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바다의 두 사자-12
수백 척의 배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전장.
천둥이 몰아치는 구름 밑에 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쾅쾅 소리가 들려오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부 단종진은 포격이 아니라 돌진을 선택하여 상대방 진영에 파고들어 양쪽으로 대포를 날려대고, 하도 대포알 세례를 맞아 포갑판이 엉망이 된 배는 그냥 상대를 받아버리며 백병전에 돌입하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규모가 너무 커 선단으로 나뉘어진 상황에서 선단마다 지휘관이 달라 전투 성향이 달라지고 그때그때 전술까지 뒤바뀌는 난장판.
그런 난장판 한가운데에 전열함급 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맣고 볼품없는 배가 나타난 건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조그만 배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알았다면 모두가 그 배를 주시했으리라.
“......”
소년은 선수에 서서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공을 들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펴고 있었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소년의 왼쪽 눈이 이리저리 뒤엉킨 배들의 위쪽을 향했다.
황금 사자와 붉은 사자가 당장이라도 발톱을 드러내고 맞붙을 것처럼 양국의 돛이 가까워져 있었다.
소년의 배가 난입한 쪽은 하필이면 가장 상황이 엉망인 쪽이었다.
이 니아트리브 선단은 가장 약한 전력을 몰아넣은 제 4함대 소속이었다. 카스테냐 전열보다 수도 질도 뒤떨어지는 탓에 두드려 맞다가 참지 못하고 돌격하여 진형 파괴를 노리고 백병전으로 들어가게 된 경우였다.
소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황금색 돛을 단 배들을 식별하는 동시에 손안에 마법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서늘한 푸른 물빛이 눈동자 안에서 맴돌았다.
먹구름 사이를 휙휙 돌아다니는 번개줄기처럼 날뛰는 붉은 전격이 소년의 손 안에서 꼬이고 꼬이면서 구체를 이루었다.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면서도 일정 범위 이상 벗어나지 않는 그 화려한 움직임에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것만 같은 신기한 장면이었다.
붉은 번개 줄기는 소년의 손바닥에서 계속해서 생겨났고, 계속 겹치다 못해 어느덧 번쩍거리는 붉은 구체로 변모했다.
소년이 구체의 테두리를 향해 오므리고 있던 손가락을 펼치자, 수많은 번개줄기를 압축시킨 조그만 공이 하늘 위로 퉁 튀어올라갔다. 바다의 진주 호의 꼭대기보다도 훨씬 높게 올라간 번개의 공은 가죽 주머니 안에 빵빵하게 담겨 있던 물이 터져 나오듯, 그 한계를 벗어던졌다.
파지지직
소년의 머리보다 조금 큰 정도였던 번개 구체는 순식간에 그 크기를 확장해 웬만한 전열함의 중앙 돛대의 돛 수준으로 커지더니, 털실 뭉치에서 털실을 뽑아내듯 한 줄기의 번개 줄기가 튀어나갔다.
구체의 형태로 번개가 똬리를 틀고 있던 만큼 번개 줄기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구체의 크기는 줄어들었다. 반면 한 줄기의 가느다란 굵기로 뻗어나갔던 번개 줄기는 점점 손가락만한 굵기에서 큼직한 통나무 수준 이상으로 굵어졌다.
거대해진 번개 줄기, 아니 번개 기둥은 그 번개 특유의 난폭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마구잡이로 드잡이질을 하고 있던 배 사이를 바다뱀처럼 훑고 지나갔다.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빠지직 소리에 모두가 기겁하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망막에 절대로 잊지 못할 것만 같은 붉고 밝은 거체가 새겨졌다.
쾅- 쾅- 쾅-
대포를 발사하는 굉음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붉은 몸뚱아리는 돛대의 중간 부분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며 지나갔다. 모두 황금 사자가 그려진 돛을 단 돛대들이었다.
중간의 주 돛대건 주변의 작은 돛대건 상관없이 황금 사자 돛을 달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부숴버렸다. 부서진 부분은 오랜 시간 동안 불에 탄 것처럼 새까만 숯이 되어 있었다.
