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바다의 두 사자-6
미성년자 마법사는 많다. 마법은 어릴 때부터 수련하면 좋다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견습이거나 선천 마력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다. 견습 기간은 최소 5년을 잡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견습 기간을 그보다 짧게 잡는 수재도 간간이 등장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다.
그런 상황에서, 열여덟살의 견습 마법사가 아니라 열여덟살의 마력을 불어넣을 줄 아는 마법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제 믿습니까?”
소년이 말했다. 눈은 여전히 내리깔고 앞에 있는 탁자를 뚫어질 듯 보고 있었다.
마력을 어딘가에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소년의 마법실력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력을 움직이는 것이 걷는 것이라 친다면, 마력을 불어넣는 것은 달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나도 저때는 못했는데......’
마티아스는 열다섯에 학파에 소속되어 10년은 꼬박 수련한 끝에 정식 마법사가 되었고 비로소 마력을 불어넣을 줄도 알게 되었다.
“커흠.”
얼빠진 얼굴을 한 시간이 길어지자, 알레한드로 제독이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제 검증은 되었으니, 자네는 정신 차리고 입간수 잘 하게나.”
“아, 예, 알겠습니다.”
진짜 대선장이라는 검증이 끝났으니, 이제는 카스테냐 해군과 아소르스 제도의 해적이 서로 어떻게 도움을 줄지 회의가 이뤄질 차례다. 이제부터는 군 기밀의 영역. 소년이 어린 나이에 재능을 갖고 있단 사실도 정식으로 공표되기 전까진 입을 닫고 있어야 한다.
“자 그럼 대선장. 이제 전술을 짤 시간일세. 어떻게 전투를 할 생각이지?”
제독이 물었다. 서로 손잡자는 것은 이틀 전에 식당에서 합의를 마쳤다. 오늘 만남의 이유는 전략전술을 짜기 위해서였다.
소년은 잠시 어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제 기함 홀로 돌진합니다.”
“......”
“......”
“그게 단가?”
“예, 제독.”
“좀, 터무니없는 얘기로군. 전법이라 할 것도 없어. 식당에서 말했던 한 척 운운하던 건 그저 자신감이 있다는 표현인 줄만 알았는데.”
“말씀드렸듯, 전장에서 확인하게 될 겁니다.”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확실하다고는 하지만 국운을 걸고 하는 전쟁일세. 확실치 못한 자네의 실력에 해군 전체를 걸 수는 없어. 그 엄청난 물마법사가 여기로 내려왔는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
제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그에 맞춰서 전략을 짤 게 아닌가. 제독은 소년 뒤편의 기사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기사는 석상처럼 가만히만 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건가?
“그럼 자네가 무적함대의 방식에 맞출 텐가? 어떻게 싸울지는 대략 세워져 있네. 다만, 사기가 낮아서 문제일세. 그래서 만약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면 최대한 화려하고, 크게,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부탁하고 싶은데.”
“......”
소년은 제독의 말을 듣는 것인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시선을 계속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관습이 상대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생겨난 만큼 제독에게는 꽤나 불쾌한 모습이었다.
소년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얼핏 보면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상은 브란트와 정신없이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그 둘이 아니라면 누구도 모를 것이다.
잠시 뒤, 소년이 말했다.
“사기를 올릴 목적이라면, 홀로 가는 것보다는 같이 껴서 싸우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봅니다.”
“가릴 곳도 없는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네. 대책은 두 가지일세. 니아트리브가 단종진으로 나간다면 우리 역시 단종진으로 나갈 걸세. 다만 대함대끼리 부딪히는 만큼 해역 여러 군데에서 각 선단끼리 맞붙겠지. 하지만 니아트리브가 대마법사를 대동했을 때 보인 뭉치는 진형이라면 원형으로 포위할 생각일세. 물마법사가 사방을 모두 책임지진 못할 테니까.”
해전이 벌어지는 범위는 넓다. 안 그래도 배라는 건 큰 물건이다. 거기에 배끼리 충돌을 막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 떨어지기까지 해야 하니 당연히 진형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넓어진 전역을 물마법사가 모두 막을 순 없다. 기껏해야 한쪽 방향뿐.
아소르스 해전에서도 엘리자가 서쪽만 주로 마법을 써댔지 북쪽과 남쪽은 손도 못 댔지 않은가. 소년 역시 물마법사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제 스승, 님의 전투를 본 해적들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물마법사가 강하긴 하지만 한계는 분명합니다.”
