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96화 (97/128)

96화

금화 1만 리브르-2

“하여, 그동안 고생한 제독에게 이만 토지를 내려주고자 하네.”

“큰 성은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동안이란 말이 나올 때부터 후작은 고개를 숙이고 결국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좌천이었다.

후작은 다스리는 영지가 없었다. 당연한 것이, 그는 평민이었다가 귀족이 된 경우다. 가문 대대로 다스리던 지역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현 시대는 봉건제가 옛 구시대 관습이 된 지 오래된 시대. 작위를 받았다고 국왕 직할령 일부를 떼어 봉토를 주거나 할 리는 없다.

따라서 후작은 영지가 없기 때문에 어느 지역을 붙여서 호칭하지 않고 성을 그대로 따 마르텐 후작이라 불렸다. 물론 귀족들은 감히 평민이 성을 가진다고? 하면서 이름을 따 알레한드로 후작/제독이라 불렀다. 수입도 국가에서 내려주는 봉급을 받는 봉급쟁이였다.

그런 그에게 영지를 내려준다 함은 단 한 가지의 의미만을 담고 있었다.

너는 이제 제독이 아니다.

카스테냐 해군본부가 있는 카디스의 관사에서 생활하며 땅보다 바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제독에게 땅을 내려준다 함은 바다를 떠나란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설마, 이전까지 있었던 패전 때문인가.’

평민이었던 후작의 출신성분까지 운운하며 그의 제독 해임안이 나왔었다. 부결되었기에 안심했는데.

‘그렇군.’

다시 생각해 보니 부결된 이유는 전시에 지휘관을 바꾸는 건 불길하다는 관습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고 겨울 동안 패배를 거듭하지 않았어도 그는 좌천되었을 것이다.

이전에는 중앙과 지방의 대립 때문에 평민 출신을 등용하여 완충지대 혹은 공동의 골칫거리로 삼을 필요성이 있었지만 이번 전쟁으로 지방귀족은 몰락했고, 니아트리브의 위협도 사라졌다.

그러니 후작의 쓸모 역시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던, ‘감히 평민 주제에’라는 귀족들의 자존심 역시 왕을 부추겼으리라.

영토의 절반이 산지인 카스테냐다. 좌천된 후작에게 기름진 땅을 줄 리는 없다. 산지의 인구밀도는 적으니 소출도 얼마 없을 테고, 후작은 앞으로 근근이 사는 몰락 귀족 생활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 15년이면 오래도 해먹었지. 그래도 한낱 평민 출신이 카스테냐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니 여한은 없다 싶었다.

왕의 명령은 지엄한 것이며 신이 내려주신 것. 그 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전형적인 카톨릭 신도이자 왕의 신하인 알레한드로 후작은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대선장, 대선장은?’

그 생각에 후작이 눈을 번쩍 떴다.

후작은 대선장과 약속을 했다. 서로 도움을 주기로. 후작은 대선장이 작위를 얻는 데 한껏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하지만 국왕의 ‘자비로운’ 처분이 떨어진 이 순간부터 후작은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발언은 이제 한낱 파리 날갯짓보다도 관심 받지 못한다.

후작은 눈동자만을 한껏 돌려 소년을 곁눈질했다. 카스테냐의 속사정을 모르는 소년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왕의 포상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니아트리브를 격퇴하는 데 도움을 준 해적 선장에게는 금화 1만 리브르를 상금으로 내리노라.”

온갖 미사여구로 좌천명령을 포장한 후작의 경우와는 그 온도차가 너무나도 달랐다. 목소리를 키우고 기쁜 척이라도 한 후작의 경우와는 달리 별 관심 없다는 게 그대로 묻어나는 건조한 말높이에 선심 썼다 하며 툭 던져주는 말투.

1만 리브르?

대선장 덕분에 나포한 니아트리브 선박들의 가격을 모두 합치면 국가 예산 수준이다. 그런데 고작 1만 리브르?

화약 무기가 도래하기 이전의 유로파였다면 거금이다. 평민에게도 거금이긴 하다. 하지만 귀족에게는 푼돈. 후작의 녹봉보다도 적은 양의 돈이다.

공에 비해 정말 터무니없는 포상이었다.

‘이건 아니다.’

저자는 마법사다. 그것도 대마법사 수준이다. 그런 이를 푸대접한다고? 고작 출신성분 때문에? 대선장이 분노하면 어쩔 셈인가. 이건 미친 짓이다. 대마법사를 적으로 돌리겠다고?