‘다음!’
그렇게 순식간에 32척에 달하는, 단종진 하나 분량의 니아트리브 함선의 기동력을 소실시킨 붉은 번개의 기둥은 소년의 의지에 따라 저 멀리 떨어진 단종진을 향해 말 그대로 번개처럼 날아갔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시야가 변환되고, 포격전을 벌이는 한 카스테냐 단종진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갈매기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저편에서부터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붉은 빛기둥이 날아오고 있었다.
소년은 갈매기의 시야에 의지하여 거대한 붉은 뱀을 조종했다. 그 지직거리는 번개는 일렬로 서 있던 니아트리브 함선들의 윗부분을 싹 스치고 지나갔다.
쾅-
구부러지는 일 없이 직진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만큼, 돛대 중간이 폭발하는 소리도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기기긱 거리면서 수십 개의 돛대가 일제히 잘린 통나무처럼 맥없이 기울어지며 수면에 물보라를 만들어냈다.
“무, 무슨 일이야 이게!”
“마법이다! 마법이다!”
소년이 만들어낸 붉은 번개의 뱀은 전장 여기저기를 쉭쉭 날아다녔다. 그렇게 백 척이 넘는, 단종진 네 개 분량의 니아트리브 함선들의 돛대를 잘라놓고 사라졌다.
힘이 다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파직 하고 공중에서 흩어진 모습으로 보건대, 명백히 일부러 마법을 취소시킨 모습이었다.
“으어, 어지러워.”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시야를 이리저리 바꾸려니 힘들어서 그래.”
번개마법은 조종이 힘들다. 까딱 잘못하면 아군 선박을 향해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 상황이고 수많은 배들이 난립하는 상황이라 돛 때문에 시야가 좁은 상태였다.
그래서 카스테냐 선단마다 붙여놓은 갈매기를 통해 시야를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마법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했다. 그 바람에 하늘에서 한 바탕 곡예비행을 한 것처럼 머리가 핑핑 돌았다.
‘희망봉에서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악마랑 하늘에서 싸웠는지 원.’
이제 전황은 기울었다. 소년의 배는 빠질 때였다.
“마, 맙소사.”
카스테냐 해군 종군 마법사단장 마티아스가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이 지금 뭘 본 것인지 이해하려 애썼다.
저런 엄청난 마법이라니, 마력이 떨리는 현상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눈으로 본 것만으로 엄청난 양의 마력과 굉장한 마력 조정 실력으로 이뤄진 전과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우리 쪽에는 저런 걸 다룰 마법사는 없다. 그렇다면 설마, 대선장이란 말인가? 번개마법을 쓴다 했으니......!’
저 정도의 거대한 마법이라면 확실히 전장에서만 보여줄 수 있을 법했다.
‘대선장은, 대마법사다. 최연소 대마법사야!’
마티아스 말고도 전장에 있던 모든 마법사들이 입을 쩍 벌리고 대마법사가 쓸 법한 마법의 등장에 호들갑을 떨었다. 많이 아는 유식한 마법사가 놀라대니, 수병들이 지레 겁먹기도 했다.
거대한 번개 기둥이 돛을 훑고 다닌 장면은 가히 신화와도 같았다. 만일 화가가 그 장면을 그대로 그렸다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웬 전설을 그려놓나?’하고 핀잔을 들을 것이다.
아군이건 적군이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위력에,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바깥을 보는 창구가 포문밖에 없는 포갑판 밑의 선원들조차도 거대한 번개가 날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그대로 손이 멈춰버린 것이다.
‘딱 좋은 때에 나타났군 대선장!’
알레한드로 제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전에 바다를 갈라놓는 저 마법을 본 적 있어서 그나마 빨리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설마하니 저 정도의 위력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겁먹지 마라! 저건 아군이다! 아군의 마법이다!”
“저게 아군이라고?”
“살았어! 살았다고!”
깃발 신호를 통해 소식이 전달된 카스테냐 해군은 갑작스런 상황에 가만히 있다가 환호성을 지르며 정신을 차리고 싸움을 재개했다.
