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93화 (94/128)

93화

바다의 두 사자-11

비아리츠에서 약 25km 떨어진 바다에서는 일대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쪽 수평선에 배들이 몰려 돛의 숲을 만들어 놓았고, 반대편 수평선에도 역시나 돛과 돛대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길가에 심어 놓은 높다란 관상용 나무들이 죽 줄지어 있는 것처럼 거대한 돛대들이 일렬로 하늘을 찌를 듯 세워져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위용이 넘쳐났다.

어떻게 저걸 다 관리하나 싶을 정도로 겹겹이 돛대 사이에 펼쳐져 있는 널따란 돛에서는 각각 황금 사자와 붉은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배의 경적 소리가 마치 돛의 사자들이 포효하는 것처럼 들렸다.

수백 척의 배가 모두 일렬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해역 전체를 무대로 하여 30에서 40여 척 규모로 이리저리 흩어진 채 각자 포격전을 벌이는 방식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상하좌우 어느 쪽이나 고개만 돌리면 서로 나란히 늘어선 돛의 장벽을 볼 수 있었다.

서로 자리를 잡은 각각의 단종진이 마치 창을 겨눈 두 부대가 서로를 찌르기 위해 서서히 접근하는 것처럼 돛을 펴고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무려 해역 전체를 통째로 전장으로 만든 거대한 국가 간 함대전의 중심에는 각 함대의 제독이 탄 기함이 포함된 선단이 존재했다.

“돛을 펼쳐라! 마법사들은 바람을 불게 하라! 오늘 누가 이 바다를 지배하는 사자인지 명확히 알게 되리라!”

붉은 사자가 포효하는 돛을 단 카스테냐의 무적함대의 기함, 십자가의 영광 호는 포효하는 사자 선수상을 앞세우며 힘차게 나아갔다.

“포를 장전하고 사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방향을 틀 준비를 해라! 위대한 니아트리브의 여왕 폐하를 위하여! 황금 사자를 위하여!”

황금 사자가 포효하는 돛을 단 니아트리브의 제 2함대의 기함, 황금사자의 영광 호는 입을 굳게 다문 사자 선수상을 앞세우며 신중하게 나아갔다.

기함이 포함된 단종진을 이루는 선박들의 체급은 함대에서 가장 큰 선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스테냐나 니아트리브나 기함은 가장 큰 체급의 배였고, 다른 배들 역시 그 다음가는 체급의 배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양측의 체급은 엇비슷했다. 서로의 법이 다르고 전투교리도 다르고 건조방식도 조금씩 달랐지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물리적인 크기의 한계점은 동일했으니 크기는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

‘온다......’

‘조금만 더......’

바다 위에서의 싸움은 해군이나 해적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함포 사거리에 닿을 때까지 전진하고, 때가 되면 직진하던 뱃머리를 빠르게 한쪽으로 틀어 옆구리를 내보인다. 그리고 상대방이 패퇴할 때까지 대포로 두드린다.

이는 육지에서 전열보병들이 벌이는 싸움과 흡사했다. 전열을 이루어 일제사격을 하고 구성원 중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육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용하는 무기가 훨씬 크고 시끄럽고 살상력이 세다는 것이다.

배 사이가 좁혀지며 배 위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의 형태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니아트리브의 함포는 사거리가 길다. 놈들을 훨씬 빨리 두들길 수 있어!’

알렉산더 제독은 아직 자신만만했다. 니아트리브의 기술력을 믿고 있었다. 다른 나라보다 길고 잘 맞추는 함포를 믿었다.

‘네녀석들이 머리를 트는 순간이 우리가 머리를 트는 순간이다. 각오해라.’

알레한드로 제독은 독기를 품고 때를 기다렸다. 니아트리브의 기술력은 유명하다. 하지만 니아트리브가 자신들의 함포의 유명세를 떠드는 동안 카스테냐는 놀고만 있었겠느냐?

한쪽에서 벌써부터 포격전이 시작되었는지 쿵쿵거리는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포격 준비.”

알렉산더 제독의 말에 깃발이 올라갔다. 다른 배들도 차례차례 깃발을 올리며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뱃머리를 돌렸다! 깃발을 올려라!”

알레한드로 제독이 상대방의 깃발을 보자마자 무섭게 외쳤다. 카스테냐 측 배에서도 깃발을 확 올리며 뱃머리를 돌렸다.

‘뭐야, 저놈들도 벌써? 하긴, 반쪽 무슬림 놈들이 놀고만 있진 않았을 테니 함포 개량 정도는 했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방향을 꺾으며 옆구리를 내보인 양측의 단종진이 볼 수 있었던 건 서로를 향한 수십 개의 검은 주둥이뿐.

“발사! 무적함대의 영광을 위하여!”

“발사! 여왕 폐하의 영광을 위하여!”

쿠 쿠 쿠 쿠 쿵!

청동 대포 내부에서 화약이 폭발하며 화염과 연기가 배의 옆구리를 감쌌다. 그 엷은 장막을 가르고 둥그런 쇳덩이들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거무스름한 덩어리가 공기를 가르며 바다 위를 휘익 날아와 나무로 이뤄진 옆구리를 세차게 뚫고 들어왔다.

콰자작하는 소름끼치는 나무 빠개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휘날렸다. 운 없는 수병은 선체 벽을 뚫고 들어온 대포알에 직격되기도 했다. 양측의 선원들은 몸 여기저기에 박힌 파편과 찢긴 피부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부지런히 대포를 끌어 장전을 시도했다.

