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91화 (92/128)

91화

바다의 두 사자-9

바스크 공국의 중심 항구 비아리츠.

수백 척의 배가 부두를 가득 메운 것도 모자라 근처 바다에 우르르 몰려 마치 숲을 보는 듯했다.

이 배들은 다름 아닌 니아트리브의 함대였다.

카스테냐와 니아트리브는 멀리 떨어진 국가다. 니아트리브 함대는 니아트리브 측과 손을 잡은 바스크 공국의 하나밖에 없는 항구에 몰아넣어질 수밖에 없었다.

항구가 크긴 하지만 수백 척이나 되는 배 전부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는 근해로 정찰을 보내 수용량을 줄이고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식으로 가까스로 함대를 정박시킬 수 있었다.

그런 비아리츠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니아트리브 수병들이 몰려들어 돈을 쓰고 사고를 치고 하며 인산인해로 난리통이었다.

그 수많은 병사들을 통제하는 중심에는 바스크 공국이 공왕의 성 일부를 친히 빌려줘 마련된 니아트리브 제독의 집무실이 있었다.

“뭐야, 전멸이라고!”

쾅!

니아트리브 제 2함대 제독이자 2, 3, 4함대의 총지휘관을 맡은 알렉산더 제독이 책상을 쾅 내려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귀족스럽지 못한 몸가짐이었지만 여기서 제독에게 뭐라 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참한 패배 앞에선 누구라도 그렇게 분노할 자격이 있으니까.

방금 들어온 소식은, 비고 항의 보물선을 약탈하러 갔던 함선들이 함정에 빠져 모조리 나포당했다는 비보였다.

배 한 척 수병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해 카스테냐에 침투한 간자를 통해 뒤늦게나마 패전을 접한 제독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혈색으로 변한 제독이 가까스로 분노를 삭히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겁먹기만 한 놈들이 함정까지 팠단 얘기는 우리 측에 대마법사가 없다는 걸 확신한 거다. 이번 승리로 놈들의 사기는 다시 회복되었겠지. 그러면 무적함대의 명성을 회복시키겠단 일념으로 곧장 공세로 들어갈 게 분명하다.’

지기만 했던 카스테냐가 선택할 수 있는 길목은 ‘공격’ 하나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반격을 받은 니아트리브가 해야 할 일도 하나뿐이었다.

‘놈들을 한 번이라도 패배시켜야 한다. 사기가 오른 지 얼마 안 되었으니 패배를 하면 그 즉시 사기가 바다에 꼴아 박힐 거다.’

제독이 벽에 걸린 해도를 훑었다. 장교들이 제독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긴장하며 제독의 눈길을 따라 해도를 응시했다.

가운데를 직 긋고 있는 붉은 선이 인상적인 해도.

제독은 연필로 비고 항이 있는 곳에 X자를 쳤다.

“놈들의 동선은 뻔해. 보나마나 사기를 올리겠다고 우리에게 약탈당한 곳을 순회하겠지.”

문제는 어디를 들릴 거냔 거였다.

니아트리브 해군은 카스테냐의 서부와 북부 해안을 모조리 약탈했다. 해안가 도시란 도시는 빠짐없이 털어먹은 탓에 카스테냐 해군이 향할 도시가 어딘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가능성이 있는 곳은 군항이었던 곳이지. 당장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야 할 테니까. 그 중 하나가 페롤이고.”

하지만 카스테냐 북서쪽 끝인 페롤에서 일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소식이 전달되는 게 늦은 만큼, 카스테냐 해군은 진작 페롤로 입성하여 한층 더 군의 사기를 높였을 것이다.

“페롤은 이미 늦었고, 그러면..... 산탄데르(Santander)가 좋겠어.”

군항의 입지조건 중 하나는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만이 있는 것이다. 카스테냐 북부 해안에서 그런 지형을 가졌으면서 규모가 어느 정도 큰 도시임과 동시에 비아리츠와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는 산탄데르뿐.

산탄데르는 무역 요충지임과 동시에 군항이라는 특이한 입지를 가진 곳이었다.

“보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도 여기를 지나치진 않겠지.”

참모들은 제독의 말에 동의했다.

“놈들에게 똑같이 돌려준다.”

산탄데르의 만의 형태는 뻣뻣한 S자 형. 만의 남쪽 구부러지는 곳에 함대를 숨겨두고, 만 바깥쪽에 있는 작은 섬 뒤편에도 함대를 숨기고 양쪽에서 일제히 기습한다면 카스테냐 함대는 영락없이 샌드위치 신세가 될 것이다.

제독은 이 작전을 현 해군 본부의 귀족 관료 이름이자 그 사람이 만든 음식 이름이기도 한 샌드위치(Sandwich) 작전이라 명명하고 즉시 움직일 것을 명했다.

“빠르고 작은 정탐선을 보내서 저 반쪽 무슬림 놈들이 어디 숨었는지 낱낱이 찾아내라!”

한때 카스테냐 반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것을 빗대 만들어진 카스테냐인에 대한 멸칭을 입에 담으며, 제독이 분노에 찬 명령을 내뱉었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며 바삐 움직이는 해군 장교들을, 창밖의 나무에 앉아 있는 갈매기가 생기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지식은 힘이니, 한껏 보호하라.”