혹시 대마법사 영입에 타국의 견제가 들어올까 봐 연막을 치는 건가 싶어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왕이고 귀족이고 모두 비웃음 섞인 눈빛뿐. 뭔가 기회를 노리거나 진중한 눈은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니아트리브가 대마법사를 종군시킨 이상 카스테냐 역시 마법사 연맹에 돈을 퍼나르건 꼼수를 쓰건 하여 바다에서도 싸울 수 있는 대마법사를 마련해놔야만 한다. 니아트리브는 언제고 다시 패권을 잡으려 달려들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대선장이라는 카드를 가져야 한다.

그게 카스테냐가 살 길이다.

국왕의 말이 끝나고, 더 이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후작이 용감하게 발언했다.

“지엄하시고 용맹한 국왕 폐하, 소신은 오늘의 국왕 폐하께서 제게 내리신 자비로우신 처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허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이 한 몸 카스테냐의 칼이 되어 그동안 일했던 만큼, 자비로우신 폐하께서 이 늙은이의 청을 들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며 절박한 감정이 한껏 들어간 구구절절한 대사였으나 대전 중 누구도 감흥을 느낀 눈을 하지 않았다. 왕조차도 다 써 녹슨 무기를 보는 눈빛이었다.

“청이라? 고하거라.”

메마른 목소리에도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옆에 있는 이 아소르스 해적 소굴을 손에 거머쥔 이는, 대선장이라 불리며 고명한 마법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앞으로 카스테냐가 바다를 더 안전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 자의 뛰어난 실력이 꼭 필요하다 생각하여, 카스테냐의 말단 귀족 자리라도 하사하시는 것이 어떤가 아룁니다.”

“작위라?”

국왕의 미간이 비틀렸다.

‘해적에게 감히 이 위대한 카스테냐의 귀족 작위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카를로스 4세는 이미 알 건 다 알고 있었다. 저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해적이며, 귀족 작위를 요구했고, 강한 마법사이며, 니아트리브 출신이란 것까지 안다.

해적은 그 세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국가만은 못하다. 언제건 쓸어버릴 수 있는 녀석들과 손을 잡아 강대국의 체면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전투기록은 보고받긴 했지만 보나마나 둘의 거래가 있어서 훨씬 과장한 것이겠지. 그리고 대마법사는 카스테냐에도 있으니 대선장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저런 천한 이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 싶지 않은 귀족들의 건의사항 역시 국왕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뭐가 아쉽다고 저런 자와 나란히 선단 말인가?

왕과 귀족의 시야에서 대선장의 실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전해져 오는 막대한 보물과 풍족한 농작물, 유로파의 제해권을 잡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모두 갖춘 카스테냐의 입장에서는 굳이 해적과 손을 잡는다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서에 남을 진짜 오점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다.

이미 결정은 났으나, 국왕의 위엄이 있으니 저런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처우도 고민한다는 평가를 받기 위하여 고심하는 척 했다. 굳이 자신이 거절하지 않더라도 눈치 빠른 귀족이 알아서 후작의 말에 반박하리라.

그 눈치 빠른 귀족이자 지금까지 편협한 심사에서 우러나온 분노를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영명하신 국왕 폐하. 소신이 아뢰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바로 카스테냐 사교계의 떠오르는 신성, 세빌 백작이었다.

“말하도록 하라.”

“아무리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저 자는 해적입니다. 해적의 처분이 어떤 것입니까? 교수형입니다. 본디 교수대에 서야 하는 저 더러운 흙발을 이 고귀한 왕궁에 디디도록 허용해 준 것부터가 저 자에겐 과분한 포상입니다.

저 자는 먹물이나 마찬가지기도 합니다. 만일 저 자가 카스테냐의 작위를 받는다면, 그 한 방울로 인해 모두가 카스테냐 전체를 검은색이 되었다며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또 옛말로 바다에서 믿지 말아야 할 것은 구름과 파도와 해적이라 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조차 약탈할 정도로 신의와 충성심이 없는 해적이건대, 저 자가 니아트리브와 카스테냐의 사이를 저울질하다가 슬쩍 붙은 게 아니라는 걸 누가 감히 장담하겠습니까? 뒤에서 어떤 협잡질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를 사함과 동시에 해적에게 어울리지 않는 큰돈까지 내린다고 결정하신 영명하신 국왕 폐하의 판단은 하늘의 신조차 감탄하실 현명하고 자비로운 처사이십니다.”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백작의 말에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역시 세빌 백작이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저 또한 맞는 발언이라 사료됩니다 폐하.”

자기들 세상이 된 것을 자축하듯, 중앙 귀족들이 아첨하며 동시에 국왕을 칭송했다.

