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바다의 두 사자-8
“-하여, 대마법사는 없다는 것이 왕실에 의해 확언되었다. 따라서 모든 병사들은 지금까지 당해온 수모를 씻을 생각으로 임하도록 하라!”
와아아아!
광장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출병일이 되었다.
카디스 항은 수비대를 동원하여 출입하는 인원을 제한했다. 그 텅 빈 도시의 광장에서 알레한드로 제독은 수병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사기를 고취시키는 출정식이었다.
대마법사가 없다. 왕실의 확언. 이 두 말로 인해 모든 수병들은 사기와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올랐다.
“물마법사만 없으면 이기지!”
“별 볼일 없는 섬나라 니앗 놈들 따위 우리 대포에 한방이야!”
“그동안 당한 치욕을 씻을 때다!”
지금까지 물마법사라는 공포에 갇혀 있었던 그들의 폭력성은 고삐 풀린 야수처럼 날뛰었다.
“모두 보급품을 싣고 출항 준비를 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섬나라 촌놈들을 꺾고 누가 바다의 주인인지를 보여줘라!”
사기가 떨어져 골골대던 모습은 어디가고, 장교고 병사고 힘차게 몸을 움직이며 짐을 옮겼다. 마법사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마법사가 없단 말에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 건지.
수백 척이나 되는 배들이 일제히 돛을 펴는 소리가 거대한 새떼가 일제히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항구를 울렸다.
“주변 지역에 공고를 붙여라. 지금 복귀한다면 탈영병이라 해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일전을 겨룰 때가 다가왔다. 수병 숫자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법사가 무서워서 도망간 이들이니만큼 어지간하면 돌아올 것이다. 동료들의 눈길이 곱진 않겠지만 그거야 본인이 책임질 문제였다.
병사들이 골목골목을 다니며 종이를 붙이고 길거리 꼬마 녀석들에게 동전 몇 닢을 주고 공고 내용을 외치고 다니라 시켰다.
땡 땡 땡
출항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하역 작업을 끝마친 선단이 항구 밖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나아갔다.
“해군력 1위는 허명이 아니군요.”
“그러게. 모아놓고 보니까 정말 많아.”
카디스 항 연안에 닻을 내리고 있던 바다의 진주 호에서 카스테냐의 함선들이 항구로 나오는 것을 본 소년의 평가였다.
웅장하다, 힘차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많다. 그게 소년이 느낀 전부였다.
저 함대의 숫자를 제외한 건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찮았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저 선단을 모두 시체로 채울 수 있기에.
‘아니야.’
소년은 시체 운운하는 생각을 머리를 흔들며 잊으려 애썼다.
‘나는 귀족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계를 사지 말아야 한다. 사령술사라는 걸 들켜선 안 된다. 나는 세상을 멸망시킬 운명이 아니다. 적은 최소한으로. 시체는 최소한으로.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며 살 것이지 세상을 뒤집을 운명이 아니야. 운명 따위......’
최면을 걸 듯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이며 소년의 검은 눈이 눈꺼풀 밑으로 사라졌다. 눈을 감은 소년은 죽은 갈매기들을 카스테냐 선단의 기함들에 각각 붙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잊으려면 시야를 바꿔 가면서 정신을 딴 데로 쏠리게 해야 했다.
“우리도 어서 가자. 갈길이 멀어.”
소년의 눈 깊은 곳에서 힘이 일렁이고, 바다의 진주 호는 돛이 찢어질 듯 부풀어오르면서 일반적인 범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야심한 밤.
니아트리브의 제 3함대에 소속된 46척의 함선들이 야음을 틈타 항구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불그스름한 광원만이 전부인 비고 항은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누구도 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물선이 어디쯤에 있댔지?”
망원경으로 어둠 속을 살피던 습격대를 이끄는 제 3함대의 제독이 부관에게 말했다.
“위치가 아니라 배 크기와 척수로 가늠하라고 총제독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 정도 크기에 옹기종기...... 아.”
“저거군.”
둘의 시야에 배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날 잡아잡수쇼 하고 불까지 환하게 켜두고 있는 배들. 지금이 전쟁통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참으로 허술한 모양새였다.
“흐흐, 신께서 우릴 돕는구나. 대서양을 건너 왔으니 기진맥진해서 술독에 빠져 있는 모양이야. 보물선단이 총합 33척이라 했으니 얼추 맞는 거 같고....... 좋아. 절반은 포위하고 절반은 상륙한다. 서둘러!”
수면을 가르고 전열함들이 바삐 움직였다. 덜컹 하고 포문을 열고 앞으로 있을 포격전을 대비하고 돛을 조정했다.
보물선에 눈이 멀은 니아트리브의 습격대가 부두로 다가가는 모습은 마치 횃불에 달려드는 나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
“왔다.”
지붕 위에서 망원경을 든 채 석상처럼 굳어있던 병사 하나가 말했다. 병사의 좋은 눈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큼직한 그림자들을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
“달려!”
“이럇!”
야심한 항구에서 말 한 필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그 방향은 비고 항으로부터 북동쪽. 비고 만의 안쪽이었다.
***
비고 만(灣)은 많은 만이 그렇듯, 내륙을 향해 쐐기 형태로 푹 파인 형태였다. 그 쐐기 형의 만에는 위아래 해안이 튀어나와 좁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카스테냐의 함대 63척이 그 해안이 굽이지는 부분 뒤편에 숨어 있었다. 툭 튀어나온 해안선 부분의 높이가 낮아 함대는 건너편에서 봤을 때 돛까지 숨겨지는 좁은 영역에 옹기종기 숨어 있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가 부딪히며 좌초할 수도 있는 위험한 진형. 하지만 카스테냐 해군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다그닥 다그닥
요란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깃발을 단 말이 돌투성이 해안가에 나타났다. 그 말에서 기수가 허둥지둥 내려서더니 길목 바로 옆에 달린 종을 흔들었다.
