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바다의 두 사자-7
전투라는 것은 서로 약속하여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매복, 기습, 야습 등의 단어가 생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득을 위해 서로가 원하는 것이 겹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군비절약이나 통솔 문제, 이동 중 기습 우려 등으로 인하여 단기결전을 위해 일정한 곳에 모여 싸우는 회전의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양측 지휘부가 서로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지점에서 만나 싸우면 되겠다 하며 암묵적으로 전투 지역이 합의되는 것이다.
바다에서의 싸움 역시 단종진의 개발 이후 함대결전사상과 맞물려 단기결전으로 한 번에 상대방을 섬멸한다 하는 전략이 우세했다.
더구나 바다는 암초를 제외하면 사방이 뚫려 있는 지형. 부대의 부피와 지형을 많이 타는 육군과는 달리 바다에서는 한 곳에서 해군력을 밀집해 큰 싸움을 벌일 수가 있다.
배의 건조 및 선원의 훈련은 제식과 총기사용법만 가르치면 되는 육군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따라서 해전에서의 승패는 전쟁에서의 중요한 무게추가 되곤 했다. 제해권을 장악하면 해상 보급에도 유리했기에 해전의 중요성은 더 무겁다.
따라서 해전의 승패를 위하여 카스테냐와 니아트리브 두 함대는 어디에서 해전을 벌여야 하느냐에 대해 서로 머리를 굴렸다.
***
니아트리브의 제 2, 3, 4함대의 총사령관이자 2함대 제독을 맡고 있는 제독 알렉산더는 유로파 서해안을 모조리 그려놓은 해안선 지도를 큼지막한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채 고심하고 있었다.
지도의 중간 부분에는 에크나르프와 카스테냐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붉은 선이 가로로 길게 그어져 있었다.
그 위로는 니아트리브의 해군, 그 밑으로는 카스테냐의 해군이 각각 장악하고 있는 영역이었다. 에크나르프의 해군은 작년에 궤멸되었으니 에크나르프를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브롤터......’
제독의 눈은 지중해의 입구, 지브롤터를 보고 있었다.
저곳을 장악하면 지중해를 지배할 수 있다.
군사적인 면은 물론이고 통행세도 쏠쏠히 뜯을 수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현재 니아트리브 함대는 에크나르프와 카스테냐의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지도에 그어진 붉은 선에 의해 정확히 반으로 나눠지는 바스크 공국에 정박하고 있었다. 평소 주변 두 강대국의 내정간섭이 빈번한 곳이라 이번 전쟁에서 니아트리브에 협력하겠다고 한 나라였다.
여기서부터 지브롤터까지 가려면 카스테냐 반도 해안가를 쭉 따라 가야 하는 긴 거리이며, 카스테냐의 최대 군항 카디스가 지브롤터 바로 왼편에 있기도 하다.
그 말은 즉, 카스테냐 해군을 궤멸시켜야 지브롤터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제아무리 대마법사 때문에 위축되었다고는 하나, 상대방은 그 유명한 무적함대다. 그 무적함대의 위명 때문에 세 개 함대나 끌고 온 게 아닌가. 비록 4함대는 새로 개편이 되어 상선까지 끌어 모아 실질적인 전력은 되지 못하겠지만 척후나 상륙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최대한 깊이 파고 들어야 한다.’
겨울 동안 해상에서의 전선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밀려났다.
대마법사 덕분에 카스테냐 해군의 사기는 말도 되지 않아 물마법사로 파도만 좀 치게 만들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곤 해 이만큼이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카스테냐 턱밑이다.’
기만작전도 목에 칼이 들이 밀어진 상대로는 먹히지 않는 법. 저들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싸울 가능성이 높았다.
제독은 그냥 카디스 항을 기습해버릴까 했지만 욕심은 금물이었다.
당장 작년의 에크나르프 해군이 린던을 공격하려 수백 척이 몰려들었다가 니아트리브 측에 빌미를 주어 모조리 수장당했지 않은가. 저쪽에 물마법사가 있지는 않겠지만 달걀을 한 바구니에 모두 담는 건 지양해야 했다.
‘저들을 끌어내? 아니면 주변 항구를 파괴해서 고립시켜?’
장교들과 함께 한참을 고민하던 알렉산더 제독은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자 회의를 끝내기로 했다.
