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금화 1만 리브르-1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전쟁의 열기 역시 슬슬 끓어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에크나르프의 이야기.
귀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끝나고, 치고 올라오려는 경쟁자도 도로 계단 아래로 걷어차 버린 카스테냐는 평화롭기만 했다.
카스테냐와 니아트리브의 선박 수백 척이 맞붙는 대해전에서 카스테냐가 승리함으로써 결국 붉은 사자는 아직 건재하며 바다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바스크 공국 앞바다에서 벌어진 그 싸움에서 대단한 번개 마법사의 출현으로 인해 수병들은 그 전투를 카스테냐 어로 번개를 의미하는 릴람파고(Relámpago)라며 하나같이 떠들어 댔다.
치열했던 릴람파고 해전이 있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어디선가 외로운 들개가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밤.
마차 한 대가 카스테냐의 중심지 마드리드의 성문을 통과했다. 구름이 가득 낀 우중충한 하늘이 마차를 반겼다.
성벽을 통과하자 이슬람의 건축문화와 유로파의 건축문화가 합쳐진 기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마드리드 왕궁이 시가지 너머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군데군데 세워진 마탑처럼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첨탑이 별에 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마드리드......!’
마차의 창밖으로 머리를 내민 소년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였다.
“마드리드에 온 걸 환영한다네.”
알레한드로 제독이 한층 풀린 얼굴로 마치 손주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왕궁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그렇지.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니 그 포상을 받아야하지 않겠나? 해적이 작위를 받는 건 꽤나 힘들겠지만, 자네의 공은 역사상 얼마 없을 정도의 대승일세. 보고서도 후하게 써줬고 하니 그렇게 어렵진 않을 테고, 마법사들과도 입을 모았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 둘이 같은 마차에 탄 이유는 다름 아닌 논공행상 때문이었다.
해군과 해적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이들임에도 분위기는 따스하기만 했다.
남부 카디스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고급스런 식당에 들러 가면서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음식들의 풍미를 고스란히 느껴온 소년에겐 참으로 흡족한 여행이었다.
제독 역시 전쟁에서 이기고 자신의 자리도 보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선장의 성격도 대충 파악한 마당이라 대선장을 척질 이유가 없었다.
‘......불안하군.’
하지만 화기애애한 둘과는 달리 마차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브란트는 기분이 영 껄끄러웠다. 하늘을 덮은 먹장구름 때문일까?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구름은 괜히 브란트의 신경을 긁었다.
소년은 릴람파고 해전이라 사람들이 이름붙인 대해전에서 자신의 실력을 너무 많이 내보였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소년의 실력을 축소 보고하고 제독이 소년의 공을 과장 보고한다고 한들, 설마하니 왕실이 해군 내에 눈 하나 없을까. 소년의 실력은 그대로 보고될 가능성이 컸다.
‘카스테냐 왕실도 생각이 있다면 대마법사급 해적을 적으로 돌리려 하진 않겠지.’
소년이 실력을 과하게 드러내 걱정이었지만 자기들 이득에는 두 발 벗고 달려드는 귀족 나리들이 설마하니 치졸한 수법을 쓰랴 싶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소년을 거부한다면 말 그대로 소탐대실의 표본이 되리라.
하지만 브란트는 에크나르프와는 사뭇 다른 카스테냐 정계의 심리를 몰랐다. 또한 그가 예전에 제독에게 말했듯, 세상에는 보편적인 상식과 괴리가 있는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하늘에선 어느덧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
마드리드 왕궁.
여느 강대국의 왕실이 그렇듯이 모든 것이 비싼 것으로 도배된 사치스러운 장소였다. 이번 전쟁의 논공행상을 위해 하나둘씩 귀족들이 모여들어 복도를 오가는 귀한 핏줄의 이들이 간간이 보였다.
“어머머, 정말 그렇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고귀한 아가씨.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걸 본 적 있으신가요?”