돛이 다 부러진 범선은 그저 바다에 떠 있는 바다거북이나 다름없다. 선수나 선미로 이동하여 대포알만 먹여주면 되는 표적지다.
“......망할, 항복한다.”
돛이 박살나 바다 위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배들이 하나둘씩 백기를 들거나 끝까지 발악하다가 하나둘씩 패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
기함이 포함된 니아트리브 전열은 소년과는 정 반대편에 있었기에 마법이 닿지 않아 돛이 멀쩡해 후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쓰다 못해 따가운 패배의 맛뿐이었다.
화염탄으로 승기를 잡았음에도 그 이점을 살려 상대를 채 압박하기도 전에 등장한 마법사로 인해 니아트리브 함대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쫓아라! 한 척도 빠져나가게 둘 순 없다!”
대선장이 적 선박 대부분을 이동불능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돛이 멀쩡한 배들은 아직 70척도 넘게 남아 있었다. 저들이 순순히 본국으로 돌아가게 둘 순 없었다.
“추격대를 구성하라. 그리고 기함 선단과 그나마 전력이 온존한 선단 하나는 그대로 비아리츠로 상륙해 비아리츠를 점령한다.”
바스크 공국의 공왕은 겁쟁이로 유명하다. 의지하고 있던 니아트리브 해군이 박살났으니 멀쩡한 배를 앞세워서 위협하면 지레 겁먹고 백기를 들 것이다. 비아리츠에 남아 있을 니아트리브 해군만 일소한다면 이 전쟁은 끝이다.
“......그리고 대선장이 오면 내가 보잔다고 해라.”
당장의 위기는 넘겨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제독이 보더라도 대단한 마법사인 대선장을 이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따로 고민할 문제였다.
큰 승리를 거뒀음에도 대선장이란 문젯거리가 남은 탓에 제독의 얼굴에는 다소 그늘이 져 있었다.
***
“이 정도면 사기진작은 됐겠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소년을, 브란트가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기요, 사기 진작 정도가 아닙니다.
상대 함대의 절반 이상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이 싸움은 그냥 심판이 난입해 일방적으로 한쪽 선수를 때려눕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번개줄기로 갑판 위를 지져버린 게 아닌 게 다행이었다. 사상자가 많이 나오면 소년을 경계할 이들이 너무 많아질 거란 소년의 판단 때문이었다.
‘곤란한데.’
그렇지만 이조차도 과했다.
세도 너무 셌다.
저 양측의 함대에는 마법사들도 있는데, 그들이 저 거대한 번개를 보고 뭐라 생각할지 원.
강한 건 좋은데, 너무 강하면 그 또한 문제다.
너무 강하면 쓸데없이 견제를 받을 수 있다. 강한 마법사는 높은 직위의 귀족으로 인정받는다. 높은 직위의 귀족이란 그만큼의 권리와 이권을 가질 수 있단 얘기다.
‘반대할 귀족들이 많을지도 몰라.’
갑자기 굴러 들어온 돌이 박혀 있는 돌을 뻥뻥 차버릴 게 뻔하니 귀족들은 반대 성명을 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주군은 누가 봐도 대마법사급이다. 니아트리브의 물마법사를 견제하기 위해서 오히려 카스테냐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도 몰라.’
소년이 카스테냐의 귀족이 되어 카스테냐 국적을 가지게 되면 응당 대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족쇄도 같이 따라올 것이다. 그래서 카스테냐는 ‘사용할 수 있는 대마법사’를 가지기 위해 오히려 귀족 작위도 사략함대 제독 직위도 모두 주지 않고 은밀한 협력관계로 남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곤란해진다.’
소년이? 아니. 카스테냐가.
소년은 음식이 맛이 없다니, 빨리 귀족이 되고 싶다니 하며 브란트에게 가끔씩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음식 얘기가 나올 때마다 노골적으로 짜증내는 표정(그래봤자 미간 꿈틀 정도다.)을 짓는 것을 볼 때, 그게 방해받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빨리 알레한드로 제독에게 확언을 받아내야겠다.’
그래도 전공은 크니 제독은 소년의 손을 들어주려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