땡땡땡!
쥐죽은 듯 조용했던 고요를 깨고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해안 저 멀리 잔뜩 몰려 있던 배들의 불이 두두둑 켜졌다. 동시에 펄럭거리는 돛 펴는 소리가 이어졌다.
“가자! 출항하라!”
“앞에부터 천천히 나가! 좌초하면 끝장이다!”
63척이나 되는 배들이 툭 튀어나온 지형의 모퉁이를 돌아 좁은 물목을 한꺼번에 지나가려니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당장에 기습을 시도해야 하는 그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상황. 하지만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가장 체급이 큰 배를 필두로 조금씩 조금씩 좁은 목 부분을 통과했다.
“아아, 알레한드로 제독님? 방금 전령 도착. 지금 출발. 대략, 열 척 정도 통과. 뒤이어서 계속.”
선두를 맡은 배에서 그 배의 함장이 그 비싸디 비싼 마법 통신 무구를 통해 수십 km 떨어진 본대의 알레한드로 제독에게 연락했다. 말 몇 마디 할 때마다 맑은 빛이었던 수정구가 조금씩 흐려지며 쩍쩍 금이 가는 것이 최대한 간략하게 얘기해야 했다.
[수신. 비고 습격 중?]
“아직...... 아, 이제 시작.”
말을 하기가 무섭게 비고 항 근처에서 천둥소리가 연거푸 들려오기 시작했다. 니아트리브 함대가 기습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좋다고 항구로 돌격하는 니아트리브 함선들. 그들은 벌써부터 금빛으로 번쩍이는 보물들을 한아름 안고 귀환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 속 금빛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뒤통수를 향해 적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
비고 항의 부두에 발을 내디딘 니아트리브 수병들은 정신없이 달음박질하여 정박한 배를 덮쳤다. 육지와 배를 연결하는 널빤지를 가로지르는 텅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함성이 울리고, 횃불과 등불이 일렁이며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그러나......
“왔다! 공격!”
와아아아아아-!
부두를 감싸고 있는 시가지에서 건물 하나쯤은 무너뜨릴만한 커다란 함성이 튀어나왔다. 카스테냐 특유의 흰 담장으로 이루어진 골목에서부터 자줏빛의 화려한 복장의 병사들이 군기와 머스킷 총검을 치켜세우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카스테냐의 육군이었다.
“헉! 하, 함정이다! 후퇴! 후퇴!”
딱 봐도 천은 넘어보이는 병력이 새까맣게 몰려나오자 니아트리브 수병들이 기겁하며 부두를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후퇴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죽여라! 돌격!”
항구에 정박해 있던 보물선에서도 병사들이 우르르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통 장거리 항해를 끝마친 선원들은 모조리 시내로 향하여 술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일종의 법칙이나 다름없어, 니아트리브 해군은 이 보물선들도 경계 병력은 얼마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빠르게 약탈하고 빠지자는 개념으로 가볍게 왔건만, 정작 그들을 반겨주는 것은 작정하고 포위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펑펑거리는 머스킷 발사음이 니아트리브 수병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다음 수순은 지리멸렬하는 것뿐.
카스테냐 보물선으로 위장한 선박에 올라탄 이들은 순식간에 포위되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배로 도망치려는 이들은 부두 근방에 매복해 있던 육군에게 퇴로가 막혀버렸다. 바다로 첨벙 빠진 이들에게도 무자비한 머스킷 사격이 날아왔다.
습격을 위해 정박한 니아트리브 함선들이 순식간에 육군에게 장악당했다.
“맙소사, 함정이었나! 후퇴하라!”
습격대를 지휘하던 3함대 제독이 식겁하며 후퇴 명령을 내렸으나, 니아트리브는 이미 덫에 걸린 사냥감이었다.
쿵쾅거리며 항구를 포위하고 있던 함대의 뒤편에서 대포알이 날아왔다.
“제독님! 카스테냐 함대입니다!”
“빌어먹을! 응전해! 쏘란 말이다!”
니아트리브 함선들이 서둘러 마주 포를 쏘았으나 이미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비고 항에 정신이 팔린 니아트리브 함대의 뒤편으로 우회하여 역으로 그들을 포위한 카스테냐 함대는 거칠 게 없었다.
배 척수도 많고, 어둠을 틈타 가까이 다가가는 데도 성공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수적 우세를 사용해 상대를 걸레짝으로 만드는 것뿐.
“쏴라! 놈들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려라!”
“돌격하려는 배는 뱃머리를 돌려서라도 몸으로 막아! 한 척도 빠져나가게 두면 안 된다!”
습격자를 역으로 습격하는 카스테냐 함대의 무기는 대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돛을 우선적으로 태워!”
“바람을 남쪽으로! 비고 항 쪽으로 불게 해라!”
카스테냐 함대에는 마법사까지 타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는 귀한 인재였기에 직접 포격을 주고받는 일선이 아니라 그 뒤편에 숨은 배에서 마법을 갈겨댔다.
그렇게 비고 항을 습격하러 나온 니아트리브 함선 46척은 한 척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조리 나포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내 빌빌거리던 카스테냐 해군은 비로소 자존심을 다시 세움과 동시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이 기세를 살려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