소년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좋은 말이군요. 어디서 보셨습니까?”

브란트의 말에 소년은 어떤 책의 귀퉁이에 누군가 낙서한 글귀라 대답했다.

“그런데 많이 배우라는 것도 아니고 보호하라니. 마치 지식을 꽁꽁 숨겨두란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나는 군사학자나 장교가 한 말이라 생각해. 아니, 생각하네.”

“음. 잘하셨습니다. 남을 상대할 때 말고도 평상시에도 귀족적 말투를 계속 하셔야 익숙해집니다.”

“......알겠네.”

자신만의 작전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브란트의 하드코어 그 자체나 다름없는 예절교육을 받은 소년의 안색은 많이 지쳐 보였다.

“어쨌거나 죽은 동물을 동원하는 방식은 참 좋은 방식일세. ......아직도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그런데 그냥 평소엔 내 맘대로 말하면 안 돼?”

“안됩니다.”

단칼에 거절하는 브란트.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어깨를 괜히 축 늘어뜨리며 짐짓 슬픈 척 했다. 표정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으면서 몸짓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뭔가 인형 같아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음, 산탄데르 쪽에 함정을 판단 건 확실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 참전해야 할까......’

장난은 그만두고,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갈매기를 조종하여 바람을 타고 활강하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보는 비아리츠 항 앞바다는 돛을 접은 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마치 돛대로 이루어진 숲처럼 보였다.

그 중 돛을 펴고 막 출항하려는 배의 작은 돛대 위에 갈매기를 내려앉게 하고, 소년은 다른 갈매기로 의식을 옮겼다.

소년의 시야에 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그 다음으론 그 바다를 항해하는 큼직한 전열함들이 보였고, 날개를 접고 앉은 바로 옆에는 카스테냐를 상징하는 붉고 하얀 깃발이 걸려 있었다.

갈매기가 앉은 배는, 페롤 항에서 보급과 수리를 마치고 카스테냐 북쪽 해안에서 들려야 할 도시 중 첫 번째인 히혼으로 향하는 카스테냐의 함선이었다.

‘대략 일주일 전후로 한바탕 하겠네.’

카스테냐 함대가 히혼까지 가는 시간에다, 히혼에 들러서 간략한 보급과 정보를 받아보고 출항 준비를 마친 다음, 산탄데르로 출발해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총 시간을 잰다면 대략 그쯤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카스테냐 함대가 산탄데르에 도착하는 그 즉시 전투가 벌어지리라.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걸릴 수도 있다. 소년은 자신이 이끄는 배의 속도와 일반적인 범선의 속도가 다르다는 걸 안다.

카스테냐 함대 역시 마법사들이 바람을 불게 하여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맘만 먹으면 24시간 내내 불게 할 수 있는 소년과는 달리 그들은 한두 시간 정도밖에 지속할 수 없다. 그마저도 적당할 때 그만두는 게 아니라 지쳐서 그만두는 거였다.

‘그냥 산탄데르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소년의 계획은 싸움이 벌어질 무렵에 카스테냐 함대에 슬쩍 끼어들어 그들을 돕는 거였다.

카스테냐 함대와 부대끼면서 자신의 선원들이 일반 사람과 다르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싶지도 않았고, 괜히 니아트리브 해군에게 포착되어 경계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소년의 선원들은 보급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 그래서 카스테냐 북부 해안에서 꽤 떨어진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죽치고 있었다. 그동안 소년이 한 일은 갈매기 떼를 퍼뜨려 정보수집을 하고 브란트의 핀잔을 받으며 힘을 갈무리하는 것뿐.

‘지식은 힘이니, 한껏 보호하라.’

약탈한 책 중 한 책의 표지 뒷면에 누군가 낙서해 놓은 글귀.

소년은 그 글귀를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군사학자나 장교가 썼을 거라 생각했다. 그 두 직종은 전쟁에서 정보가 가진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이들이므로.

일반적인 정보 수집 방식과는 달리 죽은 짐승을 이용하여 고급정보까지 간단히 알아낼 수 있는 소년에게는 참으로 와닿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서 나의 것으로 만들고, 그걸 써먹을 때를 기다려라!’

남이 모르는 정보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며, 남을 협박하거나, 속이거나 꾀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즉, 말 그대로 힘 그 자체다.

빈민가에서 영혼의 맛을 처음 보고 머리가 반쯤 맛이 가 빈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다녔을 때, 소년은 단순히 함정을 파 죽이는 것 말고도 정보로 유인하는 방식으로도 빈민을 사냥했다.

어떤 정보를 알려 줘 누군가를 으슥한 곳으로 가도록, 혹은 정신이 없도록 유도한 다음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며 남편에게 알리고 불륜 현장을 습격하게 하여 살인 사건을 유발하거나(혹은 주도하거나), 현상수배범이 어디 숨어있다며 폭력배에게 말하고는 둘이 싸울 때 둘 다 죽여 영혼을 빼먹는 등의 어부지리 방식을 비롯하여, 횟수를 세자면 양손양발로도 부족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여 봤다.

소년이 말한 정보엔 거짓말도 있었지만 빈민가 내에서 소년만이 알고 있던 정보도 있었다.

그런 전적이 있는 소년이니, 그 말이 맘에 쏙 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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