몇 분 뒤. 제독은 인근을 산책하며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짠내와 비린내 진동하는 바닷바람은 오랫동안 바다 생활을 한 제독에게 익숙했다. 바람을 받으며 회의로 지친 머리를 식힐 때, 누군가가 제독에게 다가왔다.
“이게 누구십니까, 알렉산더 제독님 아니십니까!”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 바스크 공국 주재 니아트리브 대사였다.
“아 반갑습니다 대사님.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요?”
“하하, 그저 산책을 나왔을 뿐입니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건 제독은 안다. 대사관은 바스크 공국 내륙에 있다. 여기까지 나와 제독을 접견할 이유는 없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오늘은 산책하기 다소 찬 날씨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조금은 후회됩니다.”
그러면서 허허 웃는 대사.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이 제독 뒤의 호위병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제독은 그 시선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호위병들을 물리고 제방 근처에 담화 자리를 마련했다.
“뭐 나름 따뜻하게 입고 왔습니다. 카스테냐는 여기보다 더 따뜻해 이런 옷이 필요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럼 여기 오래 계셨을 테니 카스테냐 날씨 얘기를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날씨야 늘 따뜻하지요. 하지만 요새 조금 바뀐 모양입니다. 글쎄, 저기 비고(Vigo) 항이란 곳은 여기보다 남쪽인데 훨씬 춥다 들었습니다. 아마 전쟁통이라 병사들의 날카로운 예기가 날씨를 더 춥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아, ‘병사’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얼마나 춥길래 그러십니까?”
“어휴, 말도 마시지요. 글쎄 고드름이 수십 개나 달랑거린다지 뭡니까.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그 고드름이 얼마나 잘 얼었는지 무슨 황금처럼 번쩍거린다는 소문도 있다니까요?”
제독의 눈이 빛났다. 황금이라!
“거참 흥미로운 소문이군요. 그 고드름이 얼마나 날카롭답니까?”
“사람 머리 위에 떨어져도 괜찮을 정도라던데요?”
“호, 그렇군요. 재밌는 얘기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렇게 추운 줄은 몰랐습니다. 옷을 좀 얇게 껴입고 와서......”
“예, 그러지요. 제독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이곳은 카스테냐와 국경을 맞댄 나라. 누구의 눈과 귀가 있을지 모르니 대화는 철저히 수수께끼처럼 이뤄져야 했다.
***
며칠 전, 카스테냐 해군 수뇌부.
“-그렇게 해서 니아트리브 놈들을 끌어내는 거다.”
알레한드로 제독이 넓게 펼친 카스테냐 근방의 해도를 가리켰다. 지도 위에는 배 모양을 한 말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장교들이 목탄으로 이곳저곳 표시를 해놓은 흔적이 엿보였다.
“놈들이 그런 소문에 걸려들까요?”
“놈들은 황금에 굶주려 있어. 보물선이 있단 얘기를 들으면 득달같이 달려올 거다. 그리고 보물선에는 호위가 따라붙지. 비고의 보물선 호위함들이 우리에게 합류하기 전에 차단해야한다고 생각할 거다.”
“그러면 서둘러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소문이 얼마 만에 바스크까지 닿을 줄 알고요?”
“걱정 말게나. 바스크에 연줄이 하나 있어. 그게 니아트리브 대사에게 정보를 흘려줄 거야. 바스크에 침투한 간자가 얼마나 많은데. 소문 흘리는 정도야 간단해.”
“그럼 니아트리브 함대가 비고 항에 도착하면......”
“그대로 뒤를 쳐버리는 거지. 마침 비고 북쪽에 갈고리 모양 곶이 있으니까 함대를 숨기기도 좋을 거다. 물론 모든 배를 거기 숨길 순 없으니 비고 만 안쪽에도 숨겨둬야지. 놈들이 얼마나 올지는 모르겠지만 보물선 규모는 대충 수십 척으로, 병력도 얼마 없다고 소문을 꾸밀 거다. 그걸 약탈하고 나포하려면 족히 그 두 배 정도는 오겠지. 함대 하나에 필적하는 배를 섬멸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면 그 뒤는 어떻게 합니까?”
“비고 항에서의 공격이 성공리에 끝나면 남쪽에 대기하고 있던 함대까지 모두 끌고 페롤(Ferrol) 항까지 올라갈 거다.”