궁전 내부 곳곳에 자리 잡은 조그만 정원 중 하나에서 여성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반쯤 묻힌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스테냐 귀족들의 관습대로 모자에 깃털을 꽂은 수려한 미남이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여성들이 간드러지게 웃고 눈을 반짝이며 모두가 하나된 듯이 남자에게 동조했다.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닐 듯한 이 굵은 선의 미남의 이름은 레오넬 마르티네즈. 카스테냐의 도시 세빌을 지배하고 있는 세빌 백작이자 사교계에 떠오르는 신성이라 불리우는 이였다.
수려한 외모와 그에 어울리는 명예롭고 예의바른 몸가짐은 가히 귀족이 가져야 할 모범이라 불리었고, 여자들이 수없이 몰려들었음에도 추문 하나 없는, 가히 깨끗한 인물이었다. 그와 대화를 한 이라면 유수의 학자들조차도 그 지식의 깊음에 감탄하고 남성 귀족들조차도 그 모습에 감복하여 너도나도 딸을 소개시켜 줄 정도로 카스테냐 귀족 사교계에서는 모를 수가 없는 유명인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국왕조차도 자신의 조언자로 삼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고도 할 정도였다.
“자자, 아름다우신 분들. 이만 시간이 되었군요.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저는 이만 회의에 참석하러 가야할 듯합니다.”
아아아-
안타까움이 가득 섞인 탄식이 여자들에게서부터 흘러나왔다. 하지만 감히 잡으려 드는 이는 없었다. 잡는 순간 이 멋진 남자에 대한 모욕이 될 것 같았기에.
미소 띤 얼굴로 정원을 나온 세빌 백작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남을 대할 때의 따스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뱀의 눈빛과 전갈의 독침이 형상화된 비틀린 웃음뿐.
‘단순한 년들.’
세빌 백작은 자신이 말 한 마디만 하면 심장조차도 떼다 바칠 것만 같은 저 작태에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본성은 모른 채 찬양일색인 것이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었다.
백작은 얼른 표정관리를 하며 대전을 향해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거닐었다.
두 복도가 만나는 갈림길에서, 백작은 옆 모퉁이에서 누군가 나오는 걸 보고는 얼른 벽에 붙어 몸을 숨겼다.
‘아니, 내가 왜 숨은 거지?’
왕궁을 넘어, 카스테냐에 발을 들인 그 어떤 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백작이 숨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마치 쥐가 고양이 냄새를 맡고 숨듯이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백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방금 지나간 인물들을 보았다.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와 함께 등을 보인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뒤에 보이는 검은 갑옷의 기사. 그 앞으로는 해군 복장에 희끗희끗 보이는 흰머리를 지닌 인물, 그 옆으로는 낯선 복장을 한 조그만 체구의 인물이 보였다.
‘저놈.’
백작의 눈이 소년의 뒷모습을 훑었다. 니아트리브 수병을 연상케 하는 푸른색의 외투에 모자라?
유수의 귀족들이 모이는 왕궁에서 근본 없는 저런 복장을 할 인물은 딱 하나.
‘오늘 온다던 대선장이구나.’
오만하게도 아소르스 제도에서 마법사왕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린다는 해적 조무래기. 백작은 해적 따위에게서 느껴지는 이 이상한 기분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상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적절한 단어가 없었다. 그저 이상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괴상한 기분에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내가? 카스테냐 사교계를 휘어잡고 정계를 지배한 내가 이런 기분이 든다고?’
이유가 뭐건 간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놈을 가만 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카스테냐 정계를 손아귀에 넣은 위대한 존재다. 그런 내가 이런 괴상한 감정이 든다고?
세간에 알려진 백작의 공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과는 정반대의, 편협하고 자격지심 가득한 행동양식이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놈들이 뭘 받을지 결론은 이미 정해졌다. 거기에 내가 몇 마디 보탠다 한들 물 몇 방울 더 떨어뜨리는 정도다.’