있지도 않은 스승을 말하려니 혀가 꼬였다.
“그렇지. 그럼 자네는 거기서 어떻게 할 셈인가?”
“제가 창이 되어 진형을 흩어 놓겠습니다.”
단종진이 해전의 기본인 시대에서 진형을 흐트러뜨리는 배 한 척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건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또 홀로 돌진한단 얘기인가? 배가 버틸 수 없을 텐데? 모두가 진형을 이루고 있는데 혼자만 간단 얘기는 배 두세 척의 포격을 받아야 한단 얘기일세.”
“그렇다면 그걸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배라도 한 척 빌려주시지요.”
“......그런 배는 전투력이 높아 함부로 돌진시키기엔 아깝다네. 그보다 무슨 마법을 사용할 건지 대충이라도 얘기해줄 수 있겠나? 여기 마티아스가 자네의 마법에 맞춰 지원을 할 테니까.”
“맞습니다. 종군마법사들 중에 대선장과 맞거나 비슷한 마법사를 위주로 편성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실력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이 꼬마를 전적으로 믿기엔 이르다. 마력을 잘 다뤄도 정작 마법을 잘 못 쓰는 마법사도 허다하니까.
“화려함으로는, 번개가 제격이지요.”
소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티아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번개라. 공격력은 확실하긴 하지만, 마력이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벌어질 해전은 대규모입니다. 한두 척 그슬린다고 전황이 바뀔 순 없어요.”
번개 마법은 파괴력으론 순위권을 다투는 원소 마법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명중하는 빠르기, 생명체라면 견딜 수 없는 고전압, 무생물이라 할지라도 번개가 품은 열에 바싹 타버리거나 화재를 일으킬 수 있고, 사방으로 퍼지는 번개불꽃으로 인한 방사피해까지!
하지만 그 강점만큼 단점도 명확했다. 다루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번개의 성질을 제한하여 일직선으로 만들어야 하고 금속을 향해 내리꽂히려는 성질을 제어하기까지 해야 하니 여간 힘을 써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마법사보다는 아니지만 제대로 된 번개마법사도 제법 귀한 편이다. 번개마법을 전공해도 쓰기 편한 다른 마법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더욱 그렇다.
아소르스 해전에서처럼 마법진을 이용하던가, 번개마법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날씨에만 쓰거나, 마법무구에 담아서 쓰는 게 더 흔하다.
마티아스의 의문에 소년은 똑같이 답했다.
“전장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제독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한숨을 토해낼 것처럼 경직되었다. 마티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단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나. 관사 하나를 빌려주지. 계획이 확정되면 다시 부르겠네.”
“관사는 괜찮습니다. 저 밑에 ‘바다의 아가씨’라는 여관에서 묵고 있으니 부르실 일이 있으면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대선장을 내보내고, 제독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턱 걸쳤다.
“너무 꽉 막힌 작자로군. 뭘 보여줘야 믿건 말건 하지.”
“차라리 대선장이 없다고 치고 전술을 짜야할 듯합니다. 아니면 일반적인 마법사 전력으로 취급하거나요.”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전 아직도 의심이 됩니다. 식당에서 갑옷을 구긴 것과 번개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두 개 이상의 원소마법을 저 어린 나이에 수준급으로 달성한단 건 힘든 일입니다. 차라리 저 둘이 둘 다 마법사라는 게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움직일 줄 아는 선천 마력 보유자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도 자신이 다룰 줄 아는 힘 외의 마법은 익숙해지는데만도 족히 몇 년은 수련해야 합니다. 열 살 때부터 수련했다고 해도 고작 8년인데 선천 마력에도 익숙해지고 그 외의 원소 마력도 강력하게 쓸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진정하게. 나도 대충 상황파악이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독의 눈은 정치가와 닮아 있었다.
‘재고 있는 건가.’
수백 척의 해적선을 동원할 수 있음에도 부득불 한 척만 동원하겠다? 제독의 눈에는 뒷짐 지고 구경하다가 이기는 쪽에 붙어보겠다는 술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선장의 생각인지 아니면 그의 책사가 제안한 건지는 몰라도 대선장 측은 저울 위에 카스테냐와 니아트리브를 올려놓고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를 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적함대란 이름값이 있으니 일단 카스테냐 쪽에 먼저 접선한 거고, 전세가 기울면 니아트리브 쪽으로 홀랑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더 큰 걸 원하는 건가?’