그야말로 간신들이 저들끼리 희희낙락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수가.’

알레한드로 후작이 몇 년 늙은 듯한 표정으로 세빌 백작을 바라보았다.

저 자가 그 사교계에서 유명하다는 자인가. 입 속에 혀 대신 칼을 품었구나. 그러면서 왕을 향한 혓바닥은 순식간에 깃털로 바꾸는 것이 가히 희대의 간신이었다.

하지만 세빌 백작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신의가 없는 해적인데 저 자를 어찌 믿고 카스테냐의 바다를 지키도록 역할을 수여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저 해적은 니아트리브 출신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니아트리브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섬나라이지 않습니까?”

크크큭

푸흐흡

대전이 일순간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국왕 역시 진한 조소를 머금었다.

자기 나라 발음, 자기 수도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

귀족들 간에만 통용되는 니아트리브를 폄하하는 관용어구는 단순히 모욕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것이었다.

“그러므로...... 목숨을 살려주는 것부터가 큰 자비이거늘, 천박하고 모자란 자에게 작위를 주자고 할 수 있는 후작을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제가 사교계에서 모두에게 행복과 지식을 나눠 주는 동안 세상이 바뀌기라도 한 건지 질문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세상에, 라고 말하면서 가슴을 부여잡는 것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카스테냐의 유수한 귀족들과 심지어 국왕조차도 백작의 손끝과 혀끝에 일일이 반응하며 동감하고 있단 것이었다. 그게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그들 스스로만이 알 것이다.

“저 자에겐 기사 서품조차도 아까우며, 저런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죄 지은 자에겐 마땅히 신의 심판대만이 어울립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 자리에 살려두고 있는 것은 누누이 말했듯 국왕 폐하의 자비이니, 그런 과분한 포상까지 받은 마당에 1만 리브르보다 더한 포상은 절대로 불가하다고 말씀드리는 바이옵니다.”

그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여러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세빌 백작 스스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에 더 말려들기 전에 알레한드로 후작이 다시 한 번 발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간곡하고 절박했다.

“폐하, 하지만 이 자는 고명한 마법사입니다. 니아트리브는 대마법사를 바다로 내보냈습니다. 지금은 비록 졌다 하나, 니아트리브가 어떤 술수로 대마법사를 동원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카스테냐 또한 대선장을 니아트리브에게 대항할 인재로 등용해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늙은이가 말 한 번 많군.’

세빌 백작이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알레한드로 후작을 쏘아보았다.

“폐하, 방금 후작의 말은 용납할 수 없다고 감히 주장하겠습니다!”

백작이 짐짓 노기를 품고 외쳤다. 감히 국왕이 거하고 있는 대전에서 언성을 높이다니!

하지만 귀족과 왕은 백작의 편이었다. 예의에 어긋났다는 핀잔 섞인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놀란 눈빛을 대신 보냈다.

“니아트리브는 졌고, 카스테냐는 이겼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위대한 신께 여쭈어 보아도 결단코 사실이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는 10년의 복무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이 입은 손실은 고작 10년으로 메꿀 수는 없는 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후작은 미칠 것 같았다. 그 10년의 간극을 대선장이 만든 거라고! 대선장이!

10년의 세월은 생각보다 짧은 기간이다. 카스테냐는 지금 수준의 해군력을 만드는 데 7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물며 기후가 여기보다 서늘해 곧은 나무가 많은 니아트리브는 배 건조가 더 수월하다.

반박할 게 산더미 같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세빌 백작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 위대한 카스테냐가 고작 해적에게 의지할 국가입니까? 그렇게나 나라에 인재가 없다고 보십니까? 그거야말로 카스테냐에 대한 모욕입니다, 후작! 동시에 국왕 폐하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국왕 폐하가 다스리시는 이 위대한 국가가 고작 해적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국가라니요!”

한술 더 떠 백작은 왕을 칭송하는 걸로 끝나지 않고 후작을 호통치며 직접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미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이를 상대로.

“자, 더 할 말 있으면 해보시지요!”

하늘을 밝히는 태양도 결국은 수평선 밑으로 내려가고, 맹수도 결국은 늙을 때가 온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여론은 세빌 백작의 편이었다.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카스테냐의 쇠락을 원하는 걸로 비춰질 수도 있어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폐하.”

죽어가는 노인 같은 힘빠진 목소리가 조용해진 대전을 굴러갔다.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이를 확인사살하여 의기양양해진 세빌 백작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알까.

그가 가진 것쯤은 한손에 짓눌러버릴 존재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곁눈질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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