮아. 조력자들이 준 호위기사가 있으니까!’
세빌 백작은 자신의 가문 호위병 수십 말고도 조력자들이 지원해 준 ‘특별한 호위기사’를 믿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마법사는 기사에게 순식간에 도륙당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네가 세빌 백작이냐.”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앳된 목소리는 다른 이가 소년을 과소평가하게 만들도록 방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 그런데 말이 짧구나. 한낱 해적이 감히 위대한 카스테냐의 귀족에게 그런 말투라니.”
“잠시 대화 좀 하지.”
“내가? 네놈과? 꺼져라 해적. 그러지 않는다면 당장에 교수대에 목매달아 버리겠다.”
“네놈에게서 악마 냄새가 나는데도?”
“!”
소년의 말에 세빌 백작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가. 그 표정을 싹 지우고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내게 악마라는 불길한 단어를 붙여 모욕하다니. 죽여라!”
철그럭거리며 호위병들이 머스킷을 앞으로 겨누며 호위기사들이 스릉 하고 칼을 뽑았다.
“그래?”
하지만 소년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소년이 팔짱을 끼고 동시에 눈 안쪽에서 검푸른 무언가가 휘돌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커, 컥컥!”
“으으억!”
세빌 백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목을 움켜잡고 켁켁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섯이나 되는 호위기사들은 멀쩡히 움직였다.
“이것 봐라?”
소년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흥미로워했다. 분명 목을 감싸는 형상으로 튀어나온 갑옷부분이 강하게 우그러들고 있음에도 저 기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들고 있었다.
기사들의 검이 당장이라도 소년을 조각낼 듯 가까워졌다.
그때 소년 뒤편에서 어둠으로 빚어낸 듯한 검은 갑옷의 기사가 뛰쳐나와 서늘한 빛깔의 검을 휘둘렀다.
목숨을 도외시한 듯, 몸을 감싼 갑옷으로 과감히 검날 네 개를 받아넘긴 브란트가 나머지 검 하나를 자신의 검으로 막나 싶더니 뱀처럼 검로를 그리며 한 기사의 목 틈으로 그 끝을 박아 넣었다.
그 충격에 목에 검을 찔린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뿐. 급소를 찔렸음에도 잠시 비틀거리기만 하던 기사가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재밌는 녀석들을 데리고 다니네.”
기분이 고양된 소년은 누가 들어주지도 않는데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년은 안대를 꾹 눌러 안대 밑으로 새어나오는 액체 같은 안광을 막고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무언가를 잡아 꺾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자 우드득거리는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가쁜 숨을 내쉬던 호위병들이 모조리 목이 꺾여 절명하고, 잡아 꺾는 손이 펴지며 손바닥을 위로 향하자 호위기사들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기사들, 산 자가 아닙니다.”
짧은 시간 내에 이 이상한 기사 다섯의 목과 급소를 모조리 찔러 본 브란트가 그렇게 결론내렸다.
“그러게. 숨 쉬는 게 안 느껴져. 어떻게 생각하나 백작?”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다섯 기사가 소년을 향해 검을 던지며 발악했으나 당연히 브란트에게 튕겨나갔다.
“으악!”
세빌 백작이 기대고 있던 마차 문짝이 갑자기 벌컥 열리면서 백작은 진흙투성이가 된 땅으로 털썩 엎어졌다.
“으윽......”
“잠시 얘기만 하자고 했잖아. 내 말은 귓등으로 흘리나?”
소년이 철퍽거리는 물웅덩이를 밟고 다가오자, 백작은 아픈 것처럼 신음을 내며 엎드려 있다가 소년을 향해 빠르게 팔을 뻗었다.
권총이었다.
타앙-타앙-타앙-타앙-타앙-!
한 발만 장전할 수 있는 일반적인 머스킷 권총과는 달리 백작의 총은 무려 다섯 번이나 발사음을 내뱉었다. 일반적인 하얀 화약 연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음산한 푸른 연기가 권총을 감싸며 흩어졌다.
“이야, 재밌는 게 더 있네.”
“어, 어떻게......”
세빌 백작의 회심의 공격은 어이없이 막혔다. 마법사의 마법조차 파훼하고 죽일 수 있다는 총인데! 허공에 그대로 멈춰버린 다섯 발의 납탄을 하나하나 손바닥에 내려놓으며 소년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악마의 저주가 담긴 총탄이라. 제대로 맞으면 꽤나 아프겠어.”
그 직후, 소년과 백작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백작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목에 칼이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목을 더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머릿속에서 그쳤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거부했다.
극심한 공포가 그 스스로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것이다.
저벅저벅 다가온 브란트가 백작의 멱살을 잡고는 마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 우당탕하고 몸을 마차 여기저기에 부딪힌 백작이 으악 소리를 냈다. 그 뒤를 따라 브란트와 소년이 차례대로 마차에 탔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쓰러졌던 호위병들이 비척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공허한 표정의 호위병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기사들을 잡아 포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차는 다시금 덜그럭거리며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