아니면 카스테냐 해군이 니아트리브에 또 패배하여 손실이 나면 그걸 빌미로 작위 말고도 더 큰걸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이전 경우보다 훨씬 괘씸하다.
‘섣불리 생각하지는 말자. 정말로 한 척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대선장의 마법실력이......’
제독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허무맹랑한 생각이기 그지없었다.
혼자서 함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면 이미 대마법사 반열에 올랐다는 말인데, 아무리 마법에 문외한인 제독일지라도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낮은 가능성의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정도로 카스테냐 해군과 제독이 심리적으로 몰려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기도 했다.
***
여관으로 돌아온 소년과 브란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확실히 믿진 않는군요.”
“믿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어.”
전장에서 보여주겠단 말만 하고 나온 거나 다름없는 둘. 하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소년의 마법실력은 악마 둘을 집어삼키고 엄청나게 상승했다. 그런데 그 힘을 아직도 다 갈무리하지 못했다. 사탄을 잡아먹고 힘을 다 못 쓴 상태에서 희망봉의 악마까지 집어삼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년이 계속 안대를 쓰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따라서 소년은 마법을 잘 제어하지 못했다. 식당에서 갑옷을 통째로 구긴 것도 사실 쓰러뜨리기만 하려 했는데 마법이 과하게 발현된 것이었다.
거대한 코끼리를 섬세하게 조종하는 게 아니라 마구 돌진하는 코끼리의 대략적인 방향만 지정하는 수준이라고 비유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좁은 제독 집무실에서, 하다못해 바깥으로 나가도 번개마법을 잘못 시현했다가는 주변을 비롯해 제독과 마티아스 둘 다 통구이가 되었을 것이다. 안전한 경우는 서로가 멀리 떨어지고 사방이 탁 트인 바다뿐.
“그나저나 말입니다, 주군?”
“......어, 응.”
브란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소년은 싸늘해진 분위기에 말을 더듬었다.
“왜 자꾸 어물거리십니까. 주군께서는 당당히 어깨 필 수 있는 대선장입니다. 한 지역의 패자이고 그 자리에선 제독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독도 완전히 하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아시겠지만 동급으로 봐주고는 있단 얘깁니다. 그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씩씩하게 말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브란트의 지적이 서늘한 칼날처럼 소년에게 폭폭 박혔다.
“......”
“눈은 불쾌감이 드니까 못 마주치는 건 이해하겠지만, 목소리마저 기어들어가는 건 명백히 주군의 실책입니다. 주군께선 하급자가 아니고, 상대방의 호의와 신뢰를 얻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럴때는 당당하게, 자신의 특색을 갖추어 얘기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르쳐드렸던 건 모두 귓등으로 흘리신 겁니까?”
귀족가의 자제가 예절교사에게 꾸지람을 받는 구도가 된 채,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
“그리고 왜 자꾸 제게 물어보십니까. 그러느라 대답 시간도 지체되지 않습니까. 제게 물어보지 마시고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자꾸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은 버릇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절교육을 다시 한 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년의 안색이 이례적으로 창백해졌다.
브란트는 명문가 집안의 장남이었다. 사정이 있어 가문을 나오게 되었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가문의 장남으로서 받은 예절교육은 명문가답게 엄격하고 삼엄했다. 소년은 그 방식 그대로 브란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소년이 귀족적인 몸가짐과 예절을 빠르게 익힐 수 있던 것은 소년이 총명해서만이 아니라, 혀로 채찍질을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브란트의 엄격한 교육도 있었다.
“이제 보니 귀족적인 예의가 몸에는 배었지만 머리에는 아직 덜 들어간 것 같군요. 평소에는 괜찮다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된다면 배우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음번에 제독을 만나기 전에 그 버릇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년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만의 특색을 확립하겠다고 결심하고 지금까지 노력을 해오긴 했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걸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빈민가에 살면서 조성된 성격을 완전히 뒤바꾸기도 힘들다.
더구나 소년이 지금까지 만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더 우위에 있거나 손아귀에 넣은 이들이다. 동급이면서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다 자신 좋으라고 하는 거니까.
소년은 그걸 알고 있기에 배우기 싫다고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각오하십시오.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교육이 좀 약했었나 봅니다.”
귀화가 번득이는 듯한 브란트의 시선을 받으며, 소년의 눈이 절망과 체념에 물들었다.