알레한드로 제독이 사각형의 카스테냐 반도의 북서쪽 끝머리를 가리켰다. 페롤 역시 군항이었는데 겨우내 전선이 밀리며 한바탕 약탈당한 적이 있었다.
무적함대로 유명세가 자자한 카스테냐의 군항이 공격당했다는 것은 카스테냐의 자존심을 긁은 것은 물론이고, 약탈당했다는 상징성에 위치까지 겹쳐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페롤은 최전선이고 위험하단 인식이 박혔다.
“사기가 떨어져서 카디스에만 줄곧 틀어박혀 있었지만 비고에서의 작전이 성공하면 사기가 한층 오를 테고, 페롤에 정박하는 자신감도 되찾을 수 있게 되겠지.”
제독은 연필로 페롤에 삭 원을 그렸다. 장교들이 제독의 연필에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연필심은 대부분 니아트리브 산인데, 현재 니아트리브와 전쟁 중이라 연필의 가격이 훌쩍 뛰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발명된 지 얼마 안 되어 그 희소가치 때문에 비싼데.
“니아트리브도 한방 먹었으니 또 다른 함정이 있을까봐 섣불리 움직이진 못할 거고, 페롤로 올라가는 동안은 별 문제 없을 거다.”
“제독님, 그럼 아소르스의 대선장은 어떻게 합니까?”
“대선장이라...... 대선장은 이번 작전에서는 빠지기로 했네. 대대적인 함대전이 있기 전까지는 참여하지 않겠다 했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런 싸움에서 빠지겠단 겁니까?”
공격과 수비가 바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싸움이다. 그런데 얌체같이 뒤로 빠지겠다니.
“자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 어차피 전력 노출도 있고 주도권 문제도 있으니 도움은 최소한으로 받을 생각이었으니 걱정 말게나.”
제독은 가만히 해도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려진 것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잠시 말이 없던 제독은 마른세수를 한번 하고 뒤이어 말했다.
“우리는 페롤 항을 정신적으로 수복한 다음 여기, 히혼(Gijon)을 거쳐 산탄데르(Santander), 빌바오(Bilbo)까지 차례대로 들리며 전진할 걸세.”
장교들의 눈이 빛났다. 세 항구도시 모두 중요 무역도시다. 동시에 니아트리브 해군에게 약탈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 세 곳을 무사히 거친단 말은 수병들의 사기를 한층 충만하게 해줄 것이다.
또한 주요 무역도시라는 의미는 물류를 위한 교통이 완비되어 있단 얘기고, 교통이 좋단 것은 보급로가 뚫려 있단 얘기다.
“우리는 이 세 도시에서 차례대로 보급하고, 빌바오에서 곧바로 바스크로 간다. 왕국 내부 귀족끼리의 싸움도 다 끝났으니 육지에서 보급이 지연되는 일은 없을 거다.”
“도중에 니아트리브의 반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걱정 말도록. 페롤에 발을 딛는 것만으로 사기는 웬만큼 회복되어 있을 거야. 무적함대의 위명을 똑똑히 놈들에게 새겨줄 수 있을 걸세.”
그러면서 물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애써 지웠다. 정치적 악수를 둘 리가 없어. 그래. 그래야만 해.
“그리고 니아트리브가 정박한 비아리츠(Biarritz)를 친다.”
비아리츠는 바스크 공국의 전부나 다름없는 항구였다. 이는 제해권을 다시 잡는 동시에 늘 눈엣가시였던 바스크 공국까지 도모한다는 참으로 야심찬 대작전이었다.
이는 도박수가 짙었다.
도중에 한 번이라도 패퇴하면 사기는 도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뜨린 오크통처럼 산산이 조각날 것이다.
하지만 제독은 어느 정도 보험을 들어 두었다.
‘대선장...... 니아트리브만 몰아내면 작위건 뭐건 도와줄 테니 제대로만 싸워 다오.’
바로 어젯밤, 대선장은 제독을 찾아와 ‘그래도 얼마 정도의 신뢰는 줘야 하니 마법을 시연해 보이겠습니다’하며 바다 한복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제독은 대선장의 마법을 목도했다.
바다를 가르고 튀어나온 용암 같은 굵고 붉은 그 빛줄기는 아직까지도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진 것처럼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