한 번의 일제사격이 끝났다. 장전을 위해, 혹은 반대편의 포를 끌어와 놓기 위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사방에서 다른 단종진끼리 맞붙는 우렛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런데.

쾅!

니아트리브 측의 함선들이 일찍 재사격을 시작했다. 일제사격은 아니었다. 일찍도 아니었다. 대포 하나를 다른 대포보다 늦게 쏜 것이었다.

‘뭐지?’

알레한드로 제독은 머릿속 한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척에서 덜떨어진 수병 하나가 늦게 쏜 거면 몰라도, 모든 함선들이 일제히 대포 하나만을 늦게 쏜다고?

콰작! 쿵!

한 박자 늦게 쏜 대포알들이 카스테냐의 배를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직후.

콰콰콰쾅!

배 내부에서 일제히 붉은 화염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당장 알아와!”

제독과 마찬가지로 기겁한 장교 하나가 바쁘게 발을 놀려 연기가 뭉클뭉클 새어나오는 배 내부로 달려들었다.

장교는 포갑판의 처참한 상황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기저기 불티가 흩날리고 새까맣게 탄 시체가 뒹구는 가운데 화상입은 수병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장교는 그나마 멀쩡한 모습인 수병 하나를 부여잡았다.

“정신 차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포, 포, 폭발입니다! 대포알이, 대포알이 폭발했습니다!”

“고폭탄(Shell)?”

“아닙니다! 불길이 같이 튀어나왔습니다!”

배를 뚫고 들어온 뒤 폭발하여 사방으로 파편을 흩날리는 니아트리브 해군의 고폭탄은 유명했다. 하지만 고폭탄은 어디까지나 파편을 뿌려 선원을 살상하는 용도지 이렇게까지 큰 화염을 일으키진 않는다.

방금 보인 폭발은 마치 작은 규모로 유폭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하하하! 이놈들, 화염탄의 위력이 어떠냐!”

알렉산더 제독이 체통도 잊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껄껄 웃어댔다. 다른 수병들도 마찬가지로 놈들에게 한방 먹였다며 환호를 질렀다.

방금 늦게 쏜 대포알의 정체는 바로 ‘화염탄’이었다.

불을 다루는 마법사가 마법진을 그려넣고 마력을 불어넣어 대포에서 발사한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조그만 화염마법이 발동되도록 만든 대포알이었다.

원소 계열 마법이 흥하는 니아트리브의 마법계 상황에, 섬나라라 해군에 투자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과, 원소 학파 마법사 중 불을 전공하는 이가 많다는 특징이 겹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흐흐흐, 1함대를 빼놓고 온 이유가 이거다 이거야! 하하!”

니아트리브의 전체 함선 수가 해군력 1위 카스테냐보다 떨어짐에도, 제일 강한 전력인 1함대를 빼놓고 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런 비장의 무기는 결정적일 때 써야 했으므로 겨울 동안의 해전에서는 쓰지 않다가, 이렇게 대규모 해전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다만 화염탄이 많지는 않았다. 화염탄 한 발의 비용이 한 달 동안 드는 배의 유지비와 맞먹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사실 그보다도 비싸다) 비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선제압을 하고 상대방에게 후퇴를 종용하는 데는 효과만점이었다.

“하하! 니아트리브의 기술력이 어떠냐!”

니아트리브 수병들이 카스테냐 배를 향해 손등을 보인 채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들어보였다. 니아트리브 및 에크나르프의 대표적인 손가락 욕이었다.

화염탄으로 인한 검은 연기가 카스테냐 측 단종진에서 뭉클뭉클 새어나와 돛을 그을렸다.

‘이런 수를 숨겨뒀구나. 그래, 수가 적은데도 이렇게나 당당히 나오나 싶었다.’

알레한드로 제독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려라! 겨우 포탄 한 발에 도망갈 정도로 우리가 겁쟁이더냐? 겨울에 보인 추태를 또 반복할 셈이냐! 장전해라, 그리고 쏴! 포탄이 바닥날 때까지 쏘란 말이다!”

하지만 사기는 한풀 꺾여 있었다.

대포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대포 소리에 병사들이 더럭 겁을 먹은 것처럼, 난생 처음 보는 이런 ‘마법’ 같은 상황에 다시금 미지에 마주하는 공포가 머리를 든 것이다.

겨울 동안의 연속된 패전의 그림자는 아직 덜 씻겨나간 상태라 수병들이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벌써 전의를 잃어가고 있다. 마법사라도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나았을 텐데.’

하지만 마법사들은 전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상대편 마법사를 방해하거나 아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가장 체급이 큰 배로만 이뤄진 기함 포함 단종진이 설마 지랴 싶어서 차라리 다른 단종진 지원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며 여기엔 마법사를 두지 않았다.

알레한드로 제독이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여기서 카스테냐의 영광은 끝이 나는 것인가?

***

“슬슬 우리가 나설 때가 되었네.”

“......”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년을 브란트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 말투 해주시지요.’하는 눈빛. 소년은 애써 그 불편한 시선을 피하면서 보우스프릿 뿌리 부분에 발을 얹었다.

소년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제 양지로 발을 디디는 순간이다. 사령술은 아니지만 앞으로 선보일 마법으로 인해 별 말고도 소년을 주목하는 이들은 많아질 테고, 앞으로는 더 어려워지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원하지 않는 관심 말고도 돈과 명예와 직위,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권리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돛 펼쳐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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