살벌한 눈초리가 멀어지는 셋의 등 뒤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
“국왕 폐하께서 들어오십니다!”
하인의 외침과 함께 왕궁 법도에 걸맞는 걸음걸이로 카펫 위를 걸어 옥좌에 오르는 카스테냐의 국왕 카를로스 4세.
국왕의 풍채는 결코 좋다고는 볼 수 없었다. 빼빼 마른 얼굴에 턱이 약간 튀어나와 볼품없는 모양새. 화려한 장신구와 옷감으로 몸을 휘감아 어떻게든 위엄 있어 보이려는 것이 안쓰럽게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남자가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의 국왕이란 사실이었다.
외적인 평가는 심약한 이도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법. 외모와는 달리 국왕의 눈빛은 형형하여 절대군주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카를로스 4세는 옥좌에 앉자마자 귀족들이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곧바로 말했다.
“오늘 니아트리브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 온다.”
물론 모두들 아는 사실이다. 그 공을 뭘로 줄지 역시 모두들 알고 있었다. 왕이고 귀족이고 고귀함으로 포장한 껍질 밖으로 이득이라면 뭐든 해대는 사갈 같은 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동류를 바라보는 권력자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암묵의 합의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들라 하라.”
대전의 문이 열리고, 포상을 내릴 당사자 둘이 들어가자마자 문은 매정하게 쿵하고 닫혔다.
검은 갑옷의 기사만이 복도에서 카스테냐 왕궁 기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조용히 시립해 있을 뿐이었다.
투구에 가려져 있어 보이진 않지만 카스테냐 기사들의 눈길은 곱지 못했다.
‘해적을 따르는 기사라니.’
‘기사 망신은 다 시키는군.’
세상에 해적을 따르는 기사라니, 세상 천지에 그런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세상에는 도적 기사도 있고 해적 기사도 있으며 기사보다도 고귀해야 할 귀족이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경우도 있지만, 그들은 현재 눈앞에 없다. 자신들이 혐오해도 될만한 이가 바로 눈앞에 있자 기사들은 말은 안 해도 못마땅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브란트는 늘 그랬듯이 복도 한쪽에 서서 장식용 갑옷처럼 미동도 않았다.
***
대전에 들어선 두 인물이 카스테냐의 예법을 따라 왕을 칭송하고 무릎을 꿇었다. 마드리드로 오는 동안 알레한드로 후작에게 예법을 배운 소년 역시 능숙하게 행했다. 다만 왕을 칭송하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카스테냐 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왕과 다소 떨어진 대전을 가로지르는 카펫 중앙부에 한쪽 무릎을 꿇은 두 사람에게 카스테냐 국왕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오늘은 가히 기쁨의 날이로구나. 악독한 섬나라의 정도를 모르는 이들을 퇴치한 영광스런 영웅이 왕궁을 방문했구나.”
극찬이었으나, 알레한드로 후작은 머리 한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경우 극찬은 정반대의 의미거나 수식어를 빼고 해석해야 한다.
“고개를 들라 제독.”
알레한드로 제독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이로다. 그렇지 않은가?”
바깥에 구름이 잔뜩 껴 비가 오고 있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좋은 평을 내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은 평이라니. 거기서 그칠 게 아닐세. 이 얼마나 영광스런 업적인가! 제독의 승리로 인해 카스테냐의 붉은 사자는 여전히 바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도록 포효할 수 있게 되었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섬나라의 노란 고양이가 발붙일 곳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니, 위대한 카스테냐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해준 업적이라고 감히 저 하늘의 신께 고할 수 있다네.”
그밖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국왕의 극찬이 이어짐에 따라, 제독의 머리칼 안쪽에선 식은땀이 조금씩 배어져 나왔다.
‘이건 불안하다.’
“하여, 그동안 고생한 제독에게 이만 토지를